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92
자신을 보고 나른하게 눈꼬리를 휘며, 그녀는 잠자리의 날개 한 장을 똑 뜯어낸다.
자신과 그녀 사이에서, 날개가 떼인 잠자리가 푸르르 요동친다.
붉고 힘이 센 꼬리가 바르작거리고, 곤충의 겹눈이 고통을 아는듯이 번들거리는 모습이, 실제인 양 자신의 뇌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데도, 왕은 살로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마치, 거대한 거미줄이 잠자리와 자신을 함께 칭칭 동여매고 있는 것 같다.
하아···
지익-
또 한 장의 날개가 사정없이 뜯겨나간다. 이번에는 밑동부터 깔끔하게 떨어져 나가지 않고, 중간쯤에서 지익 찢겨나가 버렸다. 마임만으로 그런 디테일까지 살릴 수 있다는 것이 경악스럽기도 하지만, 그보다는…숨이 막힌다. 그녀가 찢고 파괴하려는 것은 잠자리인가 나인가.
온 몸을 압박하는 거미줄의 무게를 견뎌내며, 자신의 입이 겨우겨우 열린다.
“뭘 하는 게냐···”
잠자리에게 맞춰져 있던 초점이, 순식간에 왕을 향한다.
그녀가 숨이 막히는 것조차 기꺼울 정도로, 달콤하게 웃는다.
“만인지상의 위에 앉았으니 대역죄이옵고, 제 남자의 뺨을 훔쳤으니 간통죄입니다. 능지처참에 처할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녀의 깜찍한 말과 달콤한 교태에 불쾌한 기분이 희석된다.
거미는 교미 중에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경악스러운 이야기지만, 잡아먹히는 수컷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잔혹하기만 한 일일까. 마지막에 그들이 지르는 것은 단말마의 비명이 아닌, 황홀한 교성이 아닐까.
그녀는 네 장의 날개를 모두 떼어낸 후, 몸통만 남아 바르작거리는 곤충의 꼬리를 즐겁게 흔들어댄다. 그 와중에도, 다른 한 쪽의 손은 왕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으며 애무하고 있다. 근거리의 곤충을 보는 눈은 잔혹한데도, 좀 더 원거리의 자신에게 번지는 눈빛은 자애롭게 느껴진다.
연인, 어머니, 소녀, 요부과 혼연일체가 된 듯한 그녀의 얼굴은, 그야말로 남자의 심장을 직격하고 있었다.
그녀가 곤충을 휙 던지고 이번에는 왕의 머리를 덥석 안았다.
그녀의 품에 파묻혀 머리가 보이지 않는 왕은, 마치 절반쯤 먹혀버린 것 같기도 했다.
뇌까지 거미줄에 칭칭 감겨버린 것일까, 암컷 거미가 내뿜는 호르몬에 취해버린 것일까.
그녀가 짓고 있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황홀한 표정을, 왕은 더 많이 보고 싶어졌다.
*
Panorama Shot 4.
수연은 뉴욕에 가 있었다.
Agency W의 정식 배우로 등록되면서 그녀가 처음으로 받은 일거리는, 연기가 아닌 모델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새널이에요. 수연씨의 아름다운 마스크와 고혹적인 분위기를 어디보다 잘 살려줄만한 곳이죠.”
LA 본사의 홍보부장 박진희가 내민 향수 기획안에, 수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에서 가장 콧대높기로 유명한 명품브랜드에서, 그녀에게 이미지 모델 제안이 왔다는 것이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새널이 동양인 모델을 안썼던 건 아니지만, 주로 ‘아시안 마스크’를 가진 모델에 치중해 있었어요. CF 촬영에 동양인 여배우를 쓰겠다는 건 파격적인 노선 변화죠. 신유명씨가 한국인이지만 세계적인 배우로 인정받으면서, 동양인 배우들의 운신 폭이 넓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구요.”
“어…제가 그런 비싼 브랜드에 어울릴지···”
수연은 스무 살까지 외부와 거의 단절되어 살았다.
