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64
촬영에 관한 지시사항은 주로 영어로 얘기했다. 영어를 못 하는 스탭들을 위해 동시통역사가 부지런히 그 말을 통역해 전달했다.
위고가 오더니, 유명에게 음흉하게 웃음을 짓는다.
[소시적에 좀 놀아봤나보죠?]“아니요. 별로.”
[아니면 어떻게 이런 장면을 넣습니까. 분위기도 엄청 위험하던데.]위고가 다 알고있다는 듯이 툭툭 어깨를 치고 떠났고, 유명이 피식 웃었다.
이 장면을 넣은 이유는 민성의 캐릭터를 보여줌과 더불어, 남자가 가장 급한 본능을 억제할 정도로 그들 사이에 약속된 ‘8시간 룰’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
다음 신에서 현성은 민성의 행동을 비난하고, 민성은 룰을 어기지는 않았다며 그에게 받아치며, 오히려 적반하장의 논리를 펼친다.
-야! 쫌 집에 가서 자라고.
-바로 출근하면 되잖아. 차에 정장 있어.
-여자라도 보내던지!
-쟤가 안가는 걸 어떡해. 그리고 은성이 효도하듯이, 나도 너네가 못하는 욕구불만 풀어주는 거잖아. 내가 정기적으로 풀어주니까 니들이 편한 거거든?
(기가 막힌 논리에 말문이 막히는 현성.)
티격태격하긴 해도, 그들 사이에는 최소한의 룰이 있다.
그 룰을 지키려는 의지도 모두에게 있고.
하지만, 갑자기 내면의 집에 한 개의 방이 더 생겨난다.
그 방에 누워있는 새로운 인격은, 아직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휴식 끝! 다시 촬영 시작하겠습니다~~]#S12, 내면의 집. 현성의 방.
그는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은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카메라를 보며 반듯하게 말한다.
“케이스 제로. 이 환자는 세 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
마치 세미나에서 연단에 선 듯이, 혹은 방송에서 전문가 역할로 나선듯이 스마트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그는 자신을 분석한다.
“왜 이렇게 한 몸에 여러 개의 인격이 살게 된 것인지, 그 시작은 알 수 없다. 그게 궁금했던 나는 심리학 교수까지 되었지만, 우리의 상황이 일반적인 해리성 인격 장애와 다르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아침 8시에서 4시까지는 내 시간, 다행히 교수는 시간이 자유로운 편이다. 꼭 필요할 때는 은성이가 시간을 양보해주기도 한다.
오후 4시에서 12시까지는 은성이의 시간. 주로 집안 청소며 공과금 처리, 공원을 산책하고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며 지낸다.
그리고 밤 12시에서 아침 8시까지는 민성이의 시간이다.”
세 가지 인격의 성향과 그들이 합의한 룰에 대한 이야기가, 강연처럼 요점정리되어 관객의 머리 속에 입력된다.
“의식의 영향인지, 우리는 아파트처럼 생긴 공간 속에서 지내고, 저 대문을 나가는 순간 나간 사람의 의식이 ‘몸’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인당 의무수면시간으로 지정한 2시간 동안은 이 공간에서 셋이 함께 만나게 된다.”
거실 소파 맞은 편에 걸린 티비가 검은 화면을 비추고 있는 모습.
“거실의 티비를 통해 이 신체의 시야가 중계되지만, 이미 서로에게 익숙해진 우리는 굳이 TV를 잘 보지 않고 각자의 방에서 지내는 편이다. 지금은 수면 중이라 시야가 없는 상태.”
티비를 비추던 화면이 빙글 돌아, 하나의 방문을 비춘다.
냉정하던 현성의 목소리에 균열이 생긴다.
“갑자기 새로운 방이 하나 생길 때까지는, 우리의 삶은 적당히 평화로웠다.”
아직 눈을 뜨지 않는 새 인격.
