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30
유명이 두 눈을 깜빡인다.
[그 30분간, 유명씨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에요.]*
캐스팅보트 종영 3주차, 프랑스.
<미국의 메가히트 프로그램 , 떼에프원(*TF-1: 프랑스 최대의 민영방송사)에서 수입 확정.>
파리의 까미유 사설발레단.
휴게실에서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양인 발레리나에게, 동료가 말을 붙였다.
[아참! 너 ‘유명’과 같은 나라 출신이지?] [맞아. 너도 캐스팅보트 봤나보네?] [당연하지. 인터넷에 희한하게도 ‘프랑스어 자막버전’도 돌고 있더라고. 어느 천사가 만들었는지. 아…그는 정말 멋져. 그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보그지도 구독했는데, 너도 보여줄까?]세련이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나도 있어.] [와, 너도 유명의 ‘팬’이구나.] […응.]그래. 이젠 팬.
그와 마지막으로 본 것은 2년하고도 9개월이 좀 넘었다.
길고 고통스런 터널이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은 때가 찾아왔다. 가장 큰 위기는 2년이 딱 되었을 때였다. 푸앵트(*발 끝으로 서는 발레 기법)를 보조하기 위한 다른 인대와 근육을 키워가고 있었는데, 무리한 연습으로 다른 인대에 염증이 왔다.
이젠 진짜 더 이상은 못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 때, 유명에게 가볍게 던졌던 말이 생각났다.
-방금 그 말 때문에 1년 늘어났다. 3년.
약속도 무엇도 아니었지만, 지켜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도저히 앞으로 나갈 방법을 알 수 없었을 때…그가 보내준 선물처럼 발롱 파루지에가 나타났다.
그리고 마담 까미유와 함께한지 이제 9개월 째,
지치고 힘들 때마다 캐스팅보트에서 등장하는 유명의 멋진 모습이 그녀에게 힘을 주었고, 세련은 결국 재활에 성공했다.
그녀는 마감 까미유의 추천으로 지금 파리 오페라 발레단 입단 테스트를 준비하고 있다.
‘이제 너무 저 하늘의 별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지만···’
언젠가, 자신이 먼저 연락하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그녀는 지킬 예정이다.
프랑스인 동료조차 팬을 자처할 만큼 까마득한 스타가 되버린 그이지만,
자신이 이제 다시 발레를 하고 있다고, 네 덕분이라고 소식을 전한다면, 분명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하게 웃어주리라.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조금만…조금만 더 후에.’
이왕이면 오페라단에 합격하고, 공연에서 배역을 맡을 수 있는 무용수가 되어서.
조금은 멋있어진 모습으로 그에게 소식을 전하고 싶다.
그건 어쩌면…자신의 작은 미련.
[그 배우, 예전에 라는 작품을 찍었대. 발레리노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발레씬을 연기했을지 너무 궁금해. 혹시 세련은 한국에 있을 때 그 영화 봤어?] […아니.]본 게 아니라, 출연했었지.
동료가 그 영화를 보게 된다면, 화들짝 놀라서 입을 떠억 벌리리라.
세련은 그 상상을 하며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연습을 시작했다.
오디션이 머지 않았다.
*
같은 시각, 파리의 다른 빌딩.
류신은 펼쳤던 신문을 바스락 접으며 말했다.
“슬슬 여기에서도 관심갖기 시작하네.”
“워낙 미국에서 화제가 됐으니까요. 유명 형이 워낙 대단하기도 하고.”
“신유명씨한테 그 호칭, 허락은 받은 것 맞아?”
효준이 입술을 꾸욱 다물더니,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허락…은 아니고 통보였다는 것을 상기하며.
류신은 그런 그를 슬쩍 곁눈질하며 피식 웃는다.
처음 왔을 때 엄청 절박한 눈빛으로 뭐든지 하겠다며 고개를 숙이던 녀석은, 자신이 평소에 하는 수준의 체력훈련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고 몸이 단단해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류신은 봐줄 생각이 없었다.
효준을 처음 본 순간, 아니 캐스팅보트에서 골고다 언덕의 예수를 연기하는 걸 본 순간부터 알았다. 저 녀석은 정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조금 짜증이 났다.
뭐랄까. 신유명은 그렇게 타고난 천재인데도, 그 이상으로 노력하는 게 눈에 보이니 재능 탓을 하기도 뭐한 상대였다.
그래서 발산할 수 없었던 짜증이, 저만한 재능을 가지고 저렇게 안이한 놈을 보니 배로 발산되었달까.
그래서 그 따위로 할 거면 언제든지 돌아가라고 자근자근 말로 조져가며 연습시킨지 한 달, 의외로 효준은 잘 버텼다.
