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84
‘그리고, 그 쪽이 덜 늘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유명은 인격살인의 공연을 하면서도, 연합 공연을 위한 연습에 꾸준히 참가하고 있었다.
타인이 자신을 연기하는 것이 조금 민망하면서도, 동료들이 하루하루 정교해지고 깊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놀라운 쾌감이었다.
게다가, 무대 위에서 하는 교감만큼 깊은 것이 있을까.
짧은 눈짓만으로도, 동공이 살짝 확장되는 것만으로도, 본능적으로 상대 배우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다.
재능이 대단한 배우들과 함께 연기로 부대끼는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자극이었다. 아마 전반부의 매 공연에 유명이 발전한 것은, 연합 연습의 효과도 있을 것이다.
{수준이 다르잖냥.}
‘꼭 나보다 잘 하는 사람에게서만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마. 열심히 할게.’
연귀는 입을 꾸욱 닫았고, 그런 그의 털을 유명이 슥슥 쓰다듬었다.
그리고 무대를 바라본다.
유명이 네 배역을 모두 연기하는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그림자 무대’는, 이제 여러 배우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무대로 변경될 것이다.
또 다시, 새로운 무대이다.
*
“흐음…이름이 뭐야?”
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긴 생머리를 한 쪽으로 넘긴 여성의 눈꼬리가 치뜨듯이 올라갔다 나른하게 내려앉았다. 작은 혀가 살짝 나와 도톰한 입술을 적시고 들어간다.
뜨거운 밤을 연상하게 하는, 아주 깊고 새까만 눈동자. 민성이다.
“좋습니다.”
유명의 오케이 사인에 카메라가 꺼졌다. 그리고도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수연의 표정이 평소처럼 돌아갔다.
언제봐도 기가 막힌 몰입력이다.
연습기간 동안 가장 많이 발전한 것은 효준과 수연이었다. 특히 수연은, 기존의 청순하고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내려놓고, 보는 것만으로 ‘본능’을 느끼게 하는 민성을 연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공연이 얼마남지 않은 시점에, 수연의 민성이 완성된 것이다.
“잠깐 쉬고 있어봐. 화면 좀 확인할게.”
이번 공연의 재미있는 포인트는, ‘내면의 집’의 캐스팅과 ‘외부 세계’의 캐스팅이 다르다는 점이다. ‘외부세계’의 현성, 은성, 민성, 유성은 모두 유명이 연기하게 된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격이 다를 뿐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즉, 내면의 집에서 민성은 수연이 연기하지만, 외부 세계에서 민성은 유명이 연기한다.
이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설득시키려면?
“흐음…이름이 뭐야?”
유명은 수연이 연기한 민성을 여러 번 돌려본 후, 일어나 민성의 연기를 시작한다.
딸꾹-
그것을 본 수연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순간 놀라서 목에 헛바람이 들어간 것이다.
지금 유명이 연기하는 민성은, 기존에 유명이 연기하던 민성이 아니었다. 방금 수연이 연기했던 민성을 그대로 카피한 민성.
가벼운 손짓부터 목소리의 작은 떨림까지, 소름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유명의 몸을 빌려 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명은 연기를 해본 후, 다시 한 번 수연에게 주문했다.
“좋아. 거의 다 온 것 같아. 조금만 더 느긋한 템포로 한 번만 더 가보자.”
“넵!!”
그들의 연습 방식은 이러했다.
각 캐릭터를 맡은 사람들은, 내면의 집과 외부 세계 장면을 모두 연습한다. 실제 무대에선 외부 세계는 유명이 연기하게 되겠지만, 캐릭터를 완성하기 위해서 전 장면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리고 캐릭터를 1차적으로 완성시킨 후에, 유명이 그것을 카피한다.
유명이 연기해 보며, 조정할 부분을 다시 주문하고, 해당 배우는 그에 따라 연기를 세세하게 조정한다. 그리고 유명은 마지막 조정본에 자신의 연기를 다시 맞춘다.