깨기 전에 그를 죽여 없앨지, 한 번 깨워서 얘기해볼지, 가만히 기다려볼지 셋의 의견이 분분하던 어느 날,
그가 깨어났다.
248 너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깜빡-
아무것도 모르는 새하얀 정신이 눈을 떴다.
눈을 깜빡깜빡이는 그를 향해, 은성이 손을 내민다.
“안녕, 나는 은성이라고 해.”
“…안녕.”
“처음이라 혼란스럽겠지만 우리가 많이 도와줄게. 하루에 18시간씩은 함께 지낼 사람들이니까, 사이좋게 잘 지내자. 너는 이름이 뭐야?”
“…유성.”
새로 태어난 인격은 아직 스스로를 제대로 모르지만, 이름만은 알고 있다. 은성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가진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18시간을 함께 지낸다. 그것의 의미는 개인당 주어진 시간이 6시간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뜻.
그가 조금 적응하고 나면, 인당 활동 시간은 수면 시간을 빼고 나면 4시간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현성과 민성은 눈살을 찌푸린 채 문간에 서 있다.
“혹시, 뭔가 원하는 게 떠오르지는 않아?”
“원하는 것?”
그 말에 그의 시선이 확 짙어진다. 세 사람은 본능적으로 몸을 흠칫 떨었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멍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
“그래. 천천히 적응해 보자.”
잠시 후, 현성의 시간이 되어 그가 현관 밖으로 나간다.
유성이 멍하게 그의 뒤를 따라 나가려고 하자, 은성이 그의 어깨를 감싸안고 만류한다.
“지금은 네 시간이 아냐. 그리고 아직은 안 돼. 좀 더 세상을 알고 네가 원하는 게 명확해지면, 함께 공존할 방법을 다같이 의논할 거야.”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거실 쇼파에 앉는다.
몸이 깨어났는지 TV 화면이 현성의 시야로 바뀐다. 그는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아직 보지 못한 바깥 세상이 신기한 것일까, 그는 좀처럼 티비 앞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민성이 유심히 바라본다.
[붙여요.]위고는 짬이 날 때마다, 데이터 매니저를 들들 볶아, 그 날 촬영분을 가편집해서 확인하고 있었다.
이제는 유명이 타이밍을 맞출 것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볼 때마다 소름이 돋고 눈이 의심스럽다. 심지어 방금 전 은성이 유성의 어깨를 감싸안았을 때, 따로 조정을 하지 않고도 은성의 손이 유성의 어깨에 거의 정확하게 얹혔다.
이 정도면, VFX도 생각만큼 힘들 것 같지 않았다. NG도 거의 없으니, 등장하는 인격의 개수에 따라 정해지는 테이크들을 겹친 후, 미세조정만 하면 될 것이 아닌가.
[류신.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신유명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말이 된 적이 없었습니다.] [어릴 때도 그랬나…?]돌아가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류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걸 보면 어때? 나는, 물론 그런 적이 거의 없긴 하지만, 내가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연출하는 감독을 보면 배알이 끓어오를 거 같은데 말이야.]류신이 피식 웃었다. 그런 적이 거의 없기는.
위고가 를 본 후, 몇 날 며칠동안 눈에 핏발이 서 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저는 본인 연기를 모두 계산해서 연기하는 저 신기에 가까운 능력보다는, 다른 게 더 마음에 걸리는군요.] [어떤 거?] [저 유성. 신유명이라는 인간을 정제하고 정제해서 본질만 남겨둔 거 같은… 어떻게 저런 압축된 분위기를 내는 걸까요.] [그래? 난 그거까진 잘 모르겠는데.]위고가 고개를 갸웃하자, 류신이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진득하게 묻어나는 욕망.
유성의 저 멍한 얼굴에, 류신에게도 내재된 연기에 대한 욕망이 자극받아 너풀거린다.
