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327
효준도 달려왔다.
그는 이번 시즌, ‘새로운 천재 기상학자’의 공개 캐스팅에 당당히 합격했다.
데카르도가 자신의 연구를 모두 폐기하고 사라졌지만, 릴은 그것을 되살리기 위해 양부에게 남아있던 자료를 빼돌리고 자신이 풀어낸 공식을 복기해낸다.
그리고 이 연구를 마무리할 다른 천재 기상학자를 찾는다. 자신의 ‘카드’로 활용하기 위해.
그 배역을 효준이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잘 하고 있지?”
“에이, 당연하죠. 예전의 내가 아니거든요?”
“흐음…수상한데.”
“와, 이렇게 억울할 수가. 육작가님한테 물어보세요!”
“효준이 엄청 열심히 해요.”
어느새 다가온 육작가가, 효준의 가리키며 엄지를 척 올렸다.
유명이 장난이라고 웃으며 효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여긴가…?]그 때, 유명의 뒤쪽으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촬영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에, 모두가 시선을 집중했다. 마일리가 멍하게 탄성을 터뜨렸다.
[이…분이 바로 그…] [그렉이야. 내 친구고, 이번에 까메오 출연을 함께 하게 된 배우지.] [와…]촬영장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그렉의 얼굴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
한참동안 여기저기서 감탄사만 터져 나왔다.
그나마 며칠 전에 한 번 봐서 면역이 생긴 육작가가 나서서 그를 이끌었다.
[그렉, 어서 오세요. 미싱차일드 팀 전원은 그렉을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아, 유명씨는 물론이구요.] [배우님들, 환영합니다! 분장실로 가시고 다른 분들은 촬영 시작합시다!]이성적인 제니브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스탭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유명과 그렉이 의상과 분장을 위해 옆 쪽 공간으로 이동하고 나자, 건너편에선 촬영을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란히 앉아 분장을 받으며, 유명이 물었다.
“미호. 나 말고 다른 사람과 연기하는 건 처음이잖아, 기분이 어때?”
“…설레네.”
평소의 틱틱거리는 말투가 싹 사라졌고, 그는 진한 설렘을 담아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그를 보자 유명도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연기를 처음으로 경험할 미호.
그리고 미호의 경이로운 연기를 보고 충격에 빠질 모든 사람들.
‘어서 빨리 보고 싶네.’
시간이 흐르고, 그 때가 다가왔다.
[신 27 스탠바이 해 주세요!] [신 27 스탠바이!]신 27은, 미호가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
그렉과 첫 연기합을 선보이게 된 첫 배우는 나탈리 카센이었다.
데렉이 나탈리의 옆에서 투덜거렸다.
[내가 먼저 그와 연기하고 싶었는데.] [그 정도로 대단한가요?] [대단…이라는 말로는 너무 모자란데.]나탈리는 조금 가슴이 떨렸다.
저 데렉이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배우, 저 신유명이 자신의 스승과 같다고 말하는 배우.
배우들 사이에서는 이미 전설과도 같았다. 그녀도 너무나 그 공연을 보고 싶었다. 촬영만 아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한국에 방문했을 것이다.
[영광이다- 생각하고 잘 하고 와~ 진짜 부럽네.] […알았어요.]나탈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프레임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분장실에서 그가 걸어나왔다.
화악-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새하얀 명주에 금사가 수놓아진 의상. 그리고 순은으로 뽑아낸 것같이 반짝거리는 그의 은발. 그는 마치 세상에 강림한 ‘신’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신’을 연기할 예정이었다.
신 27. 양모의 과거.
양모는 미국을 움직이는 경제계의 큰손의 딸이었다. 그녀는 양부의 법적인 배우자였지만, 진짜 부부 관계는 아니었다. 함께 살지 않았고, 서로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와 손을 잡은 것은, 그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
[양자를…들이겠다구요?] [당신이 신경쓸 일은 없을 겁니다. 가엾은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려는 것 뿐이에요.]그녀는 무감각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서류에 싸인해 주었다.