이로서, 내면의 집의 민성과 외부 세계의 민성은 겉껍질만 다를 뿐, 같은 영혼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걸 가능한 방법이랍시고 내놓는 것부터 글러먹었지.’
편집이 끝나고도 한국에 눌러붙어 연극 연습을 구경 중이던 위고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것이 브라이즈의 배우들이 자신에게 갖는 불만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채로.
그리고 저 배우는, 그 ‘글러먹은 방법’을 쉽게 해내고 있다는 점이 더욱 글러먹었다.
‘인격살인 공연을 한국에서 해서 망정이지, 미국에서 했으면 연기를 포기하는 배우들이 속출했을지도···’
이건 데렉의 생각이었다.
근성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자신조차도, 유명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가끔은 의욕을 잃을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럼 다시, 연습 시작할게요.”
민성을 마지막으로 이 ‘syncronization(*동조화)’ 작업이 끝났다.
이제 이틀 후면 시작될 공연을 향해, 마지막 박차를 가할 때였다.
*
“자기, 진짜 신유명이랑 친한가봐.”
“하하, 아니야. 걔가 속이 깊어서···”
“나 정말 자기랑 결혼 잘했어. 우리 남편이 최고야.”
육아 스트레스로 한껏 예민해졌던 아내가, 나긋하게 웃으며 팔짱을 낀다.
남편이 최고라는 이유가 의 공연티켓을 구해서라는 것이 조금 비참했지만, 오랜만에 밝게 웃는 아내의 얼굴에 준한의 가슴이 콩콩 뛰었다.
‘유명아, 고맙다.’
성공하면 공연티켓이나 보내달라고 했던 말을 신유명은 이번에도 지켰다.
초대석 수가 제한되어 있어 초연에 초대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대신 여러 배우들과 함께하는 후반부의 첫 공연 티켓을 준비했다는 자필 편지까지 곁들였다.
그것을 본 사준한의 아내 민수정, 다른 이름으로 ‘갓네임드 골드회원 계같은인생’은 편지를 액자에 넣어 신주단지처럼 모셨다. 남편을 바라보는 얼굴에 존경심이 가득 깃든 것은 물론이었다.
‘오늘은 서류신도 볼 수 있겠네.’
한 때의 후배와, 한 때 창천의 라이벌이었던 배우가 같은 무대에 오른다.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무대에.
인생이 이렇게 갈릴 수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솔직히 나도 운만 좋았으면, 저렇게 되는 거 아니냐, 쓰벌.
창천 모임에서 최철주를 만날 때면 준한은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어느 중형 극단에 들어가서 조연급 배우로 활동 중인 철주는, 신유명과 서류신이 줄을 잘 탔다며,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헛소리를 해댔다.
결코 그런 착각을 하고 싶진 않았다. 한심하기 그지없어 보였으니까.
“자기는 후회 안해? 우리 유명이도 서류신도 알던 사이라며. 저렇게 잘 나가는 걸 보고 있으면, 그 때 연기 계속할걸 하는 생각도 들 거 같은데.”
“전혀. 한 때 같은 공간에 있었다고, 재능도 비슷한 건 아니지.”
아내의 질문에, 준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취업 안 했으면 당신 못 만났잖아.”
지친 아내의 얼굴에 꽃같은 웃음이 피어났다.
서비스 멘트인 걸 알면서도, 여자들은 이런 것에 녹는다는 걸 아는 남편이 기특하다. 그러고 보면 남편이 학창시절에 연극을 하길 잘 한 것 같다. 감정 표현이 풍부하거든.
“아, 시작하나봐.”
“그러게. 연극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그치?”
조명이 어두워진다.
무대를 가득 채운 1700명의 관객들은, 저마다의 기대를 담고 조명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불이 밝았을 때, 관객들은 유명 혼자가 아닌, 네 명의 배우들이 함께하는 인트로를 볼 수 있었다.
‘아아···’
화려한 서막이었다.
274 함께하는 연기
커다란 시계가 무대 위에 서 있다.
