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304
{어떻게 이것을…}
*
3개월 후.
짝짝짝짝-
커다란 박수가 울려퍼진다.
서정적이고 선이 고운 발레리나는, 무대 위에서 하얗게 빛나는 가련한 오데뜨를, 그리고 어둡지만 매력적이기 그지 없는 악역 오딜을 환상적으로 연기했다.
그 무대의 한 쪽 vip석에서, 세계적인 셀럽 한 명도 박수를 치고 있었다.
공연 후 백스테이지.
대기실에서 공연을 마친 무용수들이, 오늘 무대를 보러 온 누군가에 대해 떠들썩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발코니 쪽 봤어?] [신유명 아니야?] [그치? 내가 잘못 본 것 아니지? 무대 위에서 급 관객될 뻔 했네.] [세련아, 너 보러 온 거 맞지?]신유명이 세계적인 스타가 되면서, 그의 최초의 작품인 도 재상영을 거듭했다. 특히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관심을 가질만한 ‘발레리나 이야기’라, 발레단에서 단체 관람을 간 적도 있었다. 그래서 세련과 유명이 함께 작품을 찍은 사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세련이 웃으며 일어났다.
[응, 오래 알던 사이라 축하해주러 왔나봐.] [꺄악-! 혹시?] [그런 거 아니야. 내일 봐.]세련은 핸드폰을 확인하며 밖으로 나왔다.
지젤의 마르타 여왕을 맡았을 때 그는 캐모마일 꽃바구니를 보내왔고, 오늘 무대에는 드디어 공연을 보러 왔다.
무려 6년만의 만남이다.
빱-
가볍게 클락션이 울린다. 뒤돌아보니 차창이 내려가고,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추스르며, 세련은 반갑게 웃었다.
“유명아. 오랜만이네.”
“누나, 공연 잘 봤어. 정말…멋있더라.”
멋있기야 네가 훨씬.
이라는 말을 그녀는 꿀꺽 삼킨다.
오늘 자신도 멋있었으니까. 스스로 당당하도록 하자.
차를 타고 이동한 둘은, 세느 강의 하류에 있는 한적한 강변을 걸었다.
아주 길고 힘들었던 재활치료. 파리 오페라 발레단 합격. 이후에도 쉬지 않고 노력해 프리마 배역을 받게 되기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유명은 조용히 귀 기울여 들어 주었다.
“너는? 살로메가 엄청 화제였잖아. 그 뒤엔 뭐했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
그 말에 세련의 마음이 저릿한다.
혹시 그 베일 속의 여배우일까.
살로메 역의 배우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기자들이 유명에게 달라붙어 그녀의 소재를 캐내려고 했지만, 유명은 계속 함구 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역시…유명이 좋아하는 사람인 것일까.
“누나, 혹시 만나는 사람 있어?”
“어? 아니…나는 아직. 연습하느라 바빠서.”
“…나는 오랫동안 윤세련을 생각하며 힘을 냈는데, 누나는 내 생각 안 했어?”
텅-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세련의 발걸음이 덜컥 멈춘다.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연다.
“…그 때 보낸 초대장이, 나는 이제 터널을 빠져 나왔다는 신호였는데···”
“알아.”
“…!”
“하지만 나도 그 때, 터널 속에 있었거든.”
처음에 세련을 보낸 건 그녀를 위해서였지만, 돌아온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 시한부처럼 정해진 7년의 기한 때문이었다.
그 시간은 미호를 만나고 연기에 전념했던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쉽게 만날 수 없는 굴레이기도 했으니까.
이제야 그는 누군가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작이라면, 당연히 이 사람이다.
커다란 시련에도 꺾이지 않고 맞서 온,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이제 서로의 감정이 완전히 닿지 않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서로를 마주볼 기회는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나랑 만나볼래요?”
“…응.”
세련은 작지만 망설임없이 그 말에 답했고, 유명이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걸었다.
강을 따라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그 날 헤어지기 직전, 세련이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묻는다.
“기다리는 사람은···”
“아마 오늘, 올 것 같아요. 세 번 달이 기울었다 찼거든.”
유명의 묘한 말에 세련이 눈을 껌뻑거렸고, 그는 달처럼 환하게 웃었다.
밝디 밝은 대보름밤이었다.
*
유명은 세련을 데려다준 후, 다시 강변으로 나왔다.
한적한 강가의 펍에 앉아, 맥주 두 병을 시켰다.
한 병을 맞은 편에 놓고, 한 병을 홀짝였다. 마치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잠시 후 그의 옆자리에 모자를 푹 눌러 쓴 한 남자가 털썩 앉았다.
“잘 지냈냐.”
“…혜호.”
“너는 부르던대로 불러라.”
남자가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유명의 눈이 젖어 있었다.
“걱정했잖아.”
“미안해.”
정말 많은 걱정을 했다. 하지만 왜 그랬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라 해도, 함께 무대에 서기 위해 무엇이라도 버릴 수 있었을 테니까.
