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20
아리자데 때도, 판도라 때도 욕심을 꾹꾹 눌러놓았는데, 아예 2인극을 보고 나니 더 부푼 욕심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팡- 튀어나왔다. ‘나도 그와 연기해 보고 싶은데!’라는 마음이 더 이상 제어되지 않았다.
그녀는 데렉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둘 다 그와 연기해보고 싶으면, 그가 선택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왜 이래 나탈리. 그럼 나 울 거라고 했잖아.] [울든 말든.] [나랑 작품 찍고 싶어서 캐스팅보트 나온 거잖아. 이제 내 눈치 안 봐?] [안 봐요. 당신과 연기하고 싶은만큼 그와도 연기하고 싶어졌거든.] [호오…불리한 건 알고 있지?]처음엔 징징거리는 척 하던 데렉은, 이내 재미있다는 듯 한쪽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어쭈- 많이 컸네’ 하는 시선을 외면하며 나탈리는 꿋꿋이 주장했다.
[글쎄요. 그건 모르는 거죠.]결국 그들의 대치는 ‘비상회의 소집’이라는 사태에 이르렀다.
조지, 에바, 데니스, 수잔, 에밀.
심사위원진과 연출 수뇌부들은 모여앉아 ‘마지막 생방’이 흘러갈 방향을 다시 토의했다.
[최후의 2인이 나온 후 데렉-유명, 나탈리-다른 우승후보, 이런 구도로 갈 예정이었는데…솔직히 연출부 입장에선 나탈리의 의견도 좋은 것 같아요. 라스트 스테이지에서 후보자들이 최고의 배우 둘 중 한 명을 직접 선택하는 구도도 꽤나 신선할 것 같거든요.] [아니, 데니스. 시청자들은 나와 신유명의 조합을 기대하고 있다니까요? 이미 내가 스포했잖아요.] [그 스포한 게 뒤집히는 것도 나름 반전이···]데니스가 데렉과 밀당을 한참 하는 중에, 에바가 말을 꺼낸다.
[그냥 다 하면 안 되나요?] [네?] [지금 생방 포맷이 즉흥극 한 번, 준비된 극 한 번 이렇게 가고 있잖아요. 3회차 생방에선 초반 즉흥극을 빼버리고 데렉-유명, 나탈리-유명, 데렉-다른 후보, 나탈리-다른 후보, 이렇게 4번의 연기로 가면 어때요?]그녀의 제안에, 데니스의 눈이 번쩍 빛난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다. 물론 이대로도 시청률은 유지되겠지. 하지만 지금 시청자들은 ‘좋은 연기’에 대한 기대만 남았을 뿐 ‘경쟁’에 대한 기대는 사라진 상태. 여기서 신유명-나탈리와 신유명-데렉 팀간의 경쟁 구도로 긴장을 준다면···!’
다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다.
에바가 4편의 대본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인가와,
데렉과 나탈리가 2개의 공연을 준비하려 할 지.
[좋은 의견이긴 한데…대본이 그렇게 준비가 되겠어요? 다른 우승 후보가 누가 될 지도 확실치 않으니 이미지를 잡고 작업할 수도 없을텐데···] [솔직히 혼자는 힘들어요. 2개의 대본만 제대로 뽑아내기도 지금은 버거운 상태거든요.] [그런데도 그 제안을 한 건…뭔가 대안이 있는 건가요?] [데니스, 이라고 들어봤죠?]에바는 제시한 대안은 육작가였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루트로 신유명의 전작 드라마 메인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 요즘 그녀와 대본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 그녀는 번뜩이는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과 작업 스타일이 매우 비슷하기에, TW에서 그녀와 추가 계약을 할 생각이 있다면 팀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의견을 자세히 피력했다.
[그녀도 저도 작업 속도가 빠른 편이라, 함께 작업하면 4편의 대본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차피 신유명씨는 올라갈테니 2편은 미리 완성해두면 될 테고, 나머지 1인에 관해선 여러 가지 대안을 준비해 뒀다가, 2차 생방 후 최종 2인이 확정되면 그 날 밤새서 완성시키면 될 것 같아요.]신유명이 최종에 올라온다.
그들은 이미 그것을 기정 사실로 단정 짓고 의논하고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그래선 안 되지만, 너무 당연한 사실까지 가설로 놓고 대안을 준비하는 것은 괜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니까.
데니스가 에바의 의견이 마음에 드는지 나탈리 쪽을 스윽 돌아보았다.
[저는 좋아요!]나탈리가 냉큼 대답한다.