이후에도 유명을 만나고 굿 엔터와 계약하기 전까지는, ‘가난하다’고 말해도 무방한 삶을 살았다. 배우로 뜨고 난 뒤, 그녀의 분위기와 마스크에 반한 브랜드들이 협찬을 줄지어 해오기는 했지만, 수연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의 상표도 잘 몰랐다. 조금이라도 빨리 유명을 따라잡기 위해, 연기에만 전념했던 지난 몇 년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새널은 알았다. 명품의 상징같은 브랜드였으니까.
그런 곳이 자신을 원한다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다. 자신이 그런 고급 브랜드와 어울릴 리가···
“당연히 어울리죠! 수연씨는 그냥 가만히 서 있어도 명품인데요.”
“어…아니에요, 부장님.”
차가운 인상에 조금 무서운 홍보부장이 과분한 칭찬을 하자, 수연은 깜짝 놀라 두 손을 저었다. 그 모습에…박진희는 조금 심쿵했다.
‘나 방금…치였나?’
그녀는 유명의 진성덕후였지만, 여성 연예인을 좋아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조금 알 것도 같다. 가만 있어도 빛이 날 것처럼 아름다운 여배우가,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도 모르고 움츠러든 모습을 보니, 맛있는 걸 사주고 좋은 걸 먹이고 싶은 삼촌팬같은 마음이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그녀가 스스로가 얼마나 멋진지를 알게 될만한 위치에 데려다놓고 싶은 마음.
“인격살인 때문에 지금 수연씨 주가가 엄청나요. 영화상에서 유명씨를 빼고 거의 유일하게 비중있는 인물이 고다인이니까요.”
“네에…정말 좋은 배역이었죠.”
“그 배역을 살린 게 수연씨에요. 고다인이 정말 매력적이니까 그 새널에서 이런 제안이 들어온거죠. 이 콘티 한 번 봐 보세요.”
박진희가 수연쪽으로 기획안을 좀 더 밀었다.
그것을 읽어 본 수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 이건···”
“다인의 다중인격적인 부분을 광고에 넣어서, 탑노트와 미들노트, 베이스노트를 표현한 콘티에요. 유명씨도 그랬지만, 수연씨도 다를 바 없어요. 배우를 모델로 쓴다면, 배우에게 어울리는 컨셉을 제시해라. 이게 우리 기획사의 기본 방침입니다.”
“너무 멋있어요.”
그 콘티는 광고라기보다는, 짧은 영화같았다.
광고라는 말에 움찔했던 수연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금도 들어오는 작품은 적지 않아요. 다만, 새널의 광고를 찍고 난다면, 수연씨의 주가가 급등하겠죠. 그 몸값을 배신하지 않을 연기를 해 줘야 해요. 자신 있어요?”
“…자신 있습니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는 자신없는 모습을 보이던 설수연은, 연기 얘기가 나오자 움츠러들지 않고 힘있게 답변했다.
그건, 타고난 것이 아니고 자신이 흘린 땀으로 만들어진 부분이니까.
그 모습에 박진희가 씨익 웃었다. 신유명의 후배다웠다.
“그럼, 미팅하러 갈까요?”
*
유명과 미호는 어느날 밤, 밖으로 나갔다.
미호가 데려간 곳은 사람이 없는 숲이었다.
수도권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빽빽하고 광활한 숲에, 두 사람은 마주보고 섰다.
달이 저물고 있었다. 반달에서 하현으로 넘어가는 달이 은은하게 내리쬐는 밤의 숲에서, 미호는 무엇을 알려주려는 것일까.
{관객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배경을 보여주려면, 실제로 네가 그 배경 속에서 연기해야 한당. 네가 주변 상황에 대한 이미지를 정확하게 가지고 있어야, 보는 사람들도 함께 그 풍경을 느낄 수 있는 거당.}
‘…응.’
이미 유명도 알고 있었다.
캐스팅보트의 ‘사이코패스 마틴’ 연기에서, 유명은 진열장에 쭈욱 나열된 한 개 한 개 인형들의 모습을 모두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정확하게 그들이 앉아있는 곳에 시선을 보냈고, 각각의 인형들이 다 개별적인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생생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당시 관객들은 마치 인형이 가득 찬 진열장이 보이는 듯한 착시가 들었다고 했었지.
