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54
그녀는 간략한 자기소개를 마친 후, 바로 일 얘기로 들어갔다.
그 얘기는…광고 기획자들의 상식에서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네?] [뭐라고요?] [저…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는데 다시 설명 좀···] [말 그대로입니다. 하나의 광고에 광고주가 여러분이 붙는 형태인거죠.]박진희가, 야심차게 준비해온 딜을 시작했다.
235 너를 연기하고 싶나 보네
[쉽게 설명하자면, 오데마 피게 시계를 차고, 제냐 정장을 입고, 포르쉐를 탄 신유명씨가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광고입니다.] [어…혹시 협찬을 말씀하시는 건가요?]본디 광고란, 광고주가 돈을 쓰기로 결정하면, 광고 에이전시가 아이디에이션을 해 적절한 콘티를 짜고, 적절한 모델을 섭외해 촬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얘기는 완전히 뒤집혀 있다. 기획 자체를 연예기획사에서 하고, 브랜드들은 얹혀만 가는 형태.
[아아,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군요. 이미지를 빌려온다는 점에서는 비슷하겠네요.] [이미지를 빌려온다…라···] [네. 협찬의 규모를 아주 키운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잡지를 보면 편집부에서 기획한 화보들이 있다.
특정 모델이나 특정 컨셉을 먼저 잡고, 거기에 맞는 코디네이션을 위해 브랜드에 협찬을 받는다. 그리고 옆에 해당 브랜드와 제품명, 가격을 함께 보여주는데, 단일 브랜드인 경우가 있고 여러 브랜드가 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
박진희의 제안은 이와 비슷하지만, 훨씬 돈이 많이 드는 TVcf라는 것이 다르다.
[글쎄요, 이건 너무 파격적이라… 제품을 협찬해달라는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얘기는 모델료며 매체운영비까지 저희 쪽에 요구하시는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만한 희소성이 있는 모델이고 프로젝트가 될 겁니다.] [아무리 봐도 무리같군요. 저는 먼저 일어서겠습니다.]TMP의 담당자가 일어섰고, 박진희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아쉬운 것이 없는 기색에 다른 회사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엉덩이를 떼지 못했다.
쾅-
[한 분이 가셨군요. 이해합니다. 기존에 없었던 방식은 많은 반발을 낳으니까요. 다른 분들도 저희 쪽의 의견과 다르시면 언제든지 자리를 뜨셔도 됩니다. 바쁜 분들이시니까요.] [어…흠흠. 일단 들어볼까요.]박진희는 더 나갈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가져온 콘티를 돌렸다.
나머지 3인의 광고담당자는 콘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움찔움찔 눈썹을 떤다.
그들이 모두 읽은 것을 확인한 후, 박진희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재밌지 않나요?]분명히…재미는 있다.
사실 이것은, 브랜드 광고라기보다는 신유명이라는 배우의 이미지 광고에 가깝다. 자신들의 제품과 돈을 쏟아부어, 신유명의 이미지 광고를 해 주는 격이 될 것이다.
하지만···기존에 없었던 프로젝트. 엄청난 희소성과 화제성이 있다.
헐리우드 진출 이후 한 번도 광고를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함부로 이미지를 팔지 않을 배우라는 프리미엄이 붙기에 더욱 그렇다.
[광고주에게…제안해 보겠습니다.] [네. 리젝하시면 다른 대안을 찾을테니 부담없이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빨리 회신드리겠습니다.].
.
.
“…이렇게 진행된 거에요.”
“맙소사…그런 조건을 승낙했다구요?”
“그럼요. 얼마나 공들인 프로젝트인데요. 돌아간 AE들은 바로 다음날까지 모두 회신을 보냈습니다. 꼭 참가하게 해 달라고.”
“그런 게…가능하군요.”
“신유명이라는 네임 밸류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일이죠.”
광고를 거의 하지 않는 배우.
조용히 작품에만 전념하지만, 그 작품이 나올 때마다 세상이 뒤집어지게 만드는 배우.
그를 만난 모든 사람들이, 실력도 인성도 극찬하는 배우.
유석은 처음부터 이 그림을 계획하고 박진희를 한국에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녀는, 지난 1년간 수십 수백 번의 새로운 콘티를 그려가며 시안을 준비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프로젝트.
“저…혹시 광고주들이 어떻게 됩니까?”
“포르쉐, 제냐, 톰포드, 라메르, 오데마 피게요.”
“와···”
모두 하이엔드 명품 브랜드들.
“그럼 광고료는···”
“물론 최고로 협의했습니다.”
반순호가 혀를 내두르고 있는데, 유명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부장님, 오데마 피게는 뭐에요?”
반순호는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얼음마녀같이 냉정하던 그녀의 표정이, 순간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았기 때문이다.
“시계 브랜드에요.”
“아아···”
그 때 그녀의 표정은 분명,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것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
이 즈음, 유명은 다음 작품을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러브콜은 어마어마하게 쏟아졌고, 유석 몰래 읽어본 시나리오도 꽤 있었지만…탁- 하고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없었다.