이 감각만큼은 배우가 아니면, 인생을 모조리 바칠만큼 연기에 미쳐있는 영혼이 아니라면 알 수 없으리라.
‘저 연기를 모두 쫓아가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너에게 도움이 되고 말겠다.’
요즘 류신은 거의 강박적으로, 어떤 연습을 하고 있었다.
*
“아니, 우리 편집실을 뭘로 알고.”
“왜 그래?”
실력있는 편집감독들은 개인 편집실을 차리고 외주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편집 실력을 배우기 위해 들어온 어시스턴트들이 도제식으로 성장하여 새로운 편집자가 된다.
최승태는 한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편집감독이었다.
상업 영화만 편집하는 편집감독은 국내에서 열손가락에 꼽는다. 하지만 최승태는 대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상업영화들만 꾸준히 외주를 받았다.
늘 일거리가 넘쳐서, 어시스던트들이 가편집을 하고 나면 마지막에야 최승태가 직접 손을 보았는데, 그가 마술처럼 손을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며 척척 편집을 해낼 때면, 뒤에서 어시스턴트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구경하곤 했다.
“가편집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본편집은 따로 볼 사람이 있는데, 시간이 촉박해서 가편집으로 90%쯤 완성시키고 싶다면서, 가편집 비용을 일반적인 편집비만큼 주겠다고 제의하네요. 건방진 놈들…우리 편집실을 뭘로 보고.”
그 말에 최승태의 굵은 눈썹이 꿈틀하자, 수석 조수가 어깨를 움츠린다. 최승태의 까칠하고 욱하는 성미는 업계에서 유명하다.
“어디야?”
“그 밍기뉴라고, 이번에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인수됐다는 곳 있지 않습니까.”
“거기, 그 신유명 영화 찍는대서 다들 신경 곤두세우고 있는 거기 아니야?”
“맞습니다. 안 그래도 소문도 껄끄러워서 거절할 판인데, 제안 조건도 괘씸하네요.”
“무슨 소문?”
수석 조수가 암암리에 업계 관계자 사이에 도는 소문을 전했다.
신유명이 감독을 직접 맡았다는 소문, 윤성 엔터에 미운털이 박혀서 해외 시장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쉽지 않을 거라는 소문, 그 쪽으로 넘어간 인력들이 윤성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소문을.
최승태는 오히려 그 소문에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감독으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신유명 연기가 미쳤기는 하지. 그거 편집하면 손맛이 죽이긴 할텐데…그리고 양아치 윤성 엔터에 미운털이 박혔다라…’
“대본 좀 보자고 해.”
“네? 감독님 저희 올해 스케줄 완전히 풀인데-”
“내가 보면 되잖아.”
“네?!”
수석 조수가 당황했다. 가편집 정도야 그쪽 인력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을텐데, 굳이 돈 줘가며 외주를 맡기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최승태는 가편집에 직접 손을 댈 정도의 급이 아니었다. 편집실에 들어오는 의뢰 중에, 최승태의 손을 직접 타려면 상당한 추가비용을 내야 한다. 그러고도 그가 손을 대주는 것은 마지막 다듬을 때 뿐이었다.
“모르겠냐? 우리 편집실에 가편집을 맡기겠다는 건, 라스트 편집을 헐리우드에 맡기겠다는 거잖아.”
“아…”
“가편집에조차 최고를 쓰려고 한다는 건, 편집의 비중이 무지하게 높은 시나리오라는 거고.”
“아…”
“일정 촉박하다는 얘기는 말이 90%지, 이 쪽에서 99% 완성해줬으면 좋겠고, 마지막 부족한 1%만 최고 중의 최고가 손볼 거라는 얘기 아니겠냐고.”
“아…”
최승태가 수석조수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바보 도 틔는 소리 그만하고, 답신 보내. 무조건 한다는 건 아니다. 일단 그만한 가치가 있는 시나리오인지는 확인해야지.”