{아주, 아주 세밀하게. 스케치를 하듯이 말이당.}
그 말과 함께, 미호는 재상 아덴의 모습으로 현신한다.
어깨까지 닿는 은빛 단발에, 부드러운 푸른 눈빛을 가진 남성이 유명을 향해 다정하게 웃으며 목례를 한다.
“전하, 그럼 나는 이만 물러갈게.”
장난스러운 말투.
어릴 때부터 보아온, 부드럽고 따뜻한 눈빛.
유명은 순식간에 그를 보고 흐뭇해지는 왕의 마음이 되고, 재상이 자신의 앞에서 빠져나가자 다시 관객으로 돌아갔다.
그는 밖으로 나와, 왕궁의 후원을 거닌다.
“벗이라…하하.”
기울어지는 달빛에 비스듬히 비친 재상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매서워진다.
그 목소리에 깃든 조소에 유명이 움찔한다.
이 연기는 분명, 만들어진 대본에는 없는 장면. 그렇다면 아마 미호의 즉흥연기일 것이다.
휘익-
그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자, 어딘가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검지 손가락 위에 앉는다.
아니, 고개를 마구 흔들어보자 새의 모습은 잔상같이 흐려지지만, 다시 재상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순간 분명 작은 새의 모습이 보인다.
갈색의 날개에 영리해 보이는 새까맣고 작은 두 눈. 그리고 발목에 매듭지어져 있는 종이.
재상은 한 손아귀에 새를 잡고, 다른 손으로 쪽지를 풀어내어 펼쳐본다.
“…드디어 준비가 끝났느냐, 살로메.”
아마도, 이것은 이 극이 시작되기 이전의 장면.
자신이 스파이로 침투한 것도 모자라 동생까지 이용하려 하는 비정한 재상은, 쓰리게 웃는다.
“어리석은 자여, 너의 어머니만 어머니더냐. 실수로 죽게 된 한 여인을 향한 네 애도의 값으로, 카타니아에선 십오만의 어머니가 죽었다.”
거기엔 평민이었던 재상의 어머니도 포함되었다.
유난히 아름다운 외모로 소문이 자자하던 두 남매는, 부모를 잃고 카타니아 공국의 정보국에 귀속되었다. 그들은 레플란의 왕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자태와 호감가는 말투를 교육받았다.
그 가면을 살짝 들어내자 콸콸 새어나오는 그의 증오는···
“내가 네 마음 속 공허를 채우리라. 오만으로 가득한 네 마음의 깊은 곳을 나와 살로메가 메우고 또 메워서, 네가 살 만하다 싶어질 때···!”
재상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삐이이이- 발버둥을 치는 새의 모습이 분명 보였다.
그는 그 새를 무심히 내려다보더니, 허공으로 날려보낸다.
“너는 죄가 없지.”
그렇다면 누군가는 죄가 있다는 말.
작은 새가 비틀대다가 겨우 균형을 잡고 파닥파닥 날아간다.
유명이 살짝 몸을 떤다.
분명 미호는 지금 연기할 때, 저 새를 보고, 쥐고, 날려보냈다.
잠자리를 쥐었을 때도, 새를 쥐었을 때도 그는 분명 그 대상을 보고 있었고, 그 이미지를 관객에게 온전하게 전이시켜 주었다.
연기를 끝낸 미호가, 유명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어디선가, 참 쉽죠? 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유명은 입술을 잘근 물었다.
*
“빈 무대에서 공연할 거에요.”
“뭐??”
김성진은 당황했다.
관장님이 신유명씨와 미팅을 좀 하고 오라는 말에 잉? 하는 기분으로 유명을 만나러 왔는데, 이 녀석은 더 황당한 말을 하고 있다.
“뭘 할건데?”
“연극이요.”
“연극을…빈 무대에서 공연한다고? 왜?”