{뭘 그렇게 고민하냥. 평소같으면 제일 처음 집어든 시나리오에 빠질 녀석이.}
‘그러게···’
이 고민은 미호에겐 의논할 수 없다.
2003년 3월로 돌아왔었으니, 7년이 되기까지 이제 1년 조금 더 남았나···
많아야 두 작품, 혹은 이번처럼 촬영이 길 경우엔 한 작품.
가족들과도 조금은 시간을 보내고 싶기에…보수적으로 이제 한 작품 남았다고 생각해 보니, 무엇을 연기해야 할지 도무지 마음이 정해지지 않는 것이다.
다 하고 싶은 배역들이지만, 그 중에 더 하고 싶은 것.
이 작품만큼은, 안 해보면 정말 후회할 것 같은 의미있는 작품이 무엇일까.
그것이 유명의 고민을 길어지게 했다.
디링-
그 때 아웃룩의 알림이 울렸다.
친한 사람들만 알고 있는 사적인 메일 계정이었다.
들여다 보니, 극단 혜성의 극작가가 된 대학친구 우준호의 메일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유명아! 잘 지내?
너무 보고 싶다. 많이 바쁘지? 한국에 한 번 올 계획은 없어?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미싱차일드 매 편 찾아보면서, 세상에 이런 스토리가…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단다. 흐흐.
사실 내가 시나리오를 하나 써 봤어. 내가 극대본은 많이 작업해도 영화 시나리오는 안 써봤잖아. 제대로 썼나 어디 물어보기도 민망하고, 너를 주인공으로 상상하면서 쓰다 보니 너한테 먼저 보여주고 물어보고 싶더라^^;
혹시 잠시 짬날 때 있으면 한 번 볼래?
급한 일 아니니까, 답장은 많이 늦어도 괜찮아!
늘 건강 조심하고, 아참, 새해 복도 많이 받아~!
-준호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유명은 친구의 다정한 성격이 묻어나는 메일을 읽고 빙그레 웃음을 띄었다.
‘어디보자···’
(가제)Personality Fight.doc
유명은 첨부된 파일을 한참의 시간을 걸려서 읽었고,
단숨에 그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다중인격을 이런 방향으로 풀다니…’
‘그리고 이 연기, 이걸 가능하리라고 생각하고 쓴 걸까? 하핫···’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각본을 각색할 때부터, 배우에게 무모한 요구를 덜렁 해대던 준호.
그런 그답게, 이 시나리오는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의 연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된다, 그렇지만···
‘나라면…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은 갑자기 유명의 마음에 화르르 불을 당겼다.
‘…이거다. 내 마지막 작품.’
유명은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
타다다다닥-
유명은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었다.
검은 밤.
사선으로 드리운 그림자들에 몸을 숨기고 자세를 낮추어 최대한 빠르게 달렸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어둠과 친근했다.
허억- 허억-
그런 말이 있다.
공포감은 자신이 잘 모르는 존재에게 발생하며, 지레 겁먹지 말고 상대를 차분히 직시하면 의외로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유명은 누구보다도 저 상대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저 상대의 경우는, 지피지기면 백전백패다.
타앗-
결국 그는 그림자를 타 넘어,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얼굴을 보자, 힘이 쫘악 빠진다.
그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도망치고 있으면서도 잡히고 싶었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면서도 살해당하길 꿈꾸었다.
그렇기에 그와 맞붙으면 필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알았다. 네 마음대로 해.”
입을 벌리자, 체념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칼을 쥐고 한 발자국씩 다가오고, 유명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차라리 편안하다. 아주 오랫동안 포기하고 싶었다.
그의 체온이 점점 가까이 느껴지다, 푹- 하고 자신의 복부에 꽂히는 칼.
‘응···?’
칼을 맞고서도 아픔이 없다는 것에 이상해하는 순간,
유명은 잠에서 깨어났다.
헉- 허억–
꿈이었다.
옆에서 꼬리를 말고 잠들어 있던 미호가 졸린 눈을 가늘게 뜨고 웅얼거렸다.
{왜 그러냥. 악몽이라도 꿨냥.}
유명은 벌떡 일어나, 잠들기 직전까지 보고 있던 대본을 펼쳤다.
Personality Fight. 방금 전까지 자신은 꿈에서 이 대본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원래의 대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면.
조금 전의 자신은 현성, 은성, 민성 중 누구였을까.
유명은 멍하니, 방금 꾼 꿈의 내용을 잡히는대로 미호에게 설명했다.
얘기를 하다보니 조금 이상했다. 현성, 은성, 민성은 분명 준호의 대본에 등장한 이름들이었지만, 유명의 꿈 속에서 생각한 인물들의 성격은 조금씩 달라져 있는 것이다.
미호가 재미있다는 듯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흠…너 사실은, 우준호의 대본을 연기하고 싶은 게 아니구낭?}
‘…?’
{‘너를’ 연기하고 싶나보넹.}
‘나···?’
유명은 미호의 묘한 말을 듣고, 대본을 다시 들여다본다.
준호의 시나리오를 읽으며 떠올랐던 무수한 심상들.