그리고 지금은 연습을 제법 잘 따라오고 있었다.
“곧 미국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스타가 되겠네.”
“다음 작만 성공하면야…그렇겠죠.”
“그거야 당연한 거고. 너도 유명형 유명형 노래하는 걸 보니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신유명이 연기로 실패할 리가 없다는 걸.”
“그야 유명 형은 믿지만…미국에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있으니까요.”
효준이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그게 뭔데?”
“가십지요. 가십지의 벌레들이 붙기 시작하면, 잘 나가던 스타 하나 망가뜨리는 건 일도 아니에요.”
“언론의 왜곡 보도라면 한국에서도 많이 있어. 그래도 결국 실력이 있으면-”
“아아, 한국은 양반이죠. 미국의 가십지와 파파라치들 중엔…진짜 쓰레기들도 많아요. 사생활 침해는 기본이고 허위와 날조기사도 다반사라니까요.”
“그래도 유명씨는 이미지도 워낙 좋잖아?”
“그러니까 아직까진 잠잠한 건데…환호와 열망이 적당히 사그러들 때쯤, 슬금슬금 간을 보기 시작할 걸요? 더구나 유명 형은 딱 좋잖아요. 외국인에 동양인. 여론이 너무 엉망으로 가지 않아야 할텐데···”
류신은 그래도 별 문제가 생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미국에 대해선 역시 미국에서 나고 자란 효준이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유명에 대한 악의적 기사가 터진 것은, 캐스팅보트가 종료되고 약 한 달 후.
슬슬 캐스팅보트에 대한 후속 기사감들이 떨어져 가던 시기였다.
*
“이 미친 놈들이···”
유석이 라고 써진 얇은 잡지를 책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판매 부수도 얼마 되지 않는 신생 가십지가 가장 먼저 총대를 멨다.
어차피 잃을 것도 없다는 계산인 모양이다.
호철은 잡지 전면에 인쇄된 타이틀을 보고, 유석보다 더 흥분해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최근 불가능한 속도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 신유명. 익명의 제보자는, 그의 성공은 이미 담보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지목한 스폰서는 공화당의 유력한 여성 의원 N씨로···(중략)
“대표님. 이거 고소각 아닙니까?”
“…애매해. 이 나라는 언론의 자유를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취급하는 나라인데다, 제보자 보호는 기자들의 만능 무기나 다름없지. 그리고 기사에서도 사실이라고 단정짓지 않고 제보자의 주장이라고 뭉뚱거리고 있잖아.”
“그래도 사실관계 확인 없이 기사화는···”
“강력하게 항의해봐야, 이미 기사가 일파만파된 이후의 정정보도 정도일텐데, 아직 우리 회사는 그만한 압력을 행사할 힘도 없고…후- 미안합니다, 유명씨.”
그러나 정작 유명은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미국에서 가십지 일일이 신경쓰면서 일할 수 있나요. 어차피 영향력 있는 매체도 아닌데,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묘하게 전달하는 정보가 디테일해서, 이거 사실 아닌가 싶게 써놨네요. 게다가 이 영악한 놈들이, 바로 다음 기사로, ‘신유명 캐스팅보트 우승할만큼 연기력 있었나?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들 집중 인터뷰.’ 이딴 기사를 붙여 놨단 말입니다.”
유석의 목소리가 험악해지는 것을 듣고 호철이 묻는다.
“그건, 오히려 별로 신경 안 써도 되지 않나요? 캐스팅보트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유명형 연기가 대단한 건 다 알고 있을텐데.”
“미국 전체 인구 중 캐스팅보트를 본 사람이 얼마나 될 거 같아?”
“……”
“여기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나라야. 유명씨가 캐스팅보트에서 얼마나 대단한 연기를 했고, 어떤 캐릭터와 스토리를 보여줬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거 같아? 예능 프로가 대히트를 쳐도 시청자수 1천만을 찍으면 거의 기록에 가까워. 그리고 캐스팅보트는 중반 이후로 꾸준히 그 수치를 달성했지. 그런데 1천만이 미국 시청률로 따지면 몇 프로인지 알아?”
“……”
“고작 4.5%야. 재방이니 다운로드니 해서 본 사람들이 더 있겠지만, 그래도 유명씨를 뉴스를 통해서가 아닌, 직접 방송을 보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10%가 채 될까? 나머지 사람들은 이런 기사를 보면, 진짜 스폰서라도 있는 게 아닌가 충분히 의심할 수 있다고. 그만큼 말이 안 될 정도로 대단한 행보였으니까.”
호철이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미안. 너한테 화낸 건 아니야. 한국에서와 달리…아직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게 갑갑해서. 이게 산불처럼 여기저기로 번지지 않아야 할텐데.”