데니스는 마지막으로 데렉의 눈치를 슬그머니 본다.
데렉은 나탈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콜- 이런 걸 거절하는 성격은 못 돼서.]그렇게 생방 3차의 포맷이 바뀌는 것이 결정났다.
에바의 제안을 육미영은 쌍수 들고 환영했고, 데니스는 해외 인력 충원을 위한 결재를 올렸다.
그리고 다음 날, TW의 국장이 데니스를 호출했다.
*
[데니스, 어서 앉게. 요즘 수고가 많지?]데니스 밀턴은 TW 방송국 최고층에 위치한 국장실의 쇼파에 걸터 앉았다.
국장은 자신을 신생 TW 방송국으로 스카웃한 사람이자, 캐스팅보트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데니스 못지 않은 수완가였다.
[여기 있네.]국장은 직접 서명한 해외 인력 충원 품의서를 내밀었다.
지금 캐스팅보트는 정점을 찍고 있는 상태. 무엇을 요구한들 지원해주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결재를 받아가라는 것은 핑계이고, 다른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리라.
어려운 점은 없느냐, 다음 생방 준비는 잘 되어 가느냐, 이것 저것을 묻던 국장이 슬슬 본론을 꺼낸다.
[데니스, 솔직히 말하자면…나는 좀 걱정했었네. 자네가 8화의 후반 30분을 한 배우에게 몰빵하겠다는 얘기를 했을 때, 화제성은 건지겠지만 후반의 긴장감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저도 사실…걱정을 안한 건 아닙니다…웰메이드라고 시청률이 올라가는 게 아니니까요.]수잔에겐 큰소리를 쳤던 데니스는, 국장 앞에선 좀 더 솔직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도 그럴 것이, 다 예상 범위 안이었다고 허세를 부리기에는, 상대도 내공이 만만찮은 인물이기에.
[비슷한 수준의 배우들의 아슬아슬한 경쟁, 무대 뒤에서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막장 요소가 오디션 프로의 시청률 견인차라는 건 일종의 상식이니 말이죠.] [그런데도 리스크를 감수하고 무리수를 둔 이유는 뭐지?]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데니스는 덤덤히 대답한다.
[연기 오디션 리얼리티는…어차피 성공 사례가 없습니다.] [흐음···] [정석대로 가 봤자, 뒤로 갈수록 시청률이 떨어지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럼 모험을 해 보는 편이 낫지요.] [그럼…이게 먹힌 이유는 뭘까? 새로운 성공 공식을 발견한 건가?]데니스가 잠시 고민한 후 말한다.
[저도 이런 저런 가설을 많이 세워 봤는데, 관객 투표와 시청자 투표의 70%가 신유명 한 명에게 몰린 것을 보고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현재 캐스팅보트를 보는 시청자들의 심리가 조금 특이합니다. 연예 오디션 프로가 아니라…주인공이 있는 영화를 보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영화?] [네. 국장님 히어로물 볼 때, 히어로가 승리할 거 알면서도 보시지 않습니까?]
국장이 곰곰이 생각해 본다.
슈퍼맨 대 렉스 루터, 배트맨 대 조커.
당연히 주인공이 이긴다는 결말을 알지만 본다. 주인공을 좋아하고 주인공에 이입하며, 그의 승리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지.] [캐스팅보트도 지금 그렇습니다. 신유명이 우승하리라 생각하면서도, 그 당연히 예정된 결과가 당연하게 끝나는지를 확인하려고 열심히 보는 거랄까요.] [그럼 신유명 말고 다른 참가자들이 연기하는 장면에선 순간 시청률이 떨어져야 하지 않나?] [아아…그들은 말하자면, 매력적인 조연인 겁니다.]국장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한 명의 참가자가 주인공에, 나머지 참가자들이 조연의 역할을 하는 영화같은 예능프로라···
희한하다. 너무 희한한데 데니스의 이론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 이건 더 이상 오디션이라고 보기엔···] [맞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미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방송 채널을 가지고, 22회라는 긴 방송시간을 할애해서, 한 배우의 성공 스토리라는 영화를 찍고 있는지도 모르죠.]흐음…국장이 침음성을 울리며 한참 생각에 빠진다.
