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74
아, 이 다음 대사.
“저 목소리로 ‘보형아’라고 다시는 불러주지 않으면…”
순식간에 팬들의 눈에 눈물이 들어찬다.
보형에게 있어, 이름의 의미.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과, 바쁜 할아버지. 그를 언제나 어렵게 대하는 사람들의 딱딱한 부름이 아닌, 다정하고 따뜻하게 수십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불러줬던 하나의 ‘보형아’.
소중한 것을 잃느니 지키는 것을 택한, 그래서 자신의 사랑을 목이 말라 죽을까봐 소금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남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그 때 핀 조명 안으로 하얀 손 하나가 들어와, 그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보형아.”
모두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설마… 이 목소리는.
지잉-
에어리어 조명이 켜지자 드러난 것은 차하린이었다.
*
‘진짜 하나가 오다니…!’
두근두근.
모두는 긴장했지만, 입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다시 이 투샷을 보게 될 줄이야.
게다가 이번엔 보형에게 해피엔딩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에, 그들은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하…하나야.”
“그랬구나. 날 도와줬던 건 그래서?”
“아니,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니라고!!”
처연했던 원래의 장면과 달리, 자신의 본심을 들켜 허둥지둥대는 보형의 모습.
하나의 오해아닌 오해에 발끈하는 모습까지도 귀엽기만 하다.
“하나 네가 정말 열심히 살았으니까…멋진 배우이자 존경스런 인간 김하나를 응원하는 마음이었을 뿐이야.”
그는 시무룩해져, 시선을 아래로 떨군다.
“이런 오해를 받을까봐…들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서, 못 들은 걸로 했으면 좋겠어?”
“…어어. 그래줄래… 난 괜찮아, 그냥 잠깐 지나가는 바람이니까. 곧 네 친구 보형이로 돌아갈테니까.”
하나의 눈빛에 다정함이 깃든다.
그는 깊은 마음이 버거운지, 자신과 눈도 맞추지 못한다. 누구보다도 눈치가 빠른 아이가, 자신이 왜 여기 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긴장해 있다.
보형은 계속 횡설수설한다.
“실장님은 어디가셨지? 설마 실장님이 하나 너를 여기 부른거야? 하하하, 이 분이 왜 안하던 짓을…”
“보형아. 못 들은 걸로 할 수는 없어.”
“어?”
그의 얼굴에 다급한 절망이 깔린다.
그녀의 말 뜻은, 자신의 이런 마음을 알게 된 이상 친구도 될 수 없다는 걸까.
그녀를 얻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잃을 수는 없다.
“안 돼, 하나야! 곧, 금방 마음 정리할 수 있어. 아니, 이미 정리했어. 정리했으니까-”
“내 마음도 너와 같거든.”
“…뭐?!”
보형이 휙- 고개를 든다.
혼란스러운 그의 눈빛. 그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는 희망.
권도준이 아니라, 나라고? 언제부터?
“3년이 걸렸네. 어디가서든 나는 배우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
“권도준을 보면 설렜던 적도 있었지. 그와 스캔들이 나더라도 권도준의 연애상대가 아닌 배우 김하나로 기사가 날 수 있을 정도의 급이 되면, 그 때 다시 생각해보자고 결심했었어.”
보형은 그런 하나의 결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3년 내내 그녀의 지지자로, 조언자로 곁에 있으며 그녀를 보아오지 않았던가.
그녀는 배우로서 자신의 이름을 갖기 위해,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힘겹게 노력했고, 이제 정말로 손꼽히는 배우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 권도준이랑 같이 연기했잖아?”
하나의 소원은 이루어져,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 권도준과 남녀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고, 남주와 여주의 연기배틀물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좋은 연기를 보였다.
그러니 이제는 그녀가 그에게 갈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눈높이에 서보니 알겠더라고. 나는 그를 동경한 거지, 사랑한 게 아니었어. 오히려 내 마음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가 있더라고. 너무 귀여운데도 든든하고, 종잡을 수 없지만 속 깊은, 가장 내 가까이에 있던 남자에게.”
하나의 조용한 고백을 들으며, 보형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눈물이 방울방울진다.
성인남자라면 보통 눈물을 숨기려 하지만, 감추지 못하고 도르르 구르는 눈물이 보형에겐 너무나 잘 어울린다.
오랫동안 아끼고 응원했던 그의 여신은 결국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보형은 그 손을 매달리듯이 꼬옥 잡았다.
“허엉…하나야. 너 연기하는 거 아니지. 나 놀리는 거 아니지.”
“좋아해, 보형아.”
하나의 그 말에, 보형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더니,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지켜보던 팬들의 몸이 배배 꼬였다.