“시나리오는 대외비일텐데…”
“내가 직접 나간다고, 파일말고 인쇄물로 초반부만 검토하고 확정하겠다고 해. 그 정도 요구는 들어주겠지.”
“…네, 감독님.”
최승태는 자존심이 상한, 하지만 흥미가 샘솟아오르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최종으로 누구를 붙이려고, 이 최승태에게 가편집을 요구한 것일까.
만약 정말 최고가 온다면, 자신이 마무리한 편집이 그의 손에서 얼마나 조정될지 궁금했다.
말이 가편집이지, 진짜 가편집을 할 생각은 없었다.
최고가 봤을 때도 ‘손댈 데가 없다’는 소리가 나올만큼 제대로 하는 것이 당연했다.
*
Scene 1에서 심리학회장이 현성에게 ‘내담자’를 받을 생각이 없는지를 묻는다.
일종의 케이스 스터디.
그녀가 현성의 교수실을 찾아온다.
고다인. 다중인격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다.
실제 다중인격의 임상사례는 얼마 되지 않으니,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케이스일 것이다. 현성은 그녀를 연구해, 더욱 높은 연구성과를 얻고 인정받을 목적으로, 기꺼이 학회장의 의뢰를 받아들인다.
“유명 오빠! 류신 오빠!”
촬영장에 나타난 그녀에게 스탭들의 놀란 시선이 쏠렸다.
작년, 실물이 더 아름다운 배우 1위로 꼽혔다는 설수연. 그녀는 정말로 보는 순간 숨을 멈출 정도로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잘 왔어.”
“으아, 저 영화 후반작업이랑 인터뷰같은 거 겨우 맞춰서 끝냈잖아요.”
“네 촬영 많지 않으니까, 스케줄 병행해도 되는데.”
“싫어요! 한 번 오면 그 뒤엔 매일 안 나오고 못 배길 것 같아서, 일부러 스케줄 모두 제 촬영 전으로 몰았단 말이에요. 앞으로 웬만하면 계속 나올 예정입니다!”
“하하, 그래.”
위고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낯익은 얼굴인데? 아…피터팬?!] [안녕하세요, 감독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은 이 쪽인데?] [어…그래도 감독님은 원래 감독님이시니까요.]위고는 당시를 떠올렸다.
신유명의 피터팬, 서류신의 후크, 그녀의 웬디.
당시 그녀는 아직 서툰 연기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몰입력이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나머지 두 명에 비하면 걸음마 상태였다.
하지만 몇 년 만에 만난 그녀는, 마치 허물을 벗은 나비처럼 주변의 시선을 부드럽게 끌어당긴다. 얼굴이 예쁜 것도 한몫하지만, 뭔가 분위기가…그녀의 주변만 채도가 살짝 높아지는 듯 진한 색상으로 바뀌는 탁월한 존재감.
‘과연 지금은 어떤 연기를 하려나…’
유명도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래 존재감은 탁월한 아이였다. 현생으로 돌아온 첫 해, 의 화보 촬영에서 그녀를 처음 만나고 돌아왔을 때, 미호가 코를 킁킁대면서 ‘생기가 강한 인간을 만나고 왔냐’고 물었던 드문 존재감.
아마 타고난 존재감으로 치면, 지금의 자신이나 서류신도 살짝 넘어설 정도의, 선택받은 재능.
자신이 껍질을 깨 준 그녀의 연기력은 이제 얼마나 늘었을까.
수연이 다인의 차림을 하고 나선다.
하얀 얼굴에 긴 생머리, 거의 화장을 하지 않은 깨끗한 얼굴이지만 입체감이 살아있다.
치렁치렁한 레이스 치마 위에 후드티를 입은 모습이 평범하지 않은데도, 어떤 코디든지 얼굴이 소화해 버린다.
그에 반해 유명은 각 잡힌 현성의 모습.
반듯한 수트에 은테안경을 쓴 예리한 느낌은, 다인과는 여러모로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의 앞에 선 그녀의 손이 살짝 떨린다.