호철은 문유석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몇년 간 굿 엔터에 근무해오면서 보아 온 문유석은,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지나칠 정도로 냉정하고, 어떤 나쁜 상황이 생겨도 그것을 몇 배로 되갚아주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는 많이 바뀌었다.
한국에선 꼬박꼬박 존대했던 자신에게도 말을 놓고 다소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명을 챙기는 것을 보면…그야말로 지극정성이 따로 없다.
하기야 자신도 유명을 옆에서 따라다니다 보면, 저런 배우가 성공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바라게 되니까, 유석도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약간 자조하는 유석에게, 유명이 웃으며 말한다.
“걱정마세요, 대표님.”
“…?”
“예능은 많아야 천만이라지만, 영화는 흥행이 잘 되면 수천 만에서, 많게는 1억을 넘기기도 하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그럼 제가 잘 하면 되겠네요. 다들 보시고, 알 수 있게요.”
다시 한 번 유석의 등줄기에 전율이 흐른다.
가끔 그의 눈은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아득히 높은 곳에 목표를 두고 있었고, 그렇기에 작은 것에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그의 말이 절대 오만이나 허언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자신의 말을 실현시켜 왔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가 볼게요. 오늘 첫 미팅이에요.”
유명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고자료: 3막의 비밀(권승태),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204 30분의 트레일러
후우-
카일러는 한숨을 내쉬며, 들고있던 펜을 탁- 하고 놓았다.
‘이렇게 어려운 경우는 또 처음이군···’
고등학생 때부터 영화 감독을 지망했던 카일러는, 많은 배우들을 만나, 그들에게 어울리는 작품을 만들어 왔다.
처음에는 그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시나리오가 아직 없다구요? 그건 좀···
-저를 캐스팅하고 싶으시다구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네? 시나리오를…이제 작업하셔야 한다구요?…
그에게는 사람들의 고유한 색깔이, 에너지의 파동이 아주 잘 느껴졌다.
단 한 명을 위해 커스텀된 양복을 만들듯이, 예민하게 한 배우를 감지하고 그 배우에 맞는 작품을 재단해가는 것.
거기서 나오는, 그 누구도 대체 불가능한 그 배우에게 딱 맞는 이야기.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그것을 실현하는데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많은 독립영화를 찍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제작사에 기획안을 넣었지만, 영화를 보고 관심을 보이던 회사들도 시나리오가 없다는 말에는 난색을 표하며 투자가 어그러지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헤메다 결국 찍게 된 첫 상업영화가 대박을 쳤고,
-카일러 언쇼의 배우들은 모두, 그가 만든 배역을 자신의 ‘인생 배역’으로 꼽는다.
그는 조금씩 자신의 영화 스타일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아온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안목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신유명입니다.]그를 처음 직접 보았던 순간, 카일러는 살짝 전율에 떨었다.
‘분명 한 사람인데, 왜 두 가지의 색깔이 느껴질까···?’
처음에는 그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봐도 그 느낌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디테일한 부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하나의 기운은 따뜻하고 미약하며, 하나의 기운은 차갑고 거세다. 하지만, 미약한 힘이 거센 힘을 부드럽게 인도하고, 거센 힘은 그 인도에 순순히 따른다.
그 결과, 강하면서도 화려하게 퍼져나가는 그의 강렬한 아우라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황홀할 정도로 생명력이 넘치는 그의 에너지.
빛과 어둠이 절묘하게 뒤섞인 저 배우를 제대로 담아낼 만한 시나리오를, 자신이 과연 쓸 수 있을까.
아스 프리데터 / 헤티 램.
그는 하얀 종이에 새까만 잉크로 두 개의 이름을 쓴다.
그리고 아스 프리데터라는 글자 위에 같은 글자를 계속 반복해서 써나갔다. 이름은 점점 진해지고, 겹친 자욱은 부피를 늘려서, 결국은 헤티 램의 이름 위까지 먹어들어갔다.
‘어떤 결말을 내야 할까···’
그는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졌다.
*
첫 미팅을 위해 잡힌 워크브로더스 본사 내의 회의실.
유명이 도착했을 때, 회의실 내에는 에르히 뿐이었다.
빛이 바랜듯한 갈색 머리, 맞춘 듯이 연한 갈색의 눈동자.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에 이목구비는 전형적인 평범함 그 자체다.
그리고 아주 여린 존재감.
하지만, 유명은 카일러가 그녀에게 꽂혔던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에르히 데버입니다.]그녀가 먼저 인사를 한다.