감추고 눌러왔던 마음이 허락되자 그가 보여준 표정은…
‘어떻게 숨겨왔을까, 저걸…’
보는 이들이 애잔할만큼, 누군가를 지극히 아끼는 마음이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순간들이 재생된다.
보형은 자신의 무릎에 누운 하나의 머리를 쓸어주며, 그녀의 하소연에 ‘뭐? 그 계같은 놈이?’하고 자신의 일보다 더 분노해주기도 했고,
예전처럼 밝고 티없는 모습으로, 노래하듯이 그녀에게 재잘대기도 했다.
그러면서 하나를 향한 감정은 나이가 더 먹어갔다.
드라마에서 화제가 되었던, 보형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
지금의 그는, 이미 사랑에 빠진 남자가 더욱더 사랑이 깊어져 가는 변화를 보여 주었다.
“사랑해.”
그것이 마지막 대사.
보형은 하나를 향하는 말을, 객석을 향해 던졌다.
그 한 마디에 묻어나는 터질 것 같이 부푼 감정에, 팬들은 자신을 향한 고백을 듣는 듯이 심장이 콩콩 뛰었다.
“네가 너여서, 고마워.”
그것은 마치, 오랜시간 같은 자리에 있어준 팬들에게 보내는 감사같이도 느껴졌다.
*
와아아아아아–!!
첫 번째 무대가 끝나고, 다들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이 함성을 질렀다.
유명은 하린과 나란히 서서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한 스탭이 잽싸게 마이크를 가져다 주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배우 신유명입니다. 오늘 까메오로 와주신 동료 배우 차하린씨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박수 부탁드려요.”
커다란 박수가 쏟아지며, ‘예뻐요~’ ‘잘어울린다~’하는 목소리들이 함성 속에 섞였다. 하린은 웃으며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퇴장했다.
그리고 이제 무대 위엔 유명 혼자.
공연장의 공기는 늘 빽빽하고 예리하지만, 유명은 오늘만은 그 공기가 부드럽고 따뜻하다고 느낀다. 그만큼 이 공간은 자신을 향한 호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편안하게 말이 흘러나온다.
“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보고 싶으셨어요?”
“네~~~!!” “흐어엉.”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유명의 팬들은 유명을 너무 좋아하고 아끼면서도, 조금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가 너무 완벽할 정도로 대단한데다, 작품활동 외엔 외부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연기콘서트가 있기 전까지는, 몇 년 전 유명의 팬미팅에 다녀온 팬들이 ‘계탄 분들’로 모두의 부러움을 샀을 정도로, 그는 팬들에게 멋지지만 조금 먼 스타였다.
어쩌면 유독 보형이 인기가 많은 것에 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손에 닿지 않을 것 같은 유명에 비해, 보형이는 보고싶다고 투덜대면 애교부리며 달래줄 것 같은 말랑한 느낌이니까.
그래서 팬들은 유명이 편안하게 건네는 드물게 애교섞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투정을 부린다. 우리는 언제나 너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결코 네 발목을 잡고싶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우리를 돌아봐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유명은, 다정하게 웃으며 그 투정을 받아준다.
“미안해요. 제가 욕심이 너무 많아서.”
그 말에 또 팬들은 아우성친다.
“아니에요!” “하고싶은 거 다 해요!” “저희는 지금도 너무 행복해요.”
오늘 부산 첫 공연에 와 있던 유석은 그런 유명의 모습을 보며, 그가 어떤 분기점을 맞이했음을 짐작했다.
예전보다 훨씬 얼굴이 풀려 있다고 해야 할까.
“부족하지만 오늘 이 자리는, 오랫동안 저를 기다려준 친구들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더욱 즐겁게 해 줄 제 다른 친구들도 여럿 함께할 거예요. 모두들 즐겁게 봐 주세요.”
“네~~~!!”
“다음 If story는, 스토리 자체를 변경시킨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조합을 상상해 보신 분들이 많더라구요.”
다음은 뭘까.
팬들은 두근대며 유명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서류신, 설수연 배우와 함께 준비했습니다. 피터팬 하이라이트. 단, 피터팬과 후크의 변경된 캐스팅을 즐겁게 감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해진다.
다음으로 그들이 보게 될 것은, 신유명의 후크와 서류신의 피터팬이었다.
*
문유석은 무대에 등장하는 서류신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진짜, 저 친구도 대단해.’
배우라는 종자들의 연기에 대한 집요함.
유명을 보며 그것을 잘 알게 된 유석이었지만, 그럼에도 서류신은 종종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감히 저 신유명에게, 역을 바꿔서 해 보자는 제안을 했다니.’