사람 키의 세 배는 될 것 같은 시계는, 군사용으로 쓰이는 것 같은 24시간 시계이다. 가장 상단에는 24, 이와 마주보고 있는 하단에는 12가 쓰여 있다.
이 커다란 시계의 앞에 설치된 높낮이가 각기 다른 철골 구조물 위에는, 세 사람이 서 있다.
24-8시를 가리키는 우상단의 공간에는, 짙은 스모키 화장을 한 아름다운 여자가 등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요염한 옆태를 드러내고 있다.
8-16시를 가리키는 하단 중앙에는, 각진 수트에 은테 안경을 쓴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반듯하게 정자세로 서 있다.
16-24시를 가리키는 좌상단의 공간에는, 분홍색 후드티가 새하얀 얼굴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부드러운 갈색머리의 남자가 양 무릎을 안고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설수연.
도효준.
서류신.
이미 인격살인 영화 개봉이 한 달이 지나, 오늘의 관객들은 모두 영화를 본 상태였다.
아직도 티켓난이 극심하다고는 하지만, 연극표를 구할 정도의 열성 관객들이 영화표를 못 구했을 리는 없다.
그래서 관객 모두는, 이 그림의 의미를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캐스팅이 이렇게 되었구나···!’
저 여성이 표현하는 캐릭터는 민성. 그런데 저 여성은 원래 고다인 역을 연기하던 설수연이다. 고로 고다인은 다른 사람이 연기할 가능성이 높다.
이 다음의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다인 역은 데렉 맥커디이겠구나···우와.’
그 데렉이 다인을 어떻게 연기할까.
그런 기대는, 저 세 배우가 연기할 민성, 현성, 은성의 연기만큼이나 가슴을 뛰게 했다.
잊어버린 어떤 과거를 자극하는 듯이 예리하고 서정적인 음악이 흐르는 동안, 거대한 시계의 시침은 한바퀴를 돌았다.
12시에서 8시를 움직이는 동안엔 민성만이 움직였다. 그녀는 느린 음악에 맞추어 천천히 춤을 췄는데, 그 뇌쇄적인 라인에, 관객들은 시침이 움직이는 것을 애닳아하며 그녀의 움직임을 좇았다.
8시가 정확히 넘어가는 순간, 민성의 춤이 정지 동작처럼 멈추고, 현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유명이 연기한 신현성보다 조금 더 날카롭고 예민해보이는 남자는, 아주 잘 훈련된 연설가처럼 정제된 움직임으로 무대를 지배했다.
시침이 16시를 넘어가자, 현성이 멈추고 은성이 기지개를 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많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슬픈 표정, 기쁜 표정, 걱정하는 표정, 행복한 표정. 본성이 다정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풍부한 표정의 향연에, 관객들은 금세 이 인물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계가 한 바퀴를 돌아 24에 가까워지면서, 음악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대신 둥- 둥- 하는 북소리가 점점 커지며, 세 인격은 동시에 가운데로 시선을 돌렸다.
쾅-
커다란 소리가 나며, 시계 중앙부가 뜯기듯 열렸다.
쿵쿵쿵쿵쿵- 쿠웅-
어지럽고 격한 소리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기듯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서서히 웅크린 몸을 펼치는 남자. 그것을 보고 있는 현성, 은성, 민성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바뀌었고,
남자는 시계의 중앙에 서 무표정하게 관객을 내려다보았다.
관객들은, 그 찰나의 표정에 압도당했다.
*
1막 2장.
세 사람이 한 명을 내려다본다.
누워있는 것은 유성.
나머지 세 명의 거주민은 그를 내려다보며 갑론을박을 나누고 있다.
“꽤 오랫동안 안 깨어나네. 우리와는 달라.”
“지금 처리하자니까.”
“안 돼. 좀 더 지켜보자, 아직 어린애잖아.”
“그러다가 협조가 불가능한 녀석이면? 그 때가서 죽일 수 있겠어?”
묘하다.
분명 덩치도, 성격도, 말투까지 다른 인격들인데도, 관객들은 그들이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마치 형제자매들을 보듯이.
