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32
대사를 외우고, 연습을 거듭하고, 실제 촬영장에서 연기를 하는 순간에는…자신은 미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게 될까?
‘그걸 위해서는···’
-몰이해-
유명은 대본의 가장 뒷면에 하나의 단어를 썼다.
이해를 위해서는, 몰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기분, 그 기분을 이해하는 것을, 유명은 첫 과제로 삼았다.
206 전형적인 표정
대본이 나온 다음 날, 카일러는 나탈리를 만났다.
[그래서 저는, 아스의 누나 역할인가요?] [맞아요 나탈리, 당신은 아주 어릴 때부터 동생이 뭔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죠.]나탈리의 배역은 올리비아 프리데터.
아스의 누나이자, 그의 오랜 조력자.
아스의 부모는 두 번째 입양아(아스)를 들이고 단 며칠만에, 이 아이가 무척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제대로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며, 세상을 다 집어삼킬 것처럼 빤하게 응시만 하고 있는 아이. 부모는 그 아이가 소름끼쳤다.
파양을 하려고 하던 차에, 당시 이미 10살이었던 첫 번째 입양아(올리비아)가 절박하게 동생을 보호한다. 자신이 동생을 돌보겠다고 주장하면서.
[아스가 그 때는 ‘의태’하지 못한 것은, 너무 어려서였을까요?] [그보다는 다른 아기들을 의태하여 자신을 보호하기에는, 충분한 데이터가 없어서였다고 봐야겠죠. 다른 어린아이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아주 정상적으로 바뀌었어요. 하지만, 부모는 여전히 아들을 꺼림직해 하고 있고, 누나는 아스가 ‘의태’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도록 조력하죠.]이런 과거사들은, 화면에 일일이 담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주요한 배역들의 과거사는 당연히 감독의 머리 속에 있고, 그것을 알면 미묘하게 심도 높은 연기가 가능해진다.
나탈리는 계속 메모해 가며 물었다.
[올리비아는 아스가 외계인인 것을 알고 있나요?] [아니요. ‘뭔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라는 것만 알고, 그걸 정신적인 문제로 해석해요. 그녀는 아스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비정상적인 부분을 어떻게든 숨기려고 하죠.]그녀가 펜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들긴다.
아스에게 인간이란, 헤티와 非헤티, 두 가지 종류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아스에게 홀려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그를 사랑하며, 가장 그 사랑을 보답받지 못하는 존재.
[가장 인간다운 인간.] [그래요.] [관객의 시선에선, 그녀가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아름답지 않게 보여야 하겠군요.] [헤티와 반대되는 존재죠. 하지만 저는 그런 인간다운 모습들에도 나름의 미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잘 해야 하겠군요.] [연기력이 부족한 배우에겐 맡길 수 없는 역할이죠.]나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배역 회의가 끝나고, 자리를 정리하는 그녀에게 카일러가 슬쩍 묻는다.
[나탈리는 신유명씨…꽤 오래 봤죠?] [그렇죠. 예선 때부터 제가 심사를 봤으니까요.] [흠…사실, 유명씨가 카메라 워킹에 건의를 한 부분이 있어서, 참고를 위해 대본을 카피했어요. 그런데…일단 대본 상태가 좀 놀라웠고-]카일러가 가지고 있던 카피본을 스윽- 밀어놓는다.
나탈리가 그것을 읽어보더니 혀를 내두른다.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어마어마한 연습벌레네요. 캐릭터 분석에, 연출 아이디어에…빈 칸이 없네. 즉흥 연기도 정말 잘 해서,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을텐데···] [저는 반대로, 즉흥 연기도 그렇게 잘 하는데, 이렇게까지 준비하면 얼마나 잘 할까라는 생각을 했죠.]나탈리가 가만히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 그가 진득하게 준비한 배역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군요. 거기서 더 잘하는 게 가능할까요?] [두고봐야죠.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사실 이 멘트인데요.]도입부의 마지막 장.
대사들이 자리하고 남은 여백에는, 다른 곳과 다름없이 빼곡한 메모로 채워져 있었지만,
카일러가 짚은 곳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거의 초반에 쓴 것인듯 다른 필기들 아래 옅게 흔적처럼 자리하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Typic expression is needed! (*전형적인 표정을 필요로 한다.)
[이게…무슨 의미일까요? 전형적인 표정?] […그러게요. 전형적인 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닌데···?]두 사람은 답을 내지 못하고 눈을 마주보았다.
