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44
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지드린대로, 오늘 바로 캐스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보내드린 대본으로 연습은 알아서 해오셨으리라 믿습니다.
물론, 오늘 캐스팅이 끝은 아닙니다. 오디우스의 전통대로, 중간에라도 특정 배역을 본인이 더 잘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도전하시면 됩니다.”
오디우스의 연습진행은 창천보다 빠르다.
리딩은 각자 알아서 하고, 첫 모임에서 바로 캐스팅을 진행해버린다.
본 연습에 들어가서도 몸을 풀기 위한 신체 훈련만 진행할 뿐, 연기 연습은 따로 하지 않는다. 배우 지망생들인 만큼, 기초적인 연습은 제 알아서 하라는 방임주의.
단체 연습시간 또한 짧다.
하지만 단체 연습이 끝났다고 바로 집에 가는 배우들은 없다고 한다.
대부분이 남아서 홀로, 혹은 주변에 조언을 구하며 스스로 캐릭터를 완성시켜 나간다.
“오디션 시작하겠습니다.”
“지킬 앤 하이드 역 지망자. 서류신, 신유명.”
두 명의 배우가 가운데로 이동했다.
예상대로의 전개였지만, 모두들 바짝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
신유명.
여름방학 이후, 워크샵 참여자들은 그의 연기에 대한 감탄을 입이 마르게 전파했다. 그래서 비참여자들 역시, 오늘 그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었다.
실물로 본 그는 수수하고 차분해 보였다. ‘연기천재’라는 평판과 아직 잘 매치되지는 않았다.
이 작품의 주연인 지킬 겸 하이드 역.
예상대로 주연 지망자는 단 둘이었다. 오디우스 멤버들이 암묵적으로 이번 공연 주연 오디션에 끼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3년 내내 서류신 한 명도 당해낸 사람이 없는데, 윤한성이 ‘신배우’라고 경칭했다는 낯선 천재까지 어떻게 감당하랴.
모두가 세기의 대결을 구경하듯 멀찍이서 관망할 태세였다.
유리가 연출석에 자리를 잡았다.
“1막 2장, 지킬의 밝은 자아와, 2막 3장, 하이드의 어두운 자아를 한번씩 번갈아 연기해주세요.
아시다시피,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극단에 있는 두 인격을 얼마나 설득력있게 표현해내는지가 관건입니다.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겠습니다. ”
R.L.B. 스티븐슨의 1886년 고전명작.
백 년도 이전에 쓰여졌음에도, 인간본성을 탐구한 파격적인 스토리는 현재까지도 인기를 잃지 않으며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용되고 있다.
주인공 지킬박사는 누가 보아도 선량하고 귀족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내면에 감추어져있던 충동을 발현시킬 수 있는 약물을 개발하고, 그 약물을 본인이 마신 후 하이드라는 극악한 자아를 발동시키게 된다.
이 원작이 연극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두 명의 주인공이 본체는 같지만 내면은 완전히 상반된 인물인 것에 있다.
인간의 선한 의지를 극도로 표상화한 지킬박사와, 악한 의지 그 자체인 하이드.
한 명의 배우가 이 두 역을 어떻게 소화해내는지는, 새로운 버전이 개연될 때마다 큰 관심거리였다.
연출 선유리는, 그 간극이 적나라하게 대비되는 장면을 주문한 후 펜을 들었다.
첫 턴에서는 서류신이 지킬, 신유명이 하이드를 연기하게 된다.
먼저 나온 것은 서류신.
조연출이 대사를 받아주기 위해 같은 무대 위에 섰다.
“1막 2장, 스타트.”
잠시 눈을 감고 감정을 잡은 류신은, 대사를 시작했다.
“어이, 어터슨. 오랜만이야, 내 가장 가까운 벗. 자네는 여전하군.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화술과 친근한 미소. 언제나 자네를 보면 기분이 흐뭇해진다네.”
“과찬일세, 지킬. 자네는 언제봐도 빛이 나는군.”
“이 사람 참. 그런데 그건 테니스 때문일지도 몰라. 강렬한 햇살 아래서 정신없이 몸을 날리다보면 몸의 건강도 정신 건강도 좋아진다는 말일세.”
그림에 그린듯한 귀족, 지킬 박사.
유명은 그 연기를 보고 감탄했다.
서류신이 손꼽히는 연극배우가 된, 30대 이후의 연기라면 여러 번 본 적 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그의 연기를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비중이 적고 크로스-젠더라는 난조건을 안고 연기했던 메리 역을 예외로 치고.
‘이 때부터 이미…대단한 배우였구나.’