다만…자신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 힘겨운 상황에서 더 힘겹게 자신을 속였던 미호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릿하기는 한다.
치이익-
그는 병따개로 뚜껑을 따서, 맥주를 멋지게 마신다.
두 앞발로 맥주캔을 부여잡고 마시던 귀여운 여우는 이제 없지만, 아쉽지 않다.
그가 얼마나 연기할 수 있는 몸을 갈구해왔는지 알고 있으니까.
“캬- 이 맛이 그리웠지. 그런데 뭘 어떻게 한 거야?”
“응?”
“아버지와의 거래.”
유명은 그 날, 천제와 나눈 나머지 대화를 머리 속에 떠올렸다.
-그래서…이 영혼을 심을 육체를 내어달라?
-이왕이면 그의 현신체와 같은 외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쉽게 납득할 테니까요.
-영혼을 아기로 탄생시키는 것도 아니고, 명이 다 된 사람에게 불어넣는 것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육체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차피 역리를 감당하려면 다른 방법도 없지 않습니까.
-흐음···
-게다가 선계는 제게도 빚이 있지요.
선계를 압수 수색하는 과정에서, 유명의 생기가 잘못 주어졌던 사실이 드러났다. 그걸 무마하기 위해 졸속으로 유명의 지장을 찍으려 했던 사실도.
인세에서 계속 연기하기 위해 그 합의서에 유명이 도장을 찍어주기는 했지만, 선계의 비리가 모두 파헤쳐진 이상 그 합의도 무효화되었다.
인간 신유명은 선계와, 선계를 관리하는 천계에 보상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바라는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귀 혜호가 인간이 되어, 저와 함께 연기하며 살아가는 것.
-그 아이가 그걸 바라리라는 확신은 있느냐? 귀가 인이 되는 것은 격이 추락하는 것이다.
-네. 분명히 바랄 겁니다.
유명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의 마음을 저만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우리는 친구이고, 같은 배우니까요.
유명의 설명을 들으며, 혜호는 안타까워했다.
“어차피 그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을 일인데, 왜 보상을 포기해? 뭔가 다른 능력을 얻을 수도 있었을텐데.”
“거래가 아니었어, 나한텐.”
“……”
“손익을 따질 수 없을만큼 절박했다고.”
그 말을 들은 혜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그가 보이는 첫 눈물.
“고마워. 네 덕분에 천 년의 꿈이 이루어졌네.”
유명은 그에게 맥주병을 들어 보였고, 그가 그것을 부딪혀왔다.
챙-
맑은 소리가 났다.
세계가 그를 환영하는 것처럼.
“그런데 왜 남자가 된 거야? 현신체는 남성도 여성도 가능했잖아?”
“내가 그렇게 택했어.”
“왜?”
“살로메를 하면서 남녀간의 사랑연기는 진하게 해봤지만, 아덴-레오도는 아무래도 임팩트가 덜했잖아. 그게 아쉬워서?”
유명도 왠지 미호가 남성체를 택하리라고 생각했다.
그 아름다운 여성체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는 건 안타깝지만, 미호라면 여장을 하고서도 살로메를 기가 막히게 연기하겠지.
미호가 남은 맥주를 꿀꺽 삼키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가자.”
“어딜?”
“어디든 연기할 수 있는 곳으로.”
“좋은 생각이야. 여기 한 동안 머무를 생각이었어서 집 근처에 연습실을 구해놨지. 인간이 되어서 첫 연기는 뭘로 하고 싶어?”
“…지킬 앤 하이드 한 번 갈까?”
그는 유명이 회귀해서 처음으로 제대로 연기했던 작품을 입에 담았다.
유명의 몸에 짜릿한 기운이 감돌았다.
‘미호의 지킬, 미호의 하이드. 보고 싶다!’
“어서 가자!!”
보름달이 환하게 그들의 등 뒤를 밝혔다.
300 끝과 시작[완]
며칠 후, 파리 샤를 드 골 공항.
유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미호의 여권을 훑어보고 있었다.
[Greg Fox]“와…진짜 감쪽같네.”
“그야, 진짜니까.”
“며칠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의 호적이 홀랑 생긴 걸 보니까 어안이 벙벙하네. 선계 일 잘 하는구나···”
천계에서 미호의 육체를 만드는 동안, 천계의 지시를 받은 선계 사무국은 그를 실존하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문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낮선 이름과 국적을 훑어보며 유명이 물었다.
“그렉 폭스? 폭스는 혜호의 ‘호’에서 온 것 같고, 그렉은 뭐야?”
“은혜가 영어로 그레이스인데, 그건 여자 이름이라서 대충 비슷한 걸로 했다네.”
“어…응… 그럼 국적은 어떻게 정했어? 바하마는 어디지?”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지상낙원이라고 불리는 나라야. 아버지가 거기로 정하셨어. ”
“와, 좋은 곳에서 살라고 배려해주신 거?”