‘가엾은 아이들에게 기회라… 웃기고 있네.’
앨버트 딜런. 저 교활한 작자가 이득없이 선행을 베풀 리가 없다.
그런 번지르르한 말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상관 없었다.
[여기에도 서명해 주시죠.] [여기에도.]양자 서류는 점점 늘어났다.
하나, 둘, 셋…그녀는 스물 한 개의 서류에 싸인을 했다. ‘아이들’의 활약을 보고서, 그가 일부러 천재 아이들을 입양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챘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도 이익이 되는 것일텐데.
그런 그녀가 변하게 된 것은…
아아, 신을 만나고 나서였다.
[가엾은 여인아.] […신이시여. 제가 왜 가엾나이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구나. 몰랐다고 하여 죄가 아니지 않은 것을.]온 공간에 성스러운 아우라가 가득 찼다.
한없이 자애롭고도 위대한 빛.
신을 직접 본다는 것은 한낱 인간인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숭고한 일이었다.
나탈리는 이미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영혼까지 양모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외쳤다.
[제가…무슨 죄를 지었나이까.] [네 지아비의 죄에, 아무것도 모르는 채 손을 거들었구나. 아아, 이 가엾을 아이를 지옥에 보내야 하다니.] […제 죄를 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이까.] [반의 반이라도 덜기 위해선, 모든 것을 바로잡고 평생을 속죄해야 할 것이다.]양모의 광신도적인 신앙이 시작되었던 날.
그녀가 만난 신.
그 역을 맡은 배우가, 연기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 촬영장의 누군가가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327 외전27.삶이라는 공연의 연출가.Fin
[…오케이.]완전한 정적이 가운데, 제니브가 영혼까지 빨린 목소리로 오케이를 선언했다.
미호가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걸어나왔다.
“좋았어?”
“응. 재밌네, 확실히.”
“와…어떻게. 어떻게….”
유명 옆에 서 있던 마일리가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미호의 연기가 엄청나게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미호의 뒤로 나탈리가 천천히 유령처럼 걸어나왔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눈물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다음 신은, 유명의 차례였다.
신 28. 연구소.
셀리가 근무하던 연구소도 시즌1에 나왔던 세뇌시설도 아닌, 또다른 연구소.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데카르도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다.
양부가 그의 턱을 들어올린다.
[데카르도. 내 아들. 언제까지 고집을 부릴 셈이니.] [나…데…카르도가 아냐…내 이름은…데이브.]데이브Dave.
그 이름의 뜻은 사랑받는 아이.
세뇌시설에 있었을 때, 아이들은 새 이름을 받았다. 하지만 같은 방에 같혀 있던 아이들은, 서로 원래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내 이름은 데…카르…
-아니, 네 이름은 데이브야. 데이브, 잘 생각해봐.
-데…이브. 맞아, 나는 데이브야.
하루하루 흐려져 가는 기억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서로가 되새겨주며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마도, 그 친구들은 세뇌에 실패해 폐기처분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불러주던 이름을 데카르도는 쉴새없이 중얼거린다.
[고집이 센 아이로구나, 데카르도.]또 한 번 약이 강제로 투여된다.
데이브는 머리를 쥐고 마구 흔들었다.
다시 한 번 눈을 떴을 때, 그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그래, 내 아들.] [무서운 꿈을 꿨어요.] [그래. 모두 꿈이란다. 이제 네가 좋아하는 공부를 할까?] […네]양부가 그의 앞에, 기상학 연구자료를 들이밀자, 그의 동공이 마구 흔들린다. 격한 거부 반응.
결국 그는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죽어도 ‘그 연구’를 지속시킬 수 없다는 의지가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옆에 서 있던 ‘개리’가 묻는다.