오랜만에 테스트라도 받는 심경이겠지. 유명은 그런 그녀에게 나직하게 말한다.
“수연아.”
“네…넵!”
“긴장하지 말고.”
“…하하.”
“다인이가 짧게 짧게 등장하는데도, 굉장히 설득력있어야 하는 인물이잖아.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있을 것 같은 인물.”
“네.”
“너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유명의 말에, 그녀의 등이 흠칫 흔들린다.
“네 몰입력이, 다인이를 진짜로 만들어 줄 거야.”
유명과 친해서가 아니라, 이미지가 맞아서가 아니라, 이 역에 가장 어울리는 배우는 너밖에 없다는 선언.
그 선언이 가져온 신뢰의 무게에, 그녀가 파르르 떨었다.
계기만 있으면, 엄청난 몰입력을 발휘하는 배우.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시작하겠습니다.]그런 그녀의 몰입을 깨지 않도록, 유명이 작게 사인을 내린다.
위고가 그것을 이어받아 큐를 선언했고, 카메라가 차르르 돌기 시작했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 고다인씨라고 했죠?”
현성이 편안한 웃음을 지으려고 노력하지만, 그 쪽에는 영 재능이 없는지 미소가 날카롭다.
“다중인격 진단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네. 그리고 선생님이 이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자라며, 상담을 권유받았죠. 그런데, 상담에 재능이 있는 선생님같진 않은데요?”
작중 다인의 설정은 갓 스무살이 된 아가씨.
소녀와 성인의 중간즈음에 위치한 그녀는, 표정만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처럼 여유롭게 상대를 분석한다. 누가 환자이고 누가 상담자인지 모를 노릇.
현성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지금 얘기하시는 분은 몇 살입니까?”
“어머, 여자 나이는 묻는 게 아닌데.”
그녀가 다리를 꼬고 팔걸이에 몸을 기댄다. 대학생같은 얼굴이, 순간 어느 바에 앉아 있는 마담처럼 노회하게 보인다.
‘오…’
위고가 몸을 앞으로 슬쩍 당겨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웬디 때와 비교해 연기의 기술이 많이 늘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빨려드는 듯한 분위기.
몰입력이 극상인 두 배우가 만나자, 연기 현장은 순식간에 현실이 되고, 스탭들은 마치 현실의 어느 공간을 관음하는 관중이 된 것처럼 숨을 죽인다.
현성 또한 몸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묻는다.
“그럼 나이는 묻지 않기로 하고, 몇 분이죠?”
“흐음…’우리’는 많아요.”
그녀는 의외로 거리낌없이,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준다.
얘기를 들어보면 그녀에겐 열 개 이상의 인격이 있는 모양이지만, 지금 현성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인격의 지배 하에 서열이 정리되어 있는 것 같다.
‘역시 우리와는 다르네.’
현성은 그런 생각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지배하는 인격은 그녀이지만, 주된 인격은 따로 있다는 것.
“어째서죠? 당신만큼 힘이 강하다면, 다른 인격을 누르고 온전히 당신 혼자 시간을 쓸 수도 있지 않나요?”
“아아, 매번 직접 활동하는 건 귀찮아서.”
그녀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더니, 갑자기 눈동자가 휙- 위를 향해 치솟는다.
보던 사람들이 그녀의 돌변에 긴장했다.
“다인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네요.”
“당신이 다인이 아닙니까?”
“아아, 내 이름은 수인이에요. 다인이는 내가 이 몸의 주된 인격으로 내세운 아이죠. 통찰력이 아주 좋아요.”
꿀꺽-
모두 침을 삼키는 한 순간에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아까의 닳고 닳은 표정이 아닌, 스무살에 알맞는 순진하고 맑은 표정으로, 그녀가 입을 연다.
“오빠, 새 오빠는 욕심이 많아요. 조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