“무대 세팅할 시간도 부족하고, 무대 없이 무대를 표현하는 게 이번 공연의 목표이기도 해서요.”
“흐음···”
이번 연극이 꼭 혜전당에서 공연되어야 하는 이유에는, 미호가 혜전당 수전당을 원했기 때문도 있지만, 김성진 때문도 있었다.
그의 무거운 입은 ‘천상연’ 사태 때 이미 검증되어 있다. 유명의 부탁을 받은 성진은, 지난 7년간 누구에게도 신유명이 천상연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아무리 무대를 만들지 않는다고 해도, 스탭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최소한 큐에 따라 조명과 음향을 온오프할 사람이 한 명은 필요하다. 그리고 이왕이면 조명 설비까지 도와줄 입이 무거운 사람. 김성진이 딱이었다.
“형, 그런데 좀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
“네 부탁이면 어떻게든 들어줘야지. 뭔데?”
시원시원한 그의 반응에 힘입어, 유명이 그 ‘어려운 부탁’을 꺼낸다.
“컨트롤박스(*공연 중 조명과 음향을 조절하는 공간. 극장의 제일 뒤쪽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다)엔 형만 계셨으면 좋겠어요.”
“음향은?”
“혹시 형이 같이 해 주실 수 없을까요? 조명과 음향 전환도 최대한 단순화시킬 거라 물리적인 어려움은 없을 거에요.”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데? 어려운 부탁이 그거야?”
조명과 음향 컨트롤러가 분리되어 있긴 하지만, 전환이 잦지 않다면 함께 컨트롤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유명이 조금 망설이다가, 한 마디를 덧붙인다.
“리허설할 때, 컨트롤박스 전면 유리를 가려두고 진행했으면 좋겠어요. 큐는 다 음향 큐로 맞춰드릴게요.”
이상한 주문에, 김성진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공연 전에 절대 보이면 안 되는 거라도 있어?”
“이유는 말씀드리기 힘든데…부탁 좀 드릴게요.”
꽤나 괴상한 주문이긴 하지만, 저 유명이 부탁하는 일이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285 예외적인 초청
Panorama Shot 5.
문유석은 성북동에 다시 방문했다.
불청객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렸던 첫 방문과 달리, 이번에는 정식 초청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도 대문이 양 옆으로 스르르 열렸다.
“왔느냐.”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흐음.”
회장은 할아버지라고 부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치는 것을 꿀꺽 삼켰다.
윤성 엔터가 유석에게 넘어가고, 로 사명을 변경한 후 수 개월간, 유석이 보여준 경영 솜씨는 놀라웠다.
할아버지가 아니라, 여전히 유엔터의 지분을 38% 보유하고 있는 최대주주로서 봤을 때도, 문유석은 무척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 주고 있었다.
“밥은 먹었냐.”
“네, 먹었습니다.”
(…와서 먹어도 되는데.)
“네?”
“아니다, 흠흠.”
문유석이 가져온 자료를 내밀었다.
그는 오늘 이 자리를, 유엔터의 최대 주주이자 자신과 거래를 받아들인 ‘태원의 회장’에게 실적을 보고하는 자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새롭게 투자에 들어가는 영화의 시장성 분석과, 효율성 떨어지는 사업부들의 구조개혁 방안, 향후 여력이 되는대로 확장할 사업분야 등을 깔끔하게 분석 정리한 자료들은 놀라웠고, 유려한 프레젠테이션도 인상적이었다.
회장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낸다.
“태원에는…정말 관심이 없느냐?”
“네, 없습니다.”
“어째서?”
한 번은 이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유석은 회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결심을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제 관심은 엔터 사업쪽에 있습니다. 태원에는 그 쪽과 관련된 사업이 전무하다시피 하니까요.”
“시네마가 있지 않느냐.”
“태원 시네마는 분명 잘 자리잡은 사업이지만, 백화점의 부속 사업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건 운영이 아니라 제작 쪽입니다. 좋은 배우를 발굴하고 좋은 작품을 제작하면, 세계 시장에 내 놓을 수 있으니까요. 터뜨리기가 어렵지만, 터지면 천장이 없는 시장이죠.”
