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88
“그리고 휴식기 동안, 최대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싶어요. 행사든 인터뷰든 뭐든요.”
“음…인격살인 관련해서, 연극 끝나기만을 기다려 잡아놓은 일정들이 몇 개 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3월 중순부터 최대한 피해주시면 돼요.”
“오케이. 접수.”
그렇게 유명은 미호와의 연습에 집중할 시간과 장소를 마련했다.
싱글싱글 웃는 유명을 보고, 유석이 수상쩍은 듯 묻는다.
“왜 그렇게 신났어요? 뭐 좋은 일 있어요?”
“아…아닙니다.”
유명은 부정하면서도,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좋은 일이라···’
유명은 다시, 전날 밤을 떠올렸다.
279 내로남불
전날 밤, 현신화한 모습과 인간화된 육체를 유명에게 확인시켜준 후, 미호는 다시 구미호의 모습으로 돌아왔었다. 아무리 계약자라고 해도 오래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라며, 연습할 때나 다시 현신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몇 가지 제약조건을 더 알려주었다.
녹화는 안 된다. 귀의 현신화한 모습이 세상에 기록되는 것은 너무 커다란 역리이니까.
연습 중 다른 사람이 보는 것도 안 된다. 계약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의 현신한 모습을 보게 되면, 선계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공연을 못 하게 막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아마도···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은 나를 잊을 거당.}
‘…뭐?’
{귀가 현신한 모습을 수백 수천 명이 보게 되는 건 순리에 크게 위배되는 거니까, 선계에서 순리 보정에 들어갈 거당. 좋은 공연을 봤다는 느낌 정도는 남겠지만, 나라는 존재는 아마 기억에서 사라질고, 네 단독공연으로 기억하게 되겠징.}
‘어떻게···’
유명의 말문이 터억 막혔다.
극을 보여준다. 그것만으로 미호는 생기의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그 극이 심지어 기억에조차 남지 않는다니. 그럼 그 정도의 손실을 감수할 필요가···
{있당.}
‘……’
{공연은 분명 그 순간만으로도 가치가 있당. 너도 알지 않냥.}
무대 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 관객들의 호흡과 반응이 피부로 느껴지는 마법같은 시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께 무대에 선 배우와의 교감.
아무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유명과 함께 무대에 서볼 수만 있다면.
미호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명도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자신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럼, 대본은 뭘로 할까.’
{…최대한 ‘인간적인’ 각본이면 재미있을 것 같당. 인간의 모순과 갈등, 인간만이 갖고 있는 감정의 배리에이션을 미묘한 것에서 격렬한 것까지, 모조리 다.}
혜호는 생각했다.
이제야말로 더 깊은 연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 연극, 드라마… 형태에 따라 이름은 다르지만,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
인간을 줄곧 보아왔지만,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유명을 만나고, 스스로에게도 인간다운 감정이 개화한 지금이라면.
‘미호가 써 줄 거야?’
{같이 쓰장.}
‘우와, 진짜?’
유명의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퀄리티라면 이미 세계사적으로 검증된 미호의 대본. 그것을 직접 함께 만들어 볼 수 있다니.
‘그럼 일단, 엑스트라는 못쓰겠네.’
{그렇징.}
‘그리고 메인 배역은 남자 두 명?’
{왱?}
미호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묻자, 유명이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미호가 아- 하고 깨닫는다.
{참…넌 본 적이 없징.}
‘…뭘?’
다시 한 번 은빛 안개가 번졌다. 그리고 이번에 현신한 미호는···
“흐앗···!”
은빛이 영롱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는 같다.
하지만 깎아놓은 듯하던 콧날이 이젠 빚어놓은 듯 고운 곡선을 그린다. 긴 눈매가 살짝 올라가 있는 것은 비슷하나, 눈썹이 좀 더 곱디고운 모양으로 둥글려 있다.
그리고…꽃잎이 묻어난 듯한 입술.
분명, 여성이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넋을 잃고 그저 쳐다보게 되는 여성.
“이게 여성체다. 현신의 난이도는 차이 없이 동일하니까, 배역이 꼭 남성일 필요는 없어.”