[그렇다면…다음에 이 포맷을 다시 써먹긴 어렵겠군.] [이만큼 걸출한 참가자가 묻혀 있다가 갑자기 이름을 알릴 확률이 어디 보자…제로에 가깝겠네요. 네, 어렵겠습니다.] [좀 아까운데···] [아니 엄청난 행운입니다, 국장님. 그가 등장했기 때문에 이만큼이나 판이 커진 겁니다. 저희는 막 개국한 TW 채널을 탑5 안에 안착시킨다는 목표를 위해 캐스팅보트에 많은 투자를 했죠. 그리고 신유명이라는 조커의 등장으로 이미 투자 이상의 아웃풋을 냈습니다. 그뿐입니까, 1등상인 카일러 감독의 차기작으로 그의 다음 거취를 TW 영화사업부에 묶었어요.캐스팅보트 시즌2가 나오지 못한다고 해도, 이것만으로도 이 프로그램은 제 몫을 하고도 남은 것 아니겠습니까.]
국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내가 과욕을 부렸군. 사실 기대를 훌쩍 뛰어 넘는 성과이긴 해. 게다가 콧대 높은 영화사업부 쪽에 단단히 면이 서기도 했고.] [그렇습니다.] [이적하자마자 능력을 증명했으니, 약속대로 차기 예능국장은 데니스, 자네가 될 걸세.]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그 배우…혹시 영화 한 편으로 끝내지 말고 세네 편 묶어서 독점 계약할 수는 없나? 흠흠.]국장이 다시 한 번 과욕을 부렸다.
*
생방 1차가 방송된 후 캐스팅보트의 화제성은 더욱 부풀어 올랐다.
그래서인지 다음 회인 18회는 생방과 생방 사이의 과정을 담는 ‘메이킹필름’의 성격을 띠었음에도 시청률이 떨어지지 않았다.
-좀비, 뱀파이어, 늑대인간에게 설치했던 특수장치의 설명.
-배우들이 어떤 대본을 선택, 혹은 구성하고 어떻게 연기에 접근하는지.
-무대와 조명은 무엇을 고려해서 설계되고 설치되는지.
‘중간화수’는 예능인데도 다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일반적인 예능 구성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이미 캐스팅보트에 빠진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의 이면을 엿보는 느낌에 더욱 열광했다.
심사위원들의 회의 장면도 등장했다.
[인간이 인간을 먹는 것에 대한 공포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내재되어 있죠. 그 부분을 과감하게 건드리면서도, 자신의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절망을 제대로 표현한 게 좋았어요. 덕분에 ‘징그럽다’는 느낌보단, ‘안타깝다’는 공감이 솟아 올랐죠.] [자신의 희망과 인류의 희망이 배치될 때, 인간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그가 자살해 버린 것이 인류에겐 이기적인 선택일 수도 있지만, 저는 그의 슬픔에 공감했기에 그의 결정을 지지하고 싶어요. 그런 면에서 프리퀄은 탁월한 선택이었죠. ‘엄마를 잃는 장면’으로 그의 슬픔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거든요.]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에 있는 4명의 심사위원들은, 참가자들의 연기를 심도 있게 분석했고, 데렉과 나탈리의 멋진 비쥬얼은 그것이 회의인지 영화의 한 장면인지를 헷갈리게 했다.
그 뿐인가,
생방 방청 추첨 과정을 압축하여 중계하기도 했는데,
[자아…생방송 방청신청이 역대급을 매번 갱신하고 있습니다! 방청객 추첨과정을 이 자리에서 공개함과 동시에, 당첨자 한 분과 전화연결을 해 보겠습니다~!]방청객이 발표되는 순간, 18회의 순간시청률은 최고점을 찍었다.
마치 로또 당첨자 발표를 볼 때의 긴장감이었다.
그리고 전화 연결된 당첨자는 바로,
[축하드립니다! 캐스팅보트 2회차 생방 방청권에 당첨되셨습니다!] [어? 제…제가요?] [네, ‘도미니코’. 바로 당신이 행운의 주인공입니다! 소감 한 마디 해 주시죠~] [하아··· 사실 저는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행위를 극도로 혐오하며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행운’이나 ‘기적’같은 비논리적인 개념이 저를 돕기도 하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 어어…네에···]R.O.A.의 수장, 도미니코.
이 개성 넘치는 당첨자의 독특한 화법은 제리 하이조차 당황시켰다.
그리고,
[다음 생방의 주제는, ‘직업물’입니다!]2회차 과제가 발표되었다.
191 싫지만 옳은 선택
육미영은 10시간이 넘는 비행을 마치고도 쌩쌩한 상태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비행기에서 휘갈겨 쓴 대본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 마음이 흡족한 상태였다.
출국 게이트를 빠져나온 그녀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헙- 하고 큰 숨을 들이켰다.
