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3
커다란 여우귀가 쫑긋거린다. 냄새를 맡는데 왜 코가 아닌 귀가 움직이는 걸까.
“그런 것도 느껴져?”
“일반인은 안 느껴지공, 네가 생기가 독보적으로 센 인간과 한참을 부대끼면 잔향이 남아있는 정도랄캉. 누구냥?”
“설수연이라고…아, 네가 날 처음 봤던 촬영현장 기억나지? 그 영화 여주인공의 어릴 때 버전을 만났어.”
“아, 걔…걔도 맛있었징.”
미호가 스읍 입맛을 다셨다.
“요즘 연기장 돌아다니고 있는데 걔도 함 찾아가봐야겠넹.”
“음…근데 너 맛있다고 표현하는 게, 정말 사람의 기운을 빨아먹는 거야?”
진작부터 궁금했지만 왠지 꺼내기 어려웠던 질문이었다.
“기운을 일부 나눠받는 계약을 할 수는 있지만 무단으로 그런 짓은 못한당. 그냥 너가 묻혀온 이 기운처럼, 배우가 연기 후에 뿜어내고 남은 잔향 같은 걸 먹는거당.”
“…계약? 그럼 우린 계약했으니 내 기운은 빨아먹을 수 있어?”
유명이 살짝 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러자 미호가 그의 손가락을 앙 물었다. 손가락에 조그만 앞니 자국이 두 개가 났다.
“우리가 한 계약은 그런 계약이 아니다. 컁!”
그 말에 조금 미안해진 유명이 미호의 귀를 살살 문질렀다.
“오히려 너한테 기운을 너무 줘서 연기장에 돌아다니는 거당. 기력 보충할라공.”
“그건 미안하네. 그럼 차라리 그 계약도 할까? 내 기운을 나눠준다는?”
“그건 안된당. 불공정 계약이당.”
“뭐?”
유명은 귀신의 입에서 법률용어가 나오자 당황했다.
“모든 계약은 쌍방이득이 있어야 하는 게 선계의 룰이당.
지금 너의 제안은 네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나에 대한 선의로만 발의된 것이기 때문에, 계약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당. 컁.”
쪼끄만 게 뭔가 어려운 용어를 의기양양하게 설명하는 게 웃기다. 이면 세계에도 생각보다 엄정한 룰이 있는 모양이다.
“신경쓰지마랑. 난 능력있는 연귀니까 너의 걱정 따위는 필요없당. 이미 힘도 많이 회복했당. 좀더 안정될 때까진 연기현장들에도 왔다갔다하겠지만.”
유명은 미안한 마음에 부엌에서 캔 맥주를 하나 가져왔다.
그리고 캔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핥아먹는 아기여우의 모습에 심장폭행을 당해 버렸다.
‘귀…귀여워!’
*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 주 목요일,
오늘은 에서 견학을 가는 날이다.
인솔자인 기획장 문식이 소리질렀다.
“3인 1조로, 떨어지는 사람 없이 챙기면서 이동합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대학로, 극장.
500석 규모의 중극장에서는 한창 새로 오픈하는 공연의 무대세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번 공연의 조연출을 맡았다는 창천 22기 졸업생 선배가 후배들의 견학을 맞았다.
“공연 전전날이라 바쁘니까 사람들한테 방해 안되게 조용히 따라오세요.”
조연출 선배가 신신당부한 후 극장 투어를 시작했다.
내부는 온갖소리들로 가득하다. 바깥에서 가져온 세트들을 조립하는 망치소리. bgm과 효과음이 켜졌다 꺼지는 소리. 조명기를 단 거대한 바가 내려오는 소리.
“여기요!”
신경질적인 남자의 목소리.
조연출은 안내하던 학생들을 내버려두고 허둥지둥 뛰쳐갔다.
청바지에 커다란 후드 티를 입고, 목장갑을 낀 젊은 남자가 그를 쥐잡듯이 다그쳤고, 그는 굽신굽신 허리를 펴지 못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조명기사를 한 명만 뽑으면 어떡합니까?”
“그게…한 명이 펑크가 나서.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한 것보다, 이래서 모레 공연이 올라가겠어요? 어떻게든 빨리 인력 보충해와요. 나까지 펑크내는 거 보고싶지 않으면.”
조연출이 허리를 숙이고 그들에게 돌아왔다.
어두운 표정으로 기획장에게 소근거린다.
“미안한데 비상상황이라 좀 나가봐야할 것 같다. 방해안되게 대충 견학하고 갈래?”
“무슨 일이에요 형. 혹시 저희가 뭐 도울 건…”
“마음은 고맙지만 전문인력이 필요해. 여기 극장은 상주 조명기사가 없어서 연출 인맥으로 혜전당 기사를 며칠 데려온 건데, 보조기사로 뽑았던 사람이 펑크를 내서.”