*
유명이 연습실에 도착했을 때, 작은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ding- dang-
한 곡이 끝나기까지, 유명은 눈을 감고 벽에 기대어 피아노 소리에 집중했다.
음악은 자신의 존재를 실어, 밀어 보내는 것이라고 하던가.
그래서인지 에르히의 연주는,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밍밍하게 흘러 지나가 버릴 듯 존재감이 부족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집중해 꺼질 듯 꼬리를 감추려는 멜로디의 뒤를 쫓아가며, 유명은 살짝 전율이 인다.
잘 들리지 않지만 ‘애써 들어보면’ 무척 아름다운 소리.
딸랑-
곡이 끝난 후에야, 유명은 문을 열고 연습실에 들어간다.
커다란 창문을 등지고 있는 피아노에서, ‘헤티’가 고개를 들어 둘의 눈이 마주친다.
헤티가- 라고 느꼈다.
[언제 왔어요? 들어오지 그랬어요.] [노래 소리가 좋아서. 무척 잘 치네요. 전공자였다고 했었나요?] [옛날에요.]그녀가 웃으며 대답한다.
[저는 어릴 때부터 조용하고 눈에 안 띄는 아이였거든요. 그래서 연기를 하고 싶었지만,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그럼에도 자신을 표현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초보일 땐 몰랐죠. 음악 역시 매력적인 사람이 쳐야먄, 귀를 잡아둘 수 있다는 것을.]눈을 잡아두는 것과 귀를 잡아두는 것. 어려운 일인 것은 마찬가지다.
자신을 ‘매력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이 조금 안쓰러웠지만, 유명은 그 부분은 넘기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다시 연기를 시작한 건 왜···?] [제가 5년 전쯤, 심하게 아팠거든요. 살아날 확률이 매우 낮았었대요.] […지금은 괜찮아요?] [네. 그 때 죽다 살아보니까, 어차피 피아노로도 크게 성공할 거 같지 않은데,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자 싶어서요.]에르히의 화법은 무척 담담하다. 내성적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무언가를 말할 때 거침이 없다. 처음 만났을 때도 먼저 훅 치고 들어왔었지.
유명은 원생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일컬어 ‘내성적’이라고 평하던 것이 떠올랐다. 사실 자신의 성격 자체는 원생과 현생에서 달라진 점이 없는데도.
그렇다면 에르히의 성격도…낮은 존재감 때문에 왜곡되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참 나랑 비슷하네···’
[그래도 배역에서 쓰이다니…피아노를 배워둬서 정말 다행이에요.] [같이 쳐 볼까요?] [피아노 칠 줄 알아요?] [한국에선 어릴 때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 학원이 기본 코스거든요. 다 까먹었지만 몇 가지는 기억나요. Flohwalzer, 어때요?]Flohwalzer(*벼룩의 왈츠)
한국에선 흔히 고양이 춤 혹은 고양이 왈츠라고 알려져 있는 곡이다.
에르히가 피아노 의자의 절반을 내어준다.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유명이 한 가지를 덧붙였다.
[저는 아스처럼, 에르히는 헤티처럼 쳐 볼까요?]에르히는 그 주문에 골똘히 생각하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리고 둘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미b레b(솔b)솔b솔b, 미b레b(솔b)솔b솔b, 미b레b(솔b)솔b(미b)솔b(레b)파파-
미b레도#레미b레도#, 시b라솔#라시b라솔#-
에르히의 메인 선율은 변칙적인 고양이처럼 박자를 어기며 제 멋대로 건반을 뛰어놀고,
정박을 지키는 아스의 반주는 쿵쾅쿵쾅 몸집을 불리며 잡아먹을 듯 고양이를 쫓아간다.
처음엔 불협화음같던 선율이,
점차 서로를 의식하며 맞추어져 가서···
미b레b(레b)파파, 미b레b(레b)파파, 미b레b(레b)파(미b)파(솔b)솔b솔b.
솔#시도#, 솔#시도#, 솔#시도#레#파#파#파#-
끝날 무렵에는 고양이는,
커다란 짐승의 품에 안겨 갸르릉대며 잠이 들었다.
하아-
곡이 끝난 후,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한참이나 시선을 주고 받았다.
이것이 그들의 아스와 헤티였다.
*
첫 촬영 당일.
유명이 도착한 촬영장에는 이미 복도와 교실, 음악실 등이 구현된 커다란 세트장이 지어져 있었다.
“이걸 3주만에…지었다구요?”