울림은 곱지만 새침한 말투는 분명 미호다.
유명은 한참이나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구미호. 인간을 홀려 간도 쓸개도 빼먹는다는 전설적인 귀물. 홀리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이 존재들의 마력적인 매력.
어째서 천제가 미호의 어머니에게 반했는지, 유명은 절실히 깨달았다.
*
{반했냥?}
‘…어?’
미호가 다시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오고도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유명은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지금의 미호를 보고는 가슴이 뛰지 않는 것을 보니, 반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봐서 잠시 눈 앞이 멍해졌을 뿐이다.
‘너…진짜 엄청 예쁘구나···’
{남성체일 때도 예쁘긴 마찬가지일텐데, 여성체 쪽 반응이 훨씬 격렬한뎅?}
‘흠흠.’
유명이 잽싸게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그럼 남녀의 제약은 없네, 그렇지?’
{그랭.}
‘그럼 1인 2역은 어때? 남성체와 여성체를 모두 사용해서.’
호오-
미호가 동그랗게 눈을 뜬다.
재미있는 생각이다. 여성배역과 남성배역을 함께 한다라···
일단 다룰 수 있는 감정의 배리에이션이 넓어질 것이다. 사랑, 우정, 배신, 질투, 그 외 다양한 인간적인 감정들.
Mimicry나 인격살인같이 깊은 메세지의 극도 좋지만, 단 한 번의 기회라면, 자신은 좀 더 인간적이고 통속적인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인간사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사랑과 애욕과 우정과 배신. 인간의 본질에 맞닿아 있는 적나라한 감정들.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머리 속을 헤집기 시작한다.
{남매.}
‘좋아. 둘은 닮았으니까, 남매라는 설정은 좋은 것 같아. 그럼 내 배역과의 관계는 여성 쪽은 연인, 남성 쪽은 친구?’
{좋아. 아주 통속적이당. 그럼 너와 그 둘의 관계는 삼각관계냥?}
‘어…근친상간은 좀 위험하지 않아? 그리고 네 몸은 하나뿐이니 남성체와 여성체가 함께 연기할 순 없는 거 아냐?’
{아참…그렇징. 그러면···}
미호가 눈을 내리뜨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반짝 뜬다.
{너는 왕.}
‘왕?’
{응. 그리고 나는 재상과 그의 여동생 무희.}
‘오···’
유명이 A4지를 꺼내서 삼각형의 꼭지점에 세 배역을 적어 넣는다.
‘이렇게 세 사람을 놓고 생각해 보자. 그럼 왕과 재상이 친구?’
{응. 재상은 왕에게 여동생을 바친당.}
‘여동생을…바쳐? 그럼 친구관계가 아니잖아. 군신관계?’
{그게 포인트징.}
미호는 왕에서 재상을 향하는 화살표를 그어보라고 한다. 유명은 삼각형의 한 변을 따라 화살표를 그렸다.
{우정.}
유명은 미호가 불러주는대로, 화살표 위의 여백에 ‘우정’이라는 글자를 적는다.
{이번엔 반대로 화살표를 그려봐랑.}
‘이렇게?’
{그랭. 거기에 들어갈 말은, 증오당.}
‘둘의 감정이…다르네?’
{그게 포인트당.}
그게 포인트···?
{인간들이 재미있는 부분이, 서로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는 거징.}
유명이 움찔한다.
웃는 낯을 하고 속으로는 비수를 가는 사람. 화난 낯을 하고 속으로는 비소를 짓는 사람. 오래동안 알고 있어도 사람의 속을 모르는 경우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래서 네가 좋당. 너는 겉과 속이 동일하니깡. 하지만, 인간의 그런 복잡한 감정과 관계들이 여러가지 이야기의 원천이징. 왕은 재상을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재상은 왕이 자신을 입으로는 친구라고 부르면서 실제로는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한당. 그게 첫 번째 괴리당.}
‘오오···’
그의 입에선, 재밌는 아이디어가 화수분처럼 뿜어져 나온다.
유명은 미호의 말을 잽싸게 받아적는다. 그리고 묻는다.