[어떻게 할까요? 여기서 더 강도를 높이면, 아예 지적인 사고를 못할 정도로 망가질지도 모릅니다.] [망가져도 할 수 없지. 좀 더 높여 봐.]양부가 쯧- 혀를 차고 일어섰다.
이것은 데카르도의 짧은 등장으로, 양부의 잔학함을 강하게 조명하는 장면.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제니브가 오케이 사인을 냈고, 스탭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와…신유명씨는 연기가 더 늘었네. 어떻게 더 늘 수가 있지?] [시즌 시작하고 13화 나가면 난리나겠는데.]이제 까메오 신은 한 장면만이 남았다.
유명과 그렉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
*
신 29. 데카르도의 환상.
고문같은 세뇌 끝에 얻은, 데카르도의 작은 안식. 그는 영혼이 빠진 눈빛으로 주저앉아 멍하게 허공을 바라본다.
‘실패했을 때, 깔끔히 죽었어야 하는데.’
그 때, 그 곳에 뛰어든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후회되는 것은 단 한 가지. 죽을 준비를 마치고 왔어야 했다는 것.
방 안에는 음식이 준비되어 있다. 포로에게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메뉴들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먹지 않는다. 지금 그가 소망하는 것은, 오늘 밤에라도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 뿐이다.
삐걱-
그 때 문이 열린다.
데카르도는 몸을 움츠렸다. 또다른 프로그램이 시작되는 걸까.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그는 도망갈 구석도 없는 벽 쪽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새어들어온 것은, 자애로운 빛이었다.
[데이브.]데카르도가 아닌, 데이브.
그 이름에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그는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아아, 신이시여. 저를 데려가러 오셨군요.]그 때, 카이는 눈을 비볐다.
이것은 천지창조와도 같았다. 신과 인간의 만남이며, 절망과 희망의 랑데뷰였다.
새까만 고통 속에서 신을 올려다보는 인간, 그런 그에게 양 손을 벌리는 신.
그 극적인 대비는, 숭고하기까지 했다.
‘구원받았구나, 데카르도는. 사명을 다하고.’
마음 속에 평안한 안식이 자리했다.
소명을 다한 이는, 신의 품에 안겼다. 이제 그에게 더 이상 고통은 없을 것이다.
[오케이- 컷!] [……] [……]두 배우는 오케이 싸인이 나자마자, 배역에서 빠져나왔다. 뭔가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촬영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웃으며 프레임 밖으로 걸어나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최고끼리 서로를 격려하는 그림같은 장면을.
촬영이 끝난 후, 유명은 육작가에게 물었다.
“육작가님, 그렉이 맡은 역할은 진짜 ‘신’인가요?”
“그건 Agency W에 달렸죠.”
“…?”
“시즌3에서 양모의 광신도적인 신앙은 이미 여러 번 조명되었지만, 신을 영접한 순간을 직접 보여줄 생각은 없었어요. 조악한 장면이 나올 게 뻔하니까요. 그런데 그렉을 보는 순간, 지상에 강림한 신을 보는듯한 착시에 시달렸죠. 굉장한 장면이 나올 것 같았어요.”
작가들이란 이렇게나 예리한 건가.
원래 신 맞는데…
“그럼, Agency W에 달렸다는 말은…”
“이번 까메오 출연이 다라면, 그는 진짜 신, 혹은 양모와 데카르도가 본 환상으로 그치겠죠. 하지만 시즌 5에 두 사람이 출연해 준다면, 그걸 떡밥으로 활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해요.”
“예를 들면요?”
“그렉을 릴의 협력자로, 릴이 양모를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그에게 신을 연기시킨 것으로 만들 생각이에요.”
“아아…그럼 데카르도도.”
“죽은 게 아니라, 그가 구해간 걸로 풀 수 있겠죠.”
와아…
유명은 박수를 쳤다. 까메오를 적절하게 집어 넣으면서도, 다음 시즌에 투입할 만반의 준비까지 갖춰두다니.