“어차피 세트라 가벽을 치고 외장만 그럴싸하게 만든 거겠지만, 그래도 대단하네요. 미국도 돈으로 푸시하면 안 되는 게 없는 건 한국과 다를 바 없나봐요.”
첫 날이라 유명을 따라온 유석은 여기저기에 인사를 돌렸고,
유명은 바로 의상과 분장을 위해 촬영 본부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로 향했다.
의상팀이 준비한 초반 30분의 의상은, 줄무늬가 들어간 옥스퍼드 셔츠에 카키색 타이와 같은 색깔의 바지, 케이블 니트 스웨터(*새끼줄 모양의 꼬임이 있는 스웨터)와 시어서커 소재의 정장 재킷이었다.
전형적인 미국 사립 고등학교의 교복 디자인이다.
[와- 정말 잘 어울리네요-] [그래요? 교복을 입기엔 나이가 좀 많은데···] [전혀, 전혀요! 원래도 동양인들은 좀 어려 보이는 데다, 신유명씨는 피부가 좋아서 더 어려보여요. 교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며칠 전, 유명은 염색을 했다.
금갈색의 머리를 세련되게 스타일링하고 거기에 교복을 갖추어 입자, 그림으로 그린듯한 프레피 룩이 완성되었다.
‘교복은 정말 오랜만이네.’
유명은 조금 어색한 기분을 참고, 팔다리를 움직여보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금갈색 머리와 새까만 눈이 그리고 있는 한 인격에 몰입한다.
‘아스…프리데터.’
아스라는 배역은, 유명이 여태까지 맡았던 어떤 배역보다도 어려웠다.
유명은 평생을, 아니 두 번에 걸친 생을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살아왔다.
원래 배우라는 일은, 나의 존재를 잠시 지우고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 이입하는 일이었고, 그건 유명이 몹시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스는 달라.’
익숙하고 잘 하는 일을, 일부러 하지 않아야 한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줄 모르는 사이코패스 역할도 안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인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존재’의 감정.
하지만 ‘의태’에 능하기에, 다른 사람과 같은 표정,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보는 사람들이 머리로는 누구보다도 자연스러운 인간이라고 받아들이면서도, 마음으로는 이유모를 한 가닥 불안함을 느끼게 하려면…어떻게 연기해야 할까…
분장까지 마친 유명은 세트에 들어섰다.
[오늘은 첫 날이라, 씬 1, 2 촬영만 하려고 합니다. 다 신유명씨 단독이에요.] [네, 감독님.]촬영장은 감독의 성향을 닮는다고 하던가.
스탭들이 무척 많은데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차분한 편이다.
[자, 그럼 씬 1 스탠바이 하실게요~~]촬영이 시작되었다.
*
씬 1.
복도를 걸어가는 아스.
촬영은 alter A와 alter B로 두 번에 걸쳐 진행된다.
[여기서 저기 마킹된 선까지 걸으시면 됩니다.] [넵!]복도의 군데군데 엑스트라들이 배치된다.
하나같이 같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과 여학생들은 제각기 액팅 디렉터에게 동선과 짧은 대사를 부여받는다.
[액션.]감독의 짧은 지시로, 촬영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잠기고, 카메라에 REC 확인등이 붉게 켜졌다.
메인 카메라는, 세트 바깥에 깔린 레일을 따라 아스의 옆모습을 따라간다. 두 대는 오픈된 스튜디오의 양쪽에서 교차로 복도를 찍고 있어서, 한 대는 아스의 얼굴이, 한 대는 그를 마주보는 학생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보조 카메라가 아스의 바로 등 뒤를 쫓아간다.
터벅- 터벅-
이어폰 한 쪽을 꽂고 한 쪽을 어깨에 떨군 채로 복도를 걷는 아스의 동작이 묘하게 경쾌하다.
우월한 인간들에게 특징적으로 볼 수 있는, 거침없이 시원한 몸놀림.
잡스러운 동작이 배제되어 깨끗한 라인은, 다른 사람과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달라서, 걷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끈다.
한 엑스트라의 말에, 그의 얼굴이 옆으로 조금 더 돌아가 정면을 보였다.
그리고 그의 입꼬리가, 산뜻하게 올라간다.
[좋아!]카일러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발 끝을 꼼지락거렸다.
무척 매력적이다. 그런데…
‘뭘까, 이 기시감은···’
그는 다시 허밍을 흥얼거리며 앞으로 걸어간다.