무대 위에서 단번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존재감. 지킬의 수려한 얼굴이 귀족적으로 빛난다. 어느 모임에서건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둘러싸게 하는 타고난 귀티. 보는 사람들 모두가 홀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짝짝짝짝-
지킬의 연기가 유려하게 마무리되었다.
누가봐도 고작 캐스팅 전 연습임이 믿기지 않는 무대.
다들 역시 서류신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다음, 2막3장 하이드역, 신유명.”
이제 유명의 차례였다.
*
하이드가 처음 등장하는 씬.
죄없는 노인을 구타하는 하이드를 보고, 지나가던 리차드 앤필드가 저지한다.
조연출이 먼저 대사를 던졌다.
“이봐, 거기! 뭐하는 거냐!”
유명은 후우-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몸을 우그러뜨렸다.
등이 굽고, 치솟은 어깨가 뒷목을 내리누른다. 완벽하게 표현된, 기형적인 몸의 쉐입shape.
그리고, 대사가 흘러나왔다
“지금 이 늙은 놈이 제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등이 굽은 곱사등이라며 속으로 욕을 했지요. 저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답니다. 크큭.”
“저…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나으리.”
“거짓말마라! 나는 독심술을 한단 말이다! 겉으로는 불쌍한 척 해도 이런 천것들이 속으로 무슨 더러운 생각을 하는지 귀족 나리는 모르실 거요. 저것들은 개돼지와도 같아서 그저 매가 약이지요. 나으리도 한대 쳐 보시겠습니까? 아주 손맛이 좋습니다. 큭큭”
음습한 미소.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불길한 분위기.
수수해보이던 배우는 지나가던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 것같은 폭력적인 남자로 돌변했다.
팽-
유리는 머리 속을 피아노 현 하나가 관통하는 듯한 긴장감에 소스라쳤다.
악인惡人.
악한 인물이 아닌, 악 자체인 듯한 인물.
연출 선유리가 머리 속에 그렸던 그 하이드가 눈앞에 서 있었다.
‘어떻게 저런…’
서류신도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 몸의 표현과 말의 표현.
그는 ‘저게 올해 처음 시작한 연기라니 말이 안돼.’라고 생각하다, 전제조건을 삭제해 버렸다.
그냥 말이 안 된다, 저 인간은.
여태 자신이 연습해온 하이드의 연기가 벌써 마음에 들지 않아,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짝짝짝짝짝-
첫 턴이 끝나고, 오디우스 멤버 모두는 격한 박수를 보냈다.
양 쪽 모두 여러모로 학생의 수준을 훌쩍 넘은 연기. 벌써부터 역이 체인지되는 다음 턴에 대한 기대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런데···
다음 턴은, 기대와는 달랐다.
‘지킬이…왜 이렇게 평범해보이지···’
괜찮은 지킬이었다.
하지만 귀족의 후광을 자체발광하는 듯하던 서류신의 지킬에 비하면···
‘하이드가 너무 착해보여···’
괜찮은 하이드였다.
그러나 악이 인간으로 형상화된 듯 불길하던 신유명의 하이드에 비하면···
앞쪽 턴을 보고 한껏 고취되었던 기대감에 바람이 빠졌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나 본인이 강점이 있는 역이 있다. 그리고 그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캐릭터는 약점이 되기 쉽다.
유리가 골머리를 싸맸다.
“잠시 휴식하세요. 연출부 회의 진행하고 오겠습니다.”
그녀는 조연출과 회의에 들어갔다.
“어…역시 류신 형 아닐까?”
조연출인 99학번 지형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유명이는 아무래도 힘들겠죠?”
“어…저 하이드는 진짜 아깝긴 한데, 갭이···”
서류신의 연기와 신유명의 연기.
둘 다 대학생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프로급의 연기였다.
하지만, 지킬역과 하이드역을 점수로 나타내자면 서류신이 7과 3이라면 신유명은 2와 8의 연기. 합산하면 동률이라 하더라도, 신유명쪽이 갭이 더 크다.
“그게 맞을 거 같네요. 두 역 모두 퀄리티 보장이 돼야 하니까.”
“그렇긴 한데…저 하이드···”
“버리긴 진짜 아깝네요.”
“어···”
“어쨌든, 연출부로서 최선의 선택을 해야하니, 어쩔 수 없죠.”
“그래.”
아직 유리의 머리 속에는 그 하이드가 맴돌았지만, 그녀는 정도를 걷는 이성적인 성격답게 미련을 떨쳤다.
“지킬/하이드 역은 서류신으로 결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