“아니, 거기가 세금이 없대. 세금이 무서운 거라면서.”
…많은 걸 배려해 주셨구나.
유명은 그 위대한 천제도, 자식 앞에서는 한낱 아버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명과 미호는 퍼스트 전용 라운지에서 수속을 마쳤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통로를 통과해, 보안 검색대 앞.
띡-
보안검색요원이 티켓을 찍고 여권을 펼쳐서 스캔시킨다.
유명과 미호는 동시에 숨을 죽였고,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티켓과 여권을 돌려준 순간,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때매 나도 긴장했잖냐.”
“그럼 긴장이 안 돼? 갑자기 위조 여권입니다! 하고 수갑 철컹철컹 채우면 어떡해.”
“선계가 그렇게 일을 허술하게 할 리가 있냐.”
“허술하게 하다가 내 지장 몰래 찍으러 온 적도 있잖아.”
티격태격-
눈물겨운 상봉이 언제였냐는 듯이, 며칠 사이에 그들의 사이는 예전같이 돌아가 있었다.
탑승이 시작되었다.
이제 각각 한 자리씩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그들은 맥주를 딴다.
“돌아가면, 꽤 정신없을 거야. 살로메 여배우가 누구였냐고 난리였거든.”
“하기야 ‘여배우’로 알고 있겠네. 아덴과 1인 2역이기는 해도 살로메가 워낙 강렬했으니까.”
“응. 살로메 배우 드디어 출현! 여배우가 아니었다! 이런 기사로 뒤덮이겠지. 왜 정체를 비밀로 했냐, 이제껏 활동은 왜 안 했냐, 그런 질문도 무수히 받을텐데, 생각해 둔 핑계라도 있어?”
“굳이 모두 대답할 필요가 있겠냐. 배우는 연기로 보여주면 되는 걸.”
“…정답이네.”
배우는 연기로 보여주는 것.
혹여 누군가가 미호의 과거를 억측하고, 갖은 유언비어를 퍼뜨린다고 해도 상관있으랴.
그의 연기를 보고난 후엔, 모두들 입을 다물고 말 것을.
“기대된다. 다들 널 보고 어떤 표정을 할지.”
“내가 아닌, ‘우리’를 보고.”
챙-
이번엔 미호가 먼저 맥주잔을 들었고, 유명이 잔을 맞부딪혔다.
*
호철은 홀린 듯 멍하게 미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명이 박수를 딱- 치자 그제야 어버버하면서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어…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림이 말을 한다.”
호철의 반응에 유명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게.”
“어어…외국 그림이 한국말을 너무 잘 하네요.”
“하하, 인사해. 그렉이야. 살로메를 연기했던 배우이고 내 친구.”
“네에···”
호철은 그들을 태우고 수원으로 가면서도, 백미러로 수십 번이나 뒷좌석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집에 도착한 후,
“유명아, 너 좋아하는 된장찌개…어머?”
“안녕하세요, 어머니.”
“어머머?”
혜호가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사실 자신은 이 집에 오래도록 함께 살았다. 쭈욱 살던 집에 두 발로 처음 걸어들어오고, 매일 보던 사람에게 처음으로 말을 거는 기분이 묘했다.
그런 소소한 인간의 ‘감정’들이, 인간의 형상을 갖추게 되자 훨씬 더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
“반가워요. 유명이가 친구 데려온다고 해서 그냥 먹던대로 차렸는데, 외국분인 줄 알았으면 다른 걸 준비할 걸···”
“아니에요, 저도 된장찌개 좋아합니다.”
“그래요? 다행이네. 유명아, 놀고 있어. 곧 아버지랑 지연이 올 거야.”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부엌으로 들어가신다.
‘이상하게 친근하네…저런 미남을 봤으면 기억 못할 리가 없는데···’라고 중얼거리시며.
유명은 미호와 마주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딩동-
그리고 신지연이 귀가했을 때,
미호가 성큼 다가서서 그녀를 와락 안으며, 이름을 불렀다.
“지연아!!”
“…뭐…어…신유명 이게 뭐야 설명해.”
유난히 지연을 좋아하던 미호는, 그녀는 자신을 처음 보는 상황이라는 것을 잠시 잊은 듯했다.
유명도 살짝 당황해서 어버버했고, 미호도 아차 싶었는지 한 발짝 떨어져서 변명을 했다.
“…안녕? 유명이한테 워낙 얘기를 많이 들어서, 내 동생같이 느껴져서···”
“오빠와 동생은 허그를 하지 않습니다!”
“나…나는 외국인이잖아.”
“신유명 뭐야, 이 CG를 오려낸 것 같은 존잘 외국인은 누구야, 빨리 설명하라고!”
외간 남자가 덥석 껴안아서 화가 난 줄 알았더니, 말투만 단호할 뿐 그녀의 표정은 몽롱하게 풀려 있다.
아참…쟤 얼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