“그나저나, 두분 다 정말 대단하네요. 그렉이 연기에 들어간 걸 보고 나도 무릎을 꿇을 뻔 했어요. 저 인류애가 가득한 표정이 연기라니… 그리고 유명씨가 망가져갈 때의 표정엔 퇴폐적인 섹시미가… 아 갑자기 다른 시나리오 영감이 떠오르네.”
그녀는 허겁지겁 노트와 펜을 꺼내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
[유명 형, 그렉 형. 감사합니다.]카이는 최고의 까메오였던 두 배우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이제 촬영장을 대표하는 주연 배우의 격이 완전히 물이 올라 있었다.
[그래. 촬영장 분위기 좋더라. 잘 하고 있을 줄 알았어.] [형 덕분이에요. 조금씩 연기에 대한 감이 올라오니까, 그때 더 못 배운 게 너무 아쉬운 거 있죠. 진짜 배울 게 많았는데.] [다음에 또 같이 일할 기회가 있겠지.] [그것만 기다리고 있어요. 아참, 그렉 형이랑도요.]카이가 싹싹하게 말을 붙이자, 그렉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이는 유명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던 한 가지 얘기를 꺼낸다.
[형. 시즌2가 끝나고 나서, 부모님이랑 유랑극단 단원들에게 드디어 도움을 드릴 수 있었어요.] [와…정말?] [하시던 일은 계속 하고 싶어 하셔서, 라스베거스 쪽에 정착하실 수 있도록 조금 도와 드렸어요.] [카이는 정말 대단하네.]유명은 대견한 동생의 등을 두드렸다.
캐스팅보트 당시, 그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본인이 잘 돼서 극단 사람들 모두 걱정없이 지내게 해줄 거라고, 그래서 꼭 성공하고 싶다고 말하던 순진한 소년은, 고작 몇 년만에 엄청난 스타가 되었다.
그런데도 예전의 다짐을 잊지 않고 양부모님과 극단 단원들에게 도움을 주다니. 여전히 착한 카이의 모습을 보니 참 예뻤다.
[이제 무슨 작품하실 거예요?] [좀 쉬고 생각해보려고.] [와…] [왜?] [형한테 쉬겠다는 말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서요.]유명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마음이 급했었다. 제한된 7년의 시간 안에 한 작품이라도 더 하고 싶어서 아둥바둥거렸었다.
이제는 조금 여유를 가져도 된다. 열심히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과 작품 사이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비할 여유를, 이제는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미호는 얼른 작품 하고 싶지?”
“…응.”
“네가 재밌게 연기할 작품을 같이 골라보자.”
“너는?”
“하나 따로 하고, 또 만나서 하나 하고, 그러면 재밌지 않을까?”
“그래. 재밌겠네.”
미싱차일드 촬영장에서의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미호에게도 작품이 쏟아질 것이다.
그와 파트너로 연기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설레는 일이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그의 연기를 보는 것도 무척 기대가 된다.
미호는 어떤 엄청난 필모그래피를 써 나갈까.
“미호. 먼저 집에 가 있어.”
“넌 어디 가는데?”
“데이트.”
“외박은 안 된다.”
“하하.”
유명은 예전 자신의 공격을 그대로 돌려주는 미호의 말을 듣고, 웃으며 차키를 던졌다.
“이제 운전할 줄 알지?”
“너는?”
“여자친구가 데리러 올 거야.”
미호가 차키를 받아들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유명은 스튜디오 뒷문으로 향했다.
*
“누나~~!”
훈훈한 실루엣이 차 쪽으로 다가온다. 세련은 차 문을 냉큼 열어 그를 태웠다.
그녀의 남자는 캘리포니아의 청량한 햇살 아래 반짝반짝 빛이 났다.
“잘 있었어요?”
“으응…”
“보고 싶었어.”
“나도.”
초장거리 연애커플의 비애.
세련이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은 3개월만이었다.