[안녕 아스. 이번 주말에 내 생일파티가 있는데, 와 줄래?] [최대한 시간내 볼게~]‘blushing(*볼을 붉히는) 처리를 할 필요는 없겠네…’
엑스트라 여학생의 얼굴이 진심으로 붉어진 것을 확인하고,
유명의 얼굴로 다시 시선을 돌린 카일러는,
‘아니···’
한쪽 입술을 살짝 올려 보이며 매력적으로 웃는 그의 모습을 본다.
‘저 표정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전형적인 표정.
카일러는 깨달았다.
아스의 표정은 마치 ‘이럴 경우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표정’들을 모두 더해서 평균을 낸 것처럼, 어딘가에서 본 듯 전형적인 표정이었다.
207 티저 하나 찍읍시다
[‘의태’니까요.]유명은 그렇게 설명했다.
어느새 그와 감독이 대화하는 주변에는 촬영감독과 여러 스탭들을 비롯하여, 오늘 촬영이 없지만 구경을 온 에르히와 나탈리까지 서 있었다.
[‘의태’이니까 ‘전형성’을 띠는 게 당연하다?] [네. 아스는 수많은 인간들을 보면서 그들의 표정을 분석해 왔겠죠. 데이터 샘플이 적었던 초반에는 표정이 제각각이었을 거에요. 하지만 데이터가 점점 쌓이면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게 되고, 나아가서는 ‘가장 자연스럽고도 ‘대부분의 인간에게 선호되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표정으로 발전했을 거잖아요?]카일러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거기까지는 자신도 생각했던 부분이었지만,
[테크니컬하게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매력적으로 느끼는 표정이라는 것은, 당연히 여러 사람의 머리 속에 이미 존재하는 교집합적인 부분에 있을 거에요. 다급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우아한 몸가짐, 생각에 잠길 때 살짝 내려뜨는 눈매, 그런 것들이겠죠.]그러한, ‘호(好)’의 영역에 있는 표정들을 집대성한 것이, 아스라는 존재.
그러므로 아스의 표정은 전형성을 띤다.
머리 속에만 그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수십 수백번 다양한 표정을 지어보며 연습한, ‘배우’이기에 내릴 수 있었던 결론.
카일러는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가 자신의 관념을 벗어나 세상에 튀어나오는 느낌에, 살짝 몸을 떨었다.
[혹시 마음에 안드시나요···?] […아니요. 기시감이 드는 표정인데도, 확실히 매력적이고 눈을 뗄 수가 없네요. 뇌는 반복 학습된 것에 자동으로 반응한다는 거겠죠. 아주…좋습니다.]‘그래서…전형적인 연기가 필요하다는 멘트가 있었구나.
하지만 말이 쉽지, 대본의 모든 상황에서 가장 전형적일만한 표정을 연구하고 습득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드는 일일까.’
카일러 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배우들, 특히 연기 경력이 오래된 나탈리는 유명의 말에 더욱 경악한 눈치였다.
그 뿐만 아니었다.
여기에도 생각에 빠진 한 인물, 아니 한 귀물(*鬼物)이 있었다.
‘설마, 여태까지 내가 해 온 연기는 의태의 영역이었을까···?’
연기.
타인을 흉내내는 것을 업으로 하는 일.
인세에만 존재하는 이 이상한 일에, 이유도 모르게 마음이 이끌린 혜호는 연귀를 귀업으로 택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연귀들처럼 잔존생기를 먹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양한 연기를 찾아보고 수많은 연습을 해 보았다.
기회를 만들어 실제로 연기해 볼 때마다, 그는 인간의 경지로는 닿지 못할 연기를 선보여 왔었지만···
‘진정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연기한 것이었나···?’
인간은 흥미로운 존재였지만, 그 자체에 의미를 두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유명을 만나고 그와 함께 수 년을 함께해 오면서, 미호의 마음에는 조금씩 알지 못하던 인간다운 감정들이 싹트고 있었다.
인간답다.
그것은 말하자면, 무척 귀(鬼)답지 않은 것이었다.
*
씬 1의 촬영이 이어졌다.
아스 프리데터라는 존재의 매력은 무척이나 강렬해서, 한 컷의 촬영이 끝날 때마다 침묵이 깨어지는 시기가 조금씩 연장될 정도였다.
무척 시원스런 인상의 고등학생.
주변을 사로잡는 리더십에는 아직 학생인데도 남자의 매력이 물씬 풍겼고, 빤히 눈을 마주치다가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는 얄밉도록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리고 모두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