‘진짜…잃어버린 자매가 있었던 게 아닐까?’
선글라스와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자신과 분위기가 너무 비슷한 여성. 단숨에 그녀가 에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 또한 숨을 잠깐 들이키더니, 이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언니!]그녀의 차를 타고, 육미영은 에바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1층을 작업실, 2층을 침실로 쓰고 있다며, 자신에 집에 머물러달라고 미영을 초청했는데, 헐리웃의 유명작가답게 그녀의 집은 비버리힐즈에 위치한 저택이었다.
‘와…’
햇살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거실의 전창 밖으로는, 물이 찰랑찰랑 흔들리는 작은 수영장이 있었다. 너무 멋진 집이라는 미영의 칭찬에 에바는 ‘에이, 비버리힐즈에서 우리 집이 제일 소박할 걸’ 하며 쑥쓰럽게 웃었다.
커피를 내린 그들은 거실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언니, 너무 반갑고 할 얘기가 참 많지만, 일단 일이 급하니 일 얘기부터 할게요. 이게 내가 완성한 초고야. 첫 번째가 데렉과 유명을 생각하고 쓴 대본, 두 번째가 나탈리와 다른 후보를 생각하고 쓴 대본.]미영은 신중하게 대본을 읽어내리는 동안, 에바는 살짝 긴장한 상태로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와아…재밌어!] [재밌어?] [응. 굉장히 에바다운 대본이네. 데렉, 나탈리, 유명이 이걸 어떻게 연기할 지 무척 기대된다.]에바의 대본은 서스펜스였다. 그녀의 특기인 장르.
미영의 충고대로 그녀는 심오한 가치를 추구하려는 욕심을 버렸고, 재미와 캐릭터를 추구한 10분짜리 대본은 매우 직관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데렉-유명이 연기할 은 거의 완성된 상태고, 나탈리가 연기할 는 상대역이 결정되면 좀 더 손을 볼 생각이야.] [넬리의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왔구나. 쪽과는 얘기가 끝났나 보지?] [응. 이제 TW의 영화사업부가 된 워크브로더스가 제작했던 작품이라, 오히려 그 쪽에선 쌍수 들어 환영했어.] [넬리 캐릭터가 강렬하다 보니, 상대역 캐릭터를 그만큼 강렬하게 표현해야 할텐데…쉽진 않겠네.] [그래서 상대역이 결정되어야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직은 배우가 남자일지 여자일지조차 결정되지 않았으니까.]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자신도 우려하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론…여배우가 됐으면 좋겠네. 나는 러브 스토리가 주장르라서.]데렉X유명, 나탈리X다른후보의 대본은 에바가 메인을 잡기로 했고,
데렉X다른후보, 나탈리X유명의 대본은 미영이 메인을 잡기로 했다.
[나탈리와 유명의 대본은 나도 거의 완성시켰어. 데렉과 다른 후보 쪽은…습작들 중에서 디벨롭을 시켜야 할 것 같아.] [으악, 나탈리와 유명의 대본! 나도 보고 싶어, 언니! 그리고 습작이라면…어떤 것들이 있어?]미영이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트렁크를 가져와 열었다.
커다란 트렁크의 절반은 A4 용지로 가득 차 있었다.
[와우…!] [다 습작이야. 걱정 마. 아이디어가 없어서 못쓸 일은 없으니까.] [크으…언니가 언니했네.]에바가 엄지를 번쩍 치켜올렸다.
*
와아아아아아–!
2회차 생방.
관객들의 함성은 1회차보다 더욱 짙어진 듯 했다.
초반 즉흥연기 과제는, 조금 특이했다.
[하나의 극을 본 후, 참가자들은 그 극에 끼어들어 새로운 극을 만들어야 합니다!]세 명의 기성 배우가 등장하더니 3분 정도의 짧은 극을 보여주었다.
극의 제목은 .
[당연히 농부가 가장 대단하지! 곡류, 채소, 뿌리작물, 갖가지 과실들. 자연의 은혜를 인간의 입으로 옮겨오는 농부가 아니고서야, 인간들이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나!] [아니, 먹을 것이야 수렵을 해도 되지만, 아플 때 찾을 사람은 의사 말고 누가 있지? 의사란 질병과 싸워 가며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는 위대한 직업이지.] [하하, 이 사람들. 기껏 지어놓은 농사를 도둑이 훔쳐가면 어쩌지? 강도에게 칼을 맞으면 의사를 찾아가기도 전에 죽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도록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경찰이지.]세 명의 배우들은 각각 농부, 의사, 경찰이라는 배역을 갖고 있다.