[혜전당]이란 말에 유명의 귀가 번쩍 뜨였다.한국 최고의 공연 스페이스.
국내 최대의 기업 가 만들고 운영하며,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업 이미지를 위해서 경영하는 것 같다고들 말할만큼 내부설계나 시설 모두 최고 중의 최고를 유지한다는 곳.
88년에 지어져, 유명이 회귀한 2018년까지도 최고의 공연장의 명성을 유지했으며,
‘혜전당에 서보는 것’을 배우인생 최고의 영예라고 할만큼, 공연과 배우의 선정에 대해서도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그 곳의 관계자라니···
유명은 입맛을 스읍 다셨다.
“저, 선배님.”
유명이 무리에서 한걸음 나서면서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주목된다.
“조명기를 좀 다뤄본 적이 있는데, 혹시 보조기사 구하실 때까지라도 제가 도움이 된다면···”
유명의 말에 조연출이 반색을 했다.
“조명기를? 얼마나? 공연용 조명기도 본 적이 있어?”
“파와 엘립소이드라면 만져본 적 있습니다.”
조연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일단 기본 용어를 아는 녀석이다.
조연출은 유명을 데리고 조명기사에게 다가갔다.
“아, 저 아쉬운대로 이 친구가 조명기를 만져본 적이 있다는데 잠시 보조로 쓰시면···”
기사가 이마를 찌푸렸다. 아까부터 떠들던 학생무리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평소같으면 아마추어랑 하느니 혼자 하겠다고 소리를 버럭 질렀겠지만, 지금은 정말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
하지만 최소한의 조명 지식은 있어야 한다.
그는 작은 시험을 던졌다.
“저 쪽에 내 가방 안에서 43번 ‘고보’ 가져와서 14번 조명기에 끼워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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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시야의 크기
“저 쪽에 내 가방 안에서 43번 ‘고보’ 가져와서 14번 조명기에 끼워봐요.”
학생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유명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객석 하나에 놓인 낡은 장비가방을 뒤지니 물방울무늬, 나무잎무늬, 창문무늬가 새겨진 까만 철판들이 보인다.
그 중 43번이라고 적힌 것을 꺼내어 다시 무대 위로 와서, 라이트 플롯(Light Plot: 조명지도)에서 14번 조명기의 위치를 찾는다.
제일 첫줄에 걸려서 백을 때리는 방향으로 꺾어진 엘립소이달 조명기.
그 헤드 부분의 틈새에 고보를 스륵 끼워넣었다.
조명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조명기사 김성진이라고 합니다. 학생은?”
“가운대 00학번 신유명이라고 합니다. 잠시지만 같이 일할텐데 말씀 편하게 하세요, 형.”
성진은 넉살좋은 유명의 인사에 피식 웃었다.
“그래. 대타 구해질 때까지 고생 좀 하자.”
뒤에서 조연출이 휴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성진이 조명기를 걸자, 유명이 잽싸게 옆으로 와 전선을 바에 고정한다.
쓰고 있던 청테이프가 떨어질랑말랑 하자 새 테이프가 때맞춰 내밀어진다.
조명기에 불이 들어오지 않자, 지시하기 전에 이미 새 조명기를 가지러 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진은 이 놈이 마음에 들었다. 눈치빠르고 일머리가 있는 놈이다.
“아르바이트로 전기공사라도 뛰어봤어?”
“아니요. 이쪽에 관심이 좀 있어서.”
변명을 하며 유명은 피식 웃었다.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 극단에서 15년을 버티다 보면 여러가지 재주가 생긴다.
조명기를 만지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전문 조명기사에게 비교할 순 없겠지만, 기본적인 걸고, 고정하고, 전선 정리하는 거 정도야.
무대 위쪽의 세팅이 대략 끝났다.
“콘솔(console: 극장의 조명 전체를 컨트롤하는 마스터 기기) 다룰 줄 알아?”
“켜고 끄는 거 정도는 할 줄 알아요.”
“컨트롤 박스로 가서 내가 부르는 번호들 올려봐.”
“네!”
유명이 뛰어서 객석 뒤쪽에 위치한 컨트롤박스로 들어간다.
공연 중 조명과 음향을 컨트롤하는 이 공간에는 많은 장치들이 가득하다. 그 중 조명 콘솔을 찾은 유명은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따라 페이더(fader: 조명의 조도를 조절하는 레버)를 올렸다.
“3번, 9번, 12번 full!”
3,9,12 페이더를 끝까지 올린다. 테스트를 위해 암전시켜 놓은 극장의 무대 중앙만 확 밝아진다.
“껐다 하나씩 올려봐.”
하나씩 올리자, 성진이 라이트 플롯을 손에 들고 밝기와 각도를 자세히 체크했다.
“3번 76 주고, 9번 12번 30으로.”
“12번은 35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