‘신분이 다른데, 둘이 친구가 된 연유는 뭘까?’
{음…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당. 일단 디테일은 나중에 짜고 메인스토리부터 잡장.}
‘오케이. 그럼 왕과 무희의 관계는? 이 쪽도 왕은 사랑하는데 무희는 왕을 증오하는 걸로 갈 거야?’
{아니, 둘은 서로 사랑하기는 한당.}
‘그러면…?’
{거긴 다른 종류의 감정적 괴리를 표현할 거당. 으음, 그래. 타이밍, 혹은 깊이의 괴리라고 하장.}
‘아…설마!’
유명은 왕과 무희를 연결하는 쌍방향 화살표에 둘다 ‘사랑’을 적는다.
하지만 앞 쪽에는 여백을 둔다.
그 여백에 유명이 다시 채워넣은 것은, 빠른과 느린, 그리고 얕은과 깊은.
미호가 씨익 웃으며, 유명에게 주문한다.
{의미도 설명해 보겠냥?}
‘동일한 감정이라고 해도, 더 마음이 빠르게 깊어진 사람이 있고, 느리게 깊어지는 사람도 있지. 이 타이밍이 어긋나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심지어 그 타이밍이 맞아서 만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감정의 깊이는 결코 똑같을 수 없어. 특정 시간에 두 사람의 감정의 단면을 잘라보면, 그 크기는 언제나 차이가 나게 돼.
같은 종류의 감정이라고 해도, 그 타이밍과 깊이는 절대 같을 수 없다. 이게 두 번째 괴리, 맞아?’
연귀는 자신의 말을 바로바로 이해하는 영민한 제자에게 감탄했다.
그가 올~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유명은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여자는 무희야?’
{내가 춤을 잘 춘당.}
헉-
자신도 모르게 큰 숨이 뱉어졌다.
아까의 그, 보기만 해도 눈이 멀 것 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무대 위에서 춤을 춘다고…?
조명도, 객석의 의자도, 공기까지도 숨죽이며 그 춤을 지켜볼 것이다.
‘…그거, 꼭 인트로로 넣자.’
{그랭.}
도입부에 대한 이의없는 합의가 끝나고, 삼각형의 마지막 변이 남았다.
재상과 무희. 오누이의 관계.
‘여긴?’
{거긴 그냥…어떤 감정적 괴리까지는 아니공, 처음엔 무희도 재상과 같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이 중간에 사랑으로 변하는 데서 오는 감정적 갈등? 재상은 여동생에게 배신감을, 여동생은 재상에게 죄책감을 느끼면 어떨까 싶은뎅.}
‘으음…가능하면 괴리의 마지막 한 변으로 완성하면 좋을텐데···’
유명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무릎을 탁 친다.
‘사건!’
{무슨 사건?}
‘무희의 감정이 복수심에서 애정으로 변하는 계기가 있을 거 아냐.’
{그렇겠징.}
‘그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재상과 무희의 반응이 완전히 다르면 어떨까?’
{…?}
알쏭달쏭한 유명의 말에, 미호가 귀를 더 쫑긋 세운다.
‘예를 들어, 왕이 무희를 위해 어떤 일을 벌이는데, 같은 사건을 보고 재상은 왕을 더 혐오하게 되고, 무희는 왕을 사랑하게 되는 거지. 사람들은 똑같은 일을 봐도, 자신의 득실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이잖아. 그래서 이득과 손해, 좋고 나쁨, 옮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기도 하고.’
{오오, 내로남불 말이냥!}
미호가 신나게 소리치자, 유명이 쿨럭- 하고 기침을 토했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어찌나 인간계의 속어를 잘 알고 있는지…이게 다 연속극 때문이다.
‘어…비슷해. 같은 사건이 터졌을 때 입장차에 따라서 반응이 달라지는 인간들의 괴리를 마지막 변으로 하면 어떨까 싶어. 배신감과 죄책감은 그로 인한 결과적인 감정으로 표현하면 어떨까.’
{컁, 제법이당.}
그렇게, 이야기의 흐름이 꿰어져 갔다.