“흐음···”
회장이 신음을 토한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세계 시장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아냐고 버럭했겠지만, 이미 세계 최고의 배우를 손에 쥐고 여러 번 실적을 낸 문유석이다.
고작 엔터 사업이 아무리 커봤자 태원그룹의 가치만 하겠냐고 일갈하고 싶지만…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아쉽구나···”
“명석 형이 잘 컨트롤하실 겁니다.”
“명석이…랑도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냐.”
정말 보통이 아니다. 볼 수록 탐이 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관심을 끄고 있던 사이에, 홀로 훌쩍 자라서 손자가 아닌 경영자로 자신의 앞에 섰다.
자신이 그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자격은 없었다. 그저 아까울 뿐.
“그 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얼?”
“저쪽 편을 들어주지만 말아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아예 제 편을 들어주셨더라구요.”
“어차피 승패가 빤하면, 이길 놈한테 빨리 붙어야 뭐라도 떨어지는 법이지.”
가르치는 것인지, 아부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투욱 뱉어놓고, 회장이 힐끔 눈치를 본다.
“그러니까…흠흠. 가끔 밥이나 먹으러 오거라.”
“…알겠습니다, 할아버님.”
유석이 호칭을 싹 바꾸어서 대답하자, 회장의 입가가 씰룩씰룩했다.
역시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
*
유석이 연습실로 찾아왔다.
미호는 황급히 푸른 형체로 화했고, 유명은 유석에게 자리를 권했다.
“어쩐 일이세요?”
“우리가 무슨 일 있어야 만나는 사입니까.”
“그건 아닌데, 뭔가 대표님 얼굴에 울분과 통쾌함이 섞여있는 느낌인데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유석이 땀을 삐질 흘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유명의 눈치는 점점 빨라지는 것 같다. 배우라 감정과 표정에 예민해서 그런걸까.
“그…아카데미상 있지 않습니까.”
“대표님, 전 진짜 신경 안쓴다니까요.”
“내가 신경이 쓰인다고요.”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영화상으로 알려진 아카데미상.
칸,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가 개봉 전의 영화들을 초청 상영하는 ‘영화제’인 것과 달리, 아카데미는 미국에서 상영된 영화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상식’이다.
“원래 비영어권은 외국어영화상밖에 안 주잖아요.”
“예외적인 사례도 있죠. 외국어 영화도 몇 번 작품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었어요.”
는 2009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탔다. 그 때도 유명이 남우주연상을 타지 못했던 것에 유석은 꽤 발끈했었다. 동양인이 아니었으면 유명이 무조건 탔을 거라며.
그리고 2010년 은 그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아시아권 영화라서,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10년쯤 더 지나면 아카데미의 아성이 깨지고, 비영어권 영화라도 작품성이 뛰어나면 본상을 주는 변화가 일어나지만, 현재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유석이 높아졌던 언성을 가라앉히며, 음흉하게 웃는다.
“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칸요? 칸에서 왜···?”
칸은 개봉 전의 작품들을 초청하는 ‘영화제’이고, 인격살인은 기개봉작이므로 해당사항이 없다.
“예외적으로, 비경쟁부문에 인격살인을 초청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영화와 연극을 함께 올리는 형태로.”
“영화와 연극을 함께요···?”
“영화와 연극을 동시에 함께 제작했다는, 영화사적으로 새로운 시도에 경의를 표하며, 그 놀라운 무대를 꼭 칸 영화제에서 만나보고 싶다는 진행국의 정중한 초청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유명의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영화와 연극을 동시에 올린다는 것은 자신의 아이디어였다. 그걸 인정해서 칸에서 예외적으로 인격살인을 불러 준다는 것을 들으니 반갑기 그지 없다. 자신의 작품을 그만큼 높게 평가하고 초청해 준 곳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칸 영화제라면 5월 중순에서 말. 혜전당 공연까지 시간이 너무 빠듯한데…
그 때 옆에서 미호가 속삭였다.
{재밌겠다, 가장!}
‘우리 공연이 5월 28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