연기력으로 세계 최고라 불리는 배우가, 원래 자신의 배역을 연기하는 것이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없다. 애정을 가지고 만들어냈던 자신의 배역을, 누군가가 쉽게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유석이 아는 유명이라면, 먼저 나서서 그런 제안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저건, 서류신이 먼저 제안한 것이 분명하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무대를 휘젓고, 순진무구한 눈으로 잔혹한 짓을 일삼는 류신의 피터팬은, 예전 유명의 피터팬에 버금갈 정도로 무척 좋았다.
하지만 그런 피터를 보고, 그가 내는 시계소리를 듣고 손목을 부여쥔 채 발작하는, 그러다 진정제를 맞고 완전히 늘어져, 닦지도 못하는 눈물을 줄줄 흘리는 유명의 후크는, 예전 류신의 후크와는 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서류신이 신유명을 죽어라 쫓아오는 동안,
신유명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앞으로 달아났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류신의 기세만은 유명 못지 않았다.
게다가 에서 합을 맞췄던 각이 살아있는지, 두 사람의 호흡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숨이 막힐 정도로 빠듯하게 맞물렸다. 거기에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설수연의 몰입감 넘치는 연기가 집중력을 더해 주었다.
‘정말 탐나는데…’
문유석은 서류신에게 감탄하며 생각한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저 근성. 꺾이지 않는 연기에의 열정.
그의 직계가족이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않았다면, 진즉에 위약금을 주더라도 그를 배드 엔터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쪽 기획사가 해외 진출을 서포트하진 못하겠지. 해외 쪽이라도 우리와 계약하자고 꼬셔 봐야겠어.’
계속해서 무대가 진행되었다.
이번 콘서트의 주제에 맞는 If story들도 있었지만, 예전 그대로 가져온 무대들도 있었다.
를 다시 보여주었을 때, 모두는 자유로 도약하는 인간에게 갈채를 보냈고,
를 보여주었을 땐, 작은 생명을 향한 날 것 같은 애정에 한 명도 빠짐없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의 데카르도를 한국어로 연기했을 때는, 다들 ‘데카르도의 시니컬한 말투는 이런 느낌이었구나’하며 감탄을 토했다.
연기 콘서트.
그 명칭을 관객들은 갈수록 납득하고 있었다.
마치 가수의 콘서트처럼, 이미 발표했던 연기들을 다시 보여준다.
같은 곡을 반복재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뀐 레파토리로, 더 나은 가창력으로.
연기의 선물세트를 아낌없이 퍼붓는 이 무대는, 분명 ‘콘서트’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꿈같은 2시간이 거의 마무리되고, 유명은 다시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들었다.
“사실, 원래 준비한 무대는 여기까지였습니다.”
아쉬운 작별을 할 준비를 하던 관객들은, 뭔가 여운이 남는 멘트에 어? 하고 기대를 한다.
“그런데, 이틀 전에 한 분이 갑자기 이 나라에 들이닥쳤어요. 덕분에, 한 가지의 레파토리가 추가될 수 있었죠.”
설마…
“제 소중한 벗 데렉 맥커디를 소개합니다.”
(뭐…?)
(진짜?)
(데렉? 그 데렉 맥커디?)
모두의 경악한 시선을 즐기듯 끌어당기며, 무대의 한 쪽에서 진짜 ‘그 데렉 맥커디’가 등장했다.
261 뭐 재미있는 거 없나
데렉 맥커디.
압도적으로 우월한 비주얼과 분위기를 가진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저 오만한 태도.
연기력으로 유명이 최고로 인정받았다고 해서, 이 배우의 가치가 폄하될 수는 없다. 한국에 내한하는 것만으로도 온 매스컴의 주목을 받을만한 대배우가, 언제 몰래 입국해서 여기까지?
양쪽의 전광판에, 즉석으로 번역 자막이 뜨기 시작했다.
어제 통역가를 급하게 섭외하여, 자막을 실시간 삽입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전달하기로 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데렉.] [안녕 못해요.] [왜요?] [나만 빼고 이런 재밌는 일을 하고 있었다니.]꺄악~~
턱을 살짝 들고, 유명을 힐난하듯 말하는 데렉을 보고 팬들이 비명을 질렀다. 데렉 맥커디의 거만한 캐릭터는 워낙 유명해서, 이제 그가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팬들이 실망할 지경이었다.
[잘 지냈어요?] [아니, 한동안 제일 자극적이었던 요소가 사라지고 나니까, 영 재미가 없더라고.] [그거 설마 저 말하는 건가요?]원래 데렉은,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배우들을 괴롭히는 것이 취미이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들 중엔 나탈리 카센도 있었고, 마일리 필론도 있었다. 물론 상대들을 연기적으로 더 성장시키기 위한 괴롭힘이었다. 그렇게 눈부신 성장을 이끌어내고 나면 그는 또 다른 배우를 찾아 성장시킨다.