각자의 직업 특성을 나타내는 간단한 마임을 하며, 자신의 직업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직업이라고 우겨대는 것이 극의 내용.
그리고 참가자들은 한 가지의 직업을 정해서 기존의 대화에 끼어 들어간 후, 자신의 직업이 가장 대단하다는 주장을 펼쳐야 했다.
[자, 생각할 시간을 5분 드립니다~그리고 참고로 정답도 알려 드리죠. 정답은 바로…MC입니다! 왜냐고요? 지금 여러분을 살릴지 죽일지가 다아~ 내 손에 달려 있거든.]
제리가 만담을 하는 동안, 참가자들은 생각에 빠졌다.
‘내가 정할 직업은…’
유명은 금세 한 가지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앞의 세 배우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과제 시연 타임.
참가자들은 다양한 해답을 내놓았다.
[농부, 의사, 경찰. 모두 훌륭한 직업이지만, 그 직업을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은 어디서 나올까요? 인간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누적하여 ‘체계’를 만들면서 발전해 왔죠. 따라서 ‘학자’가 가장 대단한 직업 아닐까요?]인간에 대한 원숙한 고찰이 묻어나는 셀리나의 ‘학자’도 훌륭했고,
[당연히 의사죠. 거기 농부분, 당신의 안쪽 무릎이 튀어나와 있고 휘어진 것을 보니 퇴행성 관절염이 있는 것 같군요. 경찰분은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를 보니, 허리가 아프신 것 같은데…혹시 최근에 범죄자를 추격하다 다치셨나요?]기존의 세 직업 중 하나인 ‘의사’를 골라, 한 쪽에 힘을 실어준 앙투안의 아이디어도 기발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 이라는 게 과연 ‘인간’에게 중요한 직업일까요? 세상이 인간 세상뿐 아니라 자연 생태계를 포함한다면, 정말 중요한 직업은 장의사 정도일 거에요. 인간이 자연에 이바지할 때는 죽어서 거름이 될 때 뿐이니까요.]‘세상’의 진짜 의미를 꼬집으며, 시니컬한 어조로 인간을 폄하한 마르타의 ‘장의사’는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유명의 차례.
그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농부가 말할 때, 의사가 말할 때, 경찰이 말할 때, 그 옆에 붙어서서 그들의 마임을 그대로 카피해 보인다.
시연했던 연기를 머리 속에 바로 저장하여 복사해 내는 연기에, 관객들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그리고 그가 말한다.
[저는 이 자리에서 농부가 될 수 있습니다. 의사도 될 수 있고, 경찰도 될 수 있죠. 어느 직업이나 위대하지만, 그 모든 직업이 되어 볼 수 있는 직업은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그 직업은 바로 ‘배우’입니다.]‘진짜 미친 놈이야…’
그 모습을 보고 데렉은 속으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마음에 든다.
자신도 ‘가장 대단한 직업? 당연히 배우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 외웠네. 대사 타이밍까지도.’
원래의 극에 끼어들기 위해서, 어떤 타이밍에 치고 들어가는 것이 효과적일지 완벽히 계산된 연기였다.
*
메인 과제는 ‘직업’을 주제로 한 연기였다.
앙투안은 뉴욕의 정체된 교통에서도 느긋한 성격의 택시 드라이버를 연기했고,
셀리나는 찰리 채플린의 를 모티브로 한, 공장의 단순노동자의 삶을 연기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이번 주제에서 특히 큰 호응을 얻은 것은 마르타였다.
그녀가 선택한 직업은 수녀.
‘수녀? 원생에서 카일러 감독과 찍은 작품에서 마르타 역할도 수녀였는데…?’
{원래 수녀원 출신이당.}
‘…그래?’
의아해하던 유명에게 미호가 알려준다.
실제로 그녀는 수녀원에 위탁된 고아 출신이며, 그대로 수녀가 되려고 했으나, 사정이 있어 수녀원을 나온 후 배우가 된 케이스라고.
‘아아…마르타의 독특한 분위기가 그래서…그럼 원생에서 카일러 감독은 마르타의 대본을 알고 그 대본을 썼던 걸까?’
{글쎙, 돌아오기 이전의 삶에서 어땠는지는 내가 볼 수 없는 영역이라서…하지만 카일러가 배우의 본질을 느끼고 그걸 대본으로 만드는 감독이라면…모르고 썼을 수도 있겠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