그런 인상을 주기 위해 그들은 일부러 특정한 습관들을 맞췄다.
생각이 길어질 때 말머리를 채우는 감탄사의 종류, 대사의 어떤 부분에서 숨을 쉬어 가는지, 놀랄 때 어떤 안면근육을 사용하는지. 보통사람들은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작은 습관들을 맞추기 위해 그들이 해온 연습들을, 관객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리라.
그렇기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닮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좀 더 대사가 길어지면서 개개인의 캐릭터가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미 영화를 본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유명이 연기한 캐릭터와 그들의 캐릭터를 비교하게 되었다.
도효준의 현성은 신유명보다 조금 더 날카롭다.
설수연의 민성은 신유명보다 좀 더 요염하다.
서류신의 은성은 신유명보다 조금 더 표정이 다채로웠다.
다양한 배우들과 더불어, 좀 더 컬러풀해진 캐릭터들.
유명이 혼자 연기한 인격살인이, 마치 명인이 그린 수묵화처럼 섬세한 필치와 명암으로 세상을 깊이깊이 그려낸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인격살인은 색깔을 한껏 사용한 수채화처럼 넓고 다채롭게 세계를 표현했다.
그리고 유명의 유성이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색채들이 깊어진다.
신유성이라는 압도적인 존재가 가져오는 무거운 긴장감이, 다채롭게 무대를 채운 색깔들에 명암을 부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조합이···’
명인이 최고의 장인들을 지휘해가며 거대한 캔버스를 채우듯이, 공간이 채색되어 간다.
영화와 다르게 1,2장에서 네 인격간의 밸런스를 먼저 보여줘버린 것은 의도한 한 수.
관객들에게 그 화려한 조합을 제대로 각인시켜둔 후, 다시 놀래킨다.
그 각인을 활용하여.
*
“너 10시타임 같이 좀 안 뛸래? 너만큼 분위기 살리는 디제이가 없다. 피크타임 아닌 대신 페이는 더 올려줄게.”
“싫어요.”
“야, 좀. 생각은 해 보는 척 하고 거절해라.”
“저 딴 데로 가요?”
1막 3장. 클럽.
유명이 연기하는 민성을 보고, 관객들은 순간 당황했다. 영화에서의 민성과는 느낌이 무척 달랐기 때문이다.
-후반부 연극은 영화나, 전반부 연극과는 설정이 달라요.
-어떻게?
-일단 데렉이 다인이잖아요. 원래 다인은 여자이지만, 연극에서의 다인은 남자죠. 그에 따른 여러가지 설정들이 바뀌어야 해요. 필요하면 대사도 조정할 거구요. 마찬가지로, 인격들의 세부설정도 달라진다고 봐야죠.
-그럼 민성이는···
-맞아요. 수연이가 민성을 연기하니까, 민성의 인격은 여성이에요. 실제로 다중인격 환자 중 인격들간 성별이 다른 경우는 흔하니까요.
그래서 수연이 연기하는 민성의 인격은, 여성이 되었다.
유명의 연기에, 미묘하게 민성의 여성성이 묻어난다.
그리고 클럽에서 춤추는 씬에서의 동작. 첫 장면에서 수연의 선과 닮은 동작들 사이사이에 흘리는 눈빛은…
‘와…진짜 아까의 설수연이 신유명한테 들어간 거 같아…’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수연의 민성이 유명의 민성에게서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믿기 힘들게 감탄스러우면서도, 굉장히 흥미로운 포인트이기도 했다.
관객들은 같은 몸 안에서 설수연의 민성, 도효준의 현성, 서류신의 은성을 왔다갔다하는 신유명의 연기에 빠르게 홀려갔다.
그리고 데렉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머피. 신현성입니다. 상담을 요청하셨다구요?] [당신, 이 쪽에서 꽤 권위있는 연구자라고 하더군요. 뭐, 내가 궁금한 쪽은 댁의 지식보다는 영혼 쪽이지만.] [영혼요?]사실 데렉은 자신의 대사를 한국어로 모두 암기하고, 연습을 거듭해 자연스러운 발음까지 구현해 내는데 성공했다. 놀라운 연기 강박증이었다.