한 번 함께 작업한 배우는, 그가 놀랄만큼 변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상 데렉의 흥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나탈리 카센이 수 년간 데렉을 쫓아다녔던 이유였다.
그런데 유명을 만나도 그는 십수년 만에, 자신보다 뛰어난 상대와 연기할 때의 희열을 느꼈다.
질리지가 않았다. 그는 매번, 자신도 다다르지 못했던 연기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줬으니까.
그러니 지금 데렉의 투정도 이해할만 하다. 그는 유명이 한국으로 가버린 후 약 8개월 간, 따분해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기엔 새 작품, 굉장히 화제던걸요? 올해 안에 개봉하죠?] [한 달 전쯤 촬영이 끝났죠. 편집에 서너 달쯤 걸리겠죠?]마치 남 얘기인양 시큰둥하게 반응한 데렉은, 팬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영화 끝나고 후반작업에 필요한 일들, 인터뷰들, 정리되자마자 들어온 겁니다. 뭐 재미있는 거 없나~ 하고.]그러면서 유명의 어깨에 팔을 두르자, 팬들이 꺄아악 비명을 지른다.
[그런데 봐, 딱 재밌는 거 하고 있잖아, 나만 빼고.] [하하…]유명이 어색하게 웃더니, 다시 한국어로 팬들에게 마지막 무대를 예고한다.
“마지막 무대는, 아스와 테르카의 If story, ‘아스의 계획을 테르카가 눈치챘다면’ 입니다. 급조된 무대라 의상이나 분장은 마련하지 못한 부분, 양해 부탁드립니다. 시작할게요.”
와아아~~
팬들의 함성과 함께, 연기 콘서트의 마지막 무대가 시작되었다.
*
[이거, 조작된 정보였지?]둥근 물체를 던져 올렸다가, 탁- 하고 손에 쥐어챈다.
그것은 아마도, 아스의 안구.
분장 하나 없이도, 머리를 올백으로 묶은 것만으로 테르카는 테르카였다. 그는 압도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며 아스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다.
아스는 두 눈을 감고 있다.
아스는 눈 하나를 테르카에게 내어주고, 헤티를 위해 남은 눈을 제 손으로 찔렀었다.
그만큼 희생했음에도, 테르카는 결국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 버렸다.
아스는 몸이 떨릴 것 같은 기분을 억지로 제어한다.
소중한 것이 생겨버린 그는 두려움을 알게 되었다. 헤티를 지켜야 한다.
어떻게 그를 속일 수 있을까.
[내가 왜 조작을 하겠어.] [뭔가 수상해서 관찰해보니 다른 한 쪽의 눈도 사라졌더군. 네가 직접 없앴나? 아븨칸인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눈을 없애다니, 너무 이상하잖아.]어차피 증거는 없다.
일단 태연하게 굴어야 한다. 그녀가 자신의 약점인 것을 들킨다면, 그는 자신의 눈 앞에서 그녀를 으스러뜨릴 것이다.
테르카가 의심하지 않을 이유.
[후우…좋아. 네게만 말해주지. 네가 눈 하나를 가져간 후, 미약하지만 내게 ‘감정’이 생겼다.]테르카가 눈을 부릅뜬다.
아븨칸인은 고도로 발전하여 감정적인 부분이 퇴화해버렸고, 그래서 타 인종에게서 쾌락을 추출하여 미약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감정이 생겼다고? 가능한 일인가?
[이유는 모르겠어. 다만 추정하기로, 아븨칸인의 ‘눈’은 모든 것을 읽고 분석하는 절대 이성의 도구이니까, 그것을 뺏기자 퇴화되었던 감정이 다시 싹튼 게 아닐까하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말도 안 돼. 그렇다면 아븨칸에 있는 수많은 외눈박이들은? 그들에게도 감정이 생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아븨칸에서 눈은 가장 큰 재산이다.
눈 한 쪽을 팔고 외눈으로 지내는 빈민이 흔하며, 눈을 노린 범죄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아스가 말한 것 같은 현상은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거짓일까, 진실일까.
[흡수해 온 정보가 달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아븨칸엔 감정이 없잖아. 하지만 나는 수십 년간 이 행성에서 지구인의 감정을 눈에 축척하며 살아왔지. 그것이 단순히 정보로만 존재하다가, 강제로 눈을 제거당한 순간 감정으로 연결된 것일까, 라는 가설을 세웠다.]제발 믿어라.
너는 학자는 아니지만, 이 이야기는 흥미롭겠지.
흥미로운 이야기에는 보다 신빙성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