여름에 파리에서 고백을 받았고, 살로메 공연을 할 때 겨우 시간을 내어 한국에 들어가서 공연을 보고 몇 번 데이트를 했다. 그리고 지금 LA에서 보게 된 것이었다.
자신은 아직까지 익숙치 않아 부끄러운데, 유명은 보고 싶었다는 말을 잘도 한다.
‘얘 알고보면 선수 아냐?’
“참, 누나. 생일 축하해요.”
“말로만?”
“아참…생일 선물을 준비 못했네. 미안.”
세련이 장난을 걸었다가 유명이 당황해하자 빙긋 웃었다.
서운하기보다는 되려 안심이 되었다. 이럴 때면 연애 못해본 티가 나는 것 같아서.
선물이 꼭 필요할까. 이렇게 그를 만날 수 있는 것만 해도 그녀에겐 너무 큰 선물 같은데.
“나탈리가 촬영 끝난 후에 그렉한테 오더니, 진짜 종교인 아니시냐고 물었다니까.”
“하하, 그 나탈리 카센이? 진짜? 정말 연기가 엄청났나 보네.”
오랜만에 만나 괜히 부끄럽고 간질간질한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분야에서 정상을 달리고 있는 두 사람은 통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너무 다르지만 또 비슷하기도 한 서로의 세계를 엿듣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또 가끔은 일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늘 공기가 얼마나 청량한지, 서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속삭였다. 그럴 때면 본업에서의 날선 긴장이 누그러지고, 따뜻한 행복감이 찾아왔다.
“유명이 너는 만날 때마다 어려지는 것 같아.”
“내가?”
“응. 처음에는 나보다 어린데도 한참 오빠같은 느낌이었거든. 그런데 요즘은…네 나이로 보여.”
처음에 세련은 유명의 어른스럽고 중심이 잡힌 모습에 끌렸다.
하지만 지금 유명은 그 모습을 잃지 않고서도, 예전보다 훨씬 어리고 상큼해 보였다. 아마도…그가 지금 행복하기 때문일까.
“아참, 줄 게 있는데.”
“뭐?”
유명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그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자, 세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것을 받았다.
달칵-
작은 상자 안에는 푸른색의 보석이 반짝이는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생일 선물? 준비 못했다더니.”
“생일 선물은 준비 못했어. 이건 그냥, 지나가다 누나한테 어울릴 거 같아서.”
내 생각이 나서 선물을 샀다는 남자.
하지만 그걸 잊었던 생일 선물이라고 둘러대지는 않는 남자.
어쩜 너는 내 마음의 문을 이렇게 쉽게 두드릴까.
그들은 차를 타고 그리피스 천문대가 있는 언덕을 올랐다. LA 최고의 야경을 볼 수 있는 언덕에는, 이제 막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들은 차를 세워두고, 인적이 드문 곳을 따라 조금 걸었다.
“유명아. 예전에 네가 그랬잖아. 만약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해도, 15년은 더 노력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응.”
“이제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아.”
세련이 저 멀리 펼쳐진 LA의 전경을 보며 그런 말을 했다.
정상에 오른 후에 흔하게들 해대는 과거 미화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설사 실패했다 해도 후회하진 않았을 것 같아. 최선을 다해본 후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어. 그 때 그냥 포기했더라면, 나는 아마 망가지지 않았을까.”
그녀와 시선을 나란히 하며, 유명이 말한다.
“그런 생각을 했어. 우리 모두는 삶이라는 공연의 연출가가 아닐까.”
“연출가…”
“그것이 모두가 환호를 보내는 성대한 공연일지, 무료입장이라도 보지 않을 공연일지, 자못 따분해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아름다운 공연일지. 결국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거니까.”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완전히 지고, 지상의 무수한 별들이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반짝. 반짝.
“예쁘다…”
“정말 예쁘네.”
두 사람은 야경을 바라보았다.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손을 꼭 잡고 같은 방향을.
이윽고 가장 반짝이는 두 별의 실루엣이 서서히 겹쳤다.
Fin.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