티비에서 보던 사람을 직접 만났을 때의 신기함에 살짝 눈에 스쳐 지나가지만, 곧 표정이 가라앉는다. 요즘 자신을 볼 때마다 비명이나 환호를 지르는 인물들에 비하면 신선할 정도로 초연한 반응이다. 초연? 아니…경계하고 있는 건가?
[반갑습니다. 신유명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서로 부탁하는 입장이네요, 하하. 저희 둘의 비중이 상당히 큰 것 같던데, 같이 잘 지내요.]에르히는 유명의 친절한 응대에 조금 당황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잠시 입을 꾹 닫았다가, 조심스레 다시 연다.
[저…별로 환영하지 않으실 거 알고 있는데요···] […?] [캐스팅보트 모두 봤는데, 정말 좋은 연기자시고…더구나 이번 영화는 우승 상품이니, 저 같은 무명 배우가 불쑥 여주에 캐스팅 돼서 언짢으신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그녀의 모아쥔 손이 조금 떨리고 있다.
유명의 마음이 작은 가시에 긁힌 것처럼 따끔해진다.
‘그래…그랬었지.’
다들 자신을 그저 그런 배우라고 생각하는 걸 알아서,
그저 그런 배우가 같은 자리에 끼어있는 걸 민폐라고 여길까봐···
예쁘게 봐주십사 먼저 고개를 숙이던 날이 언젠가의 유명에게도 있었다.
[그런데…저도 절박해서요. 너무 욕심이 나서 감독님 제안을 거절은 못했어요. 폐 안끼치게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티 안내고 웃으며 인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그녀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미국인들은 인사할 때 상대의 얼굴을 보며 인사한다. 허리를 숙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람에 대한 경의의 표현. 그만큼 유명이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의미일까, 혹은 동양식 예절을 미리 찾아보고 온 걸까.
어느 쪽이든 그녀의 절박함을 입증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그리고 유명은, 자신이 이렇게 고개를 숙였을 때, 상대에게 정말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 주기로 한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담백하게 말한다.
[전혀 언짢지 않고, 무척 환영하고, 꼭 에르히와 좋은 파트너가 되어서 최고의 작품을 찍고 싶어요.] [……]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에르히의 눈이 놀란 듯이 동그랗게 커져 흔들렸다.
*
카일러는 의외의 인물을 데리고 도착했다.
그 사람을 보고 유명은 놀랐고, 데렉은 어이없어 했다.
[네가 여기 왜 왔어?] [조연으로 캐스팅 됐는데요?] [뭐? 내가 이 자리를 어떻게 따냈는데, 너는 왜 그렇게 쉽게 된 거야?] [그야, 데렉은 99점 배우고, 나는 100점 배우니까?]나탈리는 농담처럼 데렉의 가슴을 쉽게 후벼파고 의자에 앉았다. 데렉은 맞은 편에서 미간에 주름을 잡고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아랑곳 않는 기세였다.
[어떻게 된 거야?] [아아, 나탈리에게 연락이 왔어. 신유명씨와 네가 출연하는 영화인데 어떻게 자기를 뺄 수가 있냐고. 때마침 구상중인 여자 조연의 역할이 나탈리와 이미지가 부합하기도 하고, 나탈리’는’ 100점 배우기도 하니까?]카일러가 웃는 얼굴로 나탈리의 폭격에 기름을 추가로 끼얹었다.
데렉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지는 것에, 유명은 쿡쿡 웃었다.
‘하여간…재밌는 먹이사슬이야.’
나탈리는 무척이나 진중하고 멋진 사람이고, 카일러는 맑고 차분한 사람인데, 데렉에게만큼은 둘 다 무척 짓궂어지는 것이 재미있다.
그만큼 데렉의 캐릭터가 강렬하다는 얘기겠지만.
[자, 이쪽 세 분은 서로 잘 아실테니 소개는 생략하고, 여기 뉴페이스를 소개해야죠. 에르히 양. 우리 여주인공입니다.] [안녕하세요. 에르히 데버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뭐? 여주인공?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것…맞지?]에르히의 캐스팅을 두고, 작은 반발이 있었다.
데렉과 나탈리 모두, 자신들이 조연을 자처한 영화에, 무명 배우가 여주 역을 맡은 것이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에르히는 좋은 배우야. 여러분들이라면 에르히가 좋은 배우라는 걸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게 다야? 두고 보면 알 거다, 모르면 너희 안목이 부족한 거다? 이유치고 좀 구차한데.]카일러에게 영 맥을 못추는 것 같더니, 일에 관해선 칼같이 이의를 제기하는 데렉.
날선 분위기가 회의실 안을 가득 메우자, 카일러는 부드럽게 웃으며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대본을 보면 이해할 거야.] […?] [이건 다른 어느 배우보다도, 에르히 데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대본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