그것은 평소와 달리, ‘이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하냐’보단, ‘이런 캐릭터면 어떨까’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준호가 시나리오에 익숙치 않아서 허점이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미호가 콕 집어내는 말을 들으니 머리 속이 선명히 정리된다.
‘…그러네, 정말.’
{대본, 좀 바꿔야하지 않겠냥?}
‘응…준호와 얘기해 봐야겠네.’
{공저하자고 해랑. 그게 우준호 입장에서도 부담이 덜 될거당.}
모티브는 준호의 대본이 제공해 주었지만, 결국 유명이 연기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이야기.
미호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꽤나 길을 돌아가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어.’
유명은 다시 펜을 들어, 머리에 떠오르는 것들을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다.
*
광고 촬영일.
오늘의 로케 장소는 비버리힐즈의 한 저택으로, 유명의 집에서 차로 5분이면 도착하는 곳이었다.
같은 비버리힐즈라도 유명의 집은 세련되고 컴팩트한 쪽이었다면, 이 집은 우아하고 웅장했다. 방만 10개가 넘는 3층의 대저택으로 검은 대리석을 많이 사용한 외관은 매끄럽게 빛이 나고 있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머리를 절반은 블루, 절반은 핑크로 물들인 펑키한 스타일의 한 남자와 수수한 차림에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한 40대 즈음의 여자가 박진희와 콘티를 놓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장을 입은 여러 사람들이 그들의 뒤에 서서, 회의내용을 훔쳐 듣고 있다.
[유명씨, 여기에요.] [우왓, 신유명씨! 실물!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실물이 더 멋지시네요. 신유명 배우의 첫 광고 작업을 함께 하게 돼서 영광입니다.]쾌활하게 외치는 남자는 뉴욕에서 최고의 주가를 달린다는 CF 감독, 자크 플루.
내추럴하게 칭찬을 섞어 인사를 건네는 여자는, 패션 잡지나 셀럽들의 개인 의뢰로 강렬한 상업 사진을 찍기로 이름난 패션 포토그래퍼 릴리 창이다.
그들이 유명을 보고 반색을 하며 손뼉을 쳤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신유명이다!)
(우와, 실물은 처음이야. 촬영장 말곤 다른 행사에 거의 참석하질 않는다니···)
(싸인이라도 받아둘까?)
그들은 각각의 광고주나 해당 대행사에서 나온 사람들.
현장에서 역할이 없는 경우가 흔치 않아서 그런지, 그들은 조금 어색하게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유명이 먼저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배우 신유명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네···넵!!] [잘 부탁드립니다!]유명은 촬영을 위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옷차림은 단순했다.
편안해 보이는 수면복에 슬리퍼. 메이크업은 베이스만. 그리고 일부러 헝크러진 듯 살짝 흐트러뜨린 머리.
유명은 소품들의 위치를 확인한다.
세면대에 가지런히 놓인 라메르의 최고급 남성용 기초화장품 라인.
옷장에 가득 걸려있는 것은 제냐의 가장 좋은 원단으로 만든 정장과 넥타이들.
거울 앞에 배치된 진열대에는, 오데마 피게의 시계가 모델별로 정렬되어 유리 아래서 반짝이고 있고, 유리 위에는 톰포드의 향수가 놓여 에메랄드 빛을 발한다.
담당자들이 다가와서, 자신들의 상품의 착용법이나 유의점을 설명했다.
[여기 로얄오크 화이트다이얼 제품으로 착용 부탁드립니다.] [로얄오크? 그것도 시계 브랜드인가요?]오데마 피게의 담당자가, 이런 부분에 전혀 조예가 없는 듯한 유명의 질문에 조금 당황하며 얘기했다.
[아…저희 모델 명입니다. 여기 가운데 있는 거요.] [그렇군요, 예쁘네요. 이거 어떻게 착용하는 건가요?] […여길 눌러서 이렇게-]각각의 시연들이 진행되는 모습을, 유명은 주의깊게 관찰했다.
이윽고, 광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236 진짜 품위
[알고 계시겠지만 자유롭게 움직이시는 와중에도 빼먹어선 안 되는 순서는, 씻고 화장품, 옷 입기, 시계 차고, 향수 뿌리기까지입니다. 편집은 제가 알아서 할테니, 시간 신경쓰지 말고 자연스럽게 연기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박진희는 자크에게, 최대한 테이크수를 줄여서 찍을 것을 주문했다.
배우의 몰입감 유지를 위해서, 그리고 TVCF와 함께 온라인용 풀 영상을 공개하기 위해 롱테이크를 요구한 것이다.
자크는 화면을 설계한대로 여러 대의 카메라를 배치했고, 릴리 창과 이야기를 나눴다.
[릴리, 콘티에 자세한 프레임이 표기되어 있으니까, 프레임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는 마음껏 촬영하셔도 됩니다.] [오케이~]모델컷 촬영은 뒤에 시간이 따로 잡혀있기는 하지만, 자연스러운 느낌을 살리기 위해 CF 영상 촬영시에도 스틸 컷을 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