하지만 그걸 자랑스럽게 내보인 날, 유명은 일초도 고민하지 않고 커트했다.
-아뇨, 영어로 가죠.
-왜! 설마 내 발음이나 억양이 아직 부족한가?
-아뇨. 대단해요. 이번에는 대본의 대사들만 연습한 거겠지만, 나중에 한국어를 배우시더라도 정말 자연스럽게 잘 할 것 같아요. 하지만 데렉의 한국어가 완벽한만큼, 관객들은 놀라서 거기에 정신이 팔릴 거예요.
-아···
-고다인의 설정만큼, 머피 맥의 설정도 좋아요. 다인은 추천을 받고 현성을 찾아왔지만, 머피는 티비와 동영상으로 현성을 보고, 현성 속에 있는 여러 인격에 흥미를 느껴서 직접 찾아왔죠. 저는 새롭고 매력적인 설정으로 연기하는 데렉이 더 보고 싶어요.
-괜히 연습했네, 젠장···
데렉은 툴툴대면서도 유명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그가 완성한, 신무성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인물, 머피 맥은 데렉 맥커디의 존재감만큼이나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최근에 ‘가정’에 큰 변화가 있었군요.] [저희 가족요? 별 일 없습니다만···] [아뇨, 방이 세 개 있는 집이요. 새로운 세입자가 생겼군요. 불청객이네.] […!] [그런데, 세상이 그래요. 같은 세입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알고보니 집주인일 수도 있단 말이죠···]알 수 없는 힌트를 뿌리고 사라지는 머피 맥과, 무너진 질서에 망가져 가는 인격들.
사건이 중첩되고, 감정이 켜켜이 쌓이며 무대는 클라이맥스로 달린다.
관객들은 입을 벌리고, 이 새로운 세계에 푹 빠져있었다.
*
엔딩.
유명은 류신과 마주보고 섰다.
갈 곳이 분명한 시선이 기껍다. 자신만큼이나 뜨거운 열정을 담은 눈빛이, 제 시선의 종착지이다.
영화 촬영하는 4개월 내내, 유명은 칼날같은 타이밍의 싸움을 해 왔다.
전반부 연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리 녹음해놓은 자신의 목소리와 합을 맞추어야 했다.
이미 그런 계산을 하면서도, 그에 방해받지 않고 연기에 몰입하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생생해···’
지금 자신의 연기 상대는 살아있다.
혼자 네 명을 모두 연기할 때처럼 완벽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어떤 변화구를 던져도 받아낼 상대.’
혼자 연기할 때와는 다르다.
현재의 감정에 몰입하여 내키는대로 애드립을 치더라도, 반드시 응해줄 거라는 신뢰가 있는 파트너.
그렇기에 신은성을 맡길 사람은, 서류신밖에 없었다.
고오오오-
거대한 벽들이 천천히 회전하고, 하늘에서 진자가 흔들리는 무의식 속에서, 유명은 류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반응하는 것은 은성이었다.
“여기 있었구나, 은성아.”
“결국…나도 죽이려고!”
“아니야. 나와 함께 돌아가자. 나는 네가 필요해.”
“싫어. 네가 다 죽였잖아.”
“내가 죽인 게 아니야!!”
은성의 눈이 펄떡댄다. 유성은 회유하고, 진실을 밝히고, 설득하지만, 은성의 고집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체념했던 자신의 은성보다, 좀 더 발악하는 듯이 슬퍼보이는 서류신의 은성.
그것을 보고, 갑자기 그런 마음이 동한다.
네가 고집을 부린다면, 묶어서 강제로라도 끌고 돌아가겠다는 생각.
타앗-
“으윽…이게 뭐 하는 짓이야!!”
“돌아가자고.”
“그냥 죽이라고 했잖아!”
“어차피 나는 욕망을 주체 못하는 놈이라며? 그러니 그냥 내가 하고싶은대로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