이렇게 같이 대본 얘기, 무대를 만들 얘기만 해도 즐거운데, 함께 연기를 한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연기에 미쳐 있는 인과 귀의 이야기는, 밤새 끝나지 않았다.
*
그러고 난 다음 날에 유명은 문유석을 찾아갔던 것이었다.
휴식기와 연습실을 성공적으로 얻어낸 후, 유명은 유석의 눈을 피해 굿엔터의 빈 연습실 하나에 들어갔다. 전화할 곳이 있었다.
RRR-
[헉, 신유명 배우 아니십니까!]“안녕하세요, 관장님.”
유명이 연락한 상대는, 바로 혜전당의 관장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다른 공연 계획이라도?]“네, 맞아요. 공연계획이 있는데, 이번에는 최대한 혜전당 수전당을 섭외하고 싶어요.”
[오오! 저희야 대환영이죠. 혹시 공연일정이 언제···?]“가능하면 올 5~6월중이면 좋겠는데요.”
지금이 3월 초. 5~6월 중에 올리게 되면, 준비기간은 2~3개월.
이것은 미호가 제시한 시간이었다.
짧다면 짧지만 유명과 미호라면, 그들의 형용하기 어려운 경지의 연기력과 집중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헉…인격살인 연극 끝난 게 얼마 전일텐데, 벌써 다시 공연을 하신다구요? 아, 혹시 인격살인 반응이 너무 좋아서 재공연하시려는 건가요?]“그건 아니고, 개인적으로 올리고 싶은 작품이 있습니다. 단독공연이에요.”
[오오. 그게 뭐든 꼭 저희가 올리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5~6월엔 수전당 예약이 풀로 차 있어요. 시간을 한 8월 이후로만 잡을 수 있으면 어떻게든 넣어볼텐데···]“하루도 없나요?”
유명의 이상한 질문에, 관장이 되물었다.
[하루요?]“네, 하루면 되는데요.”
[공연이 하루짜리인가요? 그렇다고 해도 무대 세팅과 조명음향 등 생각하면 공연일 전에 최소 3~4일은 있어야 하잖습니까.]“아뇨. 따로 무대 셋업이 없을 거에요. 조명도 최소한만 할 거구요. 당일 오전에 세팅하고 오후에 공연해도 됩니다.”
다시 한 번, 전날 두 사람의 대화.
‘그럼 무대는 어디로 할까. 아무래도 생기의 손실을 생각하면 좀 작은 곳으로 해야···’
{혜전당 수전당. 그 때 관장이 네 공연 올릴 일이 있으면 최대한 협조해 준다고 하지 않았냥.}
‘그렇긴 한데…거긴 3천석인데, 네게 부담가는 거 아니야?’
{괜찮당. 딱 한 번인데, 최고의 무대에서 연기하고 싶당.}
유명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혜전당에서 안 된다고 하면···’
{아마 될 거당. 딱 하루잖냥. 잡혀있는 공연들 사이의 중간에 하루만 빼면 되니깡. }
‘그래도 무대 세팅 기간도 필요하고···’
{괜찮당. 연기를 정말 잘 하면, 꼭 무대와 조명의 도움이 없더라도, 보는 것만으로 그 세상에 빠져들게 만들 수 있으니깡.}
그 말에 유명의 마음이 어찌나 설레었던가.
아무것도 없는 무대에서 연기해도 주변 배경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는 얘기는 자신도 들어보았던 바이지만, 미호가 얘기하는 수준은, 그런 정도가 아닐 것이다.
‘미호는 정말 그런 연기를 하고, 나에게도 그런 연기를 요구하겠지.’
생각만 해도, 짜릿한 전율이 온 몸을 스쳤다.
그 기분을 돌이키며, 유명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정말로 딱 하루면 됩니다, 관장님.”
[어…하루는 있죠. 공연들 사이사이에 그 정도 텀은 있습니다. 아니, 이틀까지도 만들 수 있어요.]“좋네요, 부탁드릴게요. 아참 이건 대외비로 진행하는 건이라, 직전까지 아무도 모르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부 후 전화를 끊은 유명은,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하나 쳤다.
5월 29일, 토요일.
디데이가 정해졌다.
280 미호의 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