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45
연출부의 공식발표였다.
*
유명이 쓴 침을 삼켰다.
떨어진 이유는 알 것 같았다.
그는 ‘고전대본’인 의 대사에 적응하기 위해 한참의 연습시간을 허비했고, 결국 지킬은 아직 손에 쥐지 못했다.
그가 살던 세상은 15년 후의 세상.
연극 대사를 연극적으로 치는 것이 미덕이던 시대가 지나가 있었다. 현실에 없는 것 같은 과장된 말투를 지양하고, 옛날 대본으로 공연할 때는 번안해서 듣기 편하게 바꾸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중에서도, 유명은 사실적이고 설득력있는 연기를 추구하는 타입이었다. 그런 그에게 배경에서 꽃잎이 날릴듯이 형식미 넘치는 대사들이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연출부가 캐스팅용 대본을 보내준 날부터, 유명은 그 부분을 타파하기 위해 연습을 거듭해왔다.
하이드는 그나마 쉬웠다. 파격적인 인물인 하이드의 대사는 귀족적 말투의 형식을 다분히 깨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지킬의 대사는 현실 대화에 사용되지 않는 만연체라 자꾸 몰입이 깨졌다.
‘할 수 있어.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그렇게 믿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조연도 단역도 가치가 있고, 만들어가기 나름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번 주연만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부모님.
유명이 학교 공연을 한 번 더 하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을 학교라는 틀 안에서 온건하게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라는 극은 그 제목부터 설명해주듯이 그야말로 주인공의, 주인공에 의한, 주인공을 위한 연극.
다른 배역들은 비중도 캐릭터성도 부족하다. 연극에 익숙치 않은 부모님을 연기로 설득하기에는…
유리가 다음 오디션 참여자를 호명했다.
“어터슨 변호사역 지망자. 신수호, 조민석, 그리고 신유명.”
오디우스의 캐스팅 방식은 특이하다.
주역부터 결정한 후, 비중이 높은 순으로 내려가며 캐스팅을 진행하는데, 앞의 캐스팅에 떨어진 사람은 뒤쪽 캐스팅에 참가하게 된다.
가장 실력있는 배우들로 출연진을 이루기 위한 방식이었다.
주연캐스팅에 떨어진 유명은, 다음 비중의 배역에 자동으로 응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들고 이의를 제기했다.
“죄송하지만, 이어지는 배역 오디션에 지망하지 않겠습니다.”
유리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설마…주역이 아니라면 오디우스 공연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아니요. 주요 배역이 아닌, 행인 1을 지망합니다.”
행인 1.
하이드에게 얻어맞던 노인.
워낙 비중이 없기에 오디션조차 없는, 해 보고 싶다고 손드는 사람에게 맡기려 했던, 단역도 못 되는 엑스트라.
“…그게 무슨…이유가 뭔가요?”
“저는 지킬/하이드역의 후보로 남겠습니다. 배역을 따 낼 때까지.”
배수의 진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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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오디션
“저는 지킬/하이드역의 후보로 남겠습니다. 배역을 따낼 때까지.”
배수의 진을 쳤다.
물론 다른 배역을 연습하는 중에도 지킬/하이드 역에 도전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럴 경우 배역이 바뀔 때마다 혼선이 생기며, 지킬/하이드 역 연습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유명은 누가 해도 상관없는 행인1 역할을 지망했다.
서류신은 유명의 발언에 끓어오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너도 내 과야.’
류신은 알고 있었다. 선유리가 자신을 캐스팅한 이유.
이런 상황이라면 자신이 연출이라도 갭이 적은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자신이 더 좋은 연기를 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동률.
자신이 떨어졌다 해도 유명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나도 하이드역, 갈고닦을거다. 주연 자리를 호락호락하게 내주진 않아.’
류신은 다시 유명의 하이드를 떠올렸다.
그렇게 연기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자신도 이대로는 안 된다. 신유명의 하이드 이상으로 설득력 있는 하이드를 만들어내고 말 것이다.
서류신과 신유명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흘렀고,
그것을 보며, 민주란은 생각했다.
‘저 사람도 연기는 좀 되는 것 같지만, 분위기가 너무 음침해. 경력이든 외모든 연기스타일이든 확실히 스타성이 있는 것은 서류신. 프로로 나가기만 하면 뜰 게 확실한 배우가 주연인 극이라면 포트폴리오로 나무랄 데 없지 .’
그녀는 각색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
희곡쓰기 수업.
오늘 교수는 수업 시작에 앞서 두 권의 대본을 소개했다.
“이 두 권의 대본, 와 은 같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읽어보면 같은 작가가 단기간 내에 다시 쓴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져 있어요.”
학생들이 고개를 빼들고, 교수의 손에 들린 대본을 넘어다보았다.
“제가 여러분들께 첫 시간에 얘기했죠. 수업을 듣는 이상 다른 건 못해줘도, 작품 비평만을 언제든지 해드린다고. 그런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개강 후 3주가 된 지금까지 무려 7편의 희곡을 보낸 학생이 있어요. 후후”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뭐, 7편?
-작가 지망생인가?
“재미있는 건 3주간 보내온 작품들의 성장속도입니다. 처음엔 대사나 장면 구성 등이 상당히 조악해서, 이제 막 시작한 친구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한 편 한 편마다 수준이 확확 달라져요. 제가 도달한 결론은, 아주 오랫동안 많이 써 봐서 희곡쓰는 근육이 이미 있던 친구가, 처음으로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받는 느낌?
특히 어제보낸 이 이라는 작품. 처음 보냈던 를 개정해서 쓴 것인데, 아주 재미있어요. 발상은 원래 신선했고, 이제는 대사와 장면 전환 등도 초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매끈해졌네요. 제 수업 때문일까요?”
교수가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 친구가,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되도록 대본을 공유하는 걸 허락해줘서 가져왔습니다.
청강생인데도 열정과 재능이 연영과 학생들 못지 않은 그 사람은,”
한 박자 뜸을 들인다.
“경영학과 우준호 학생. 손들어 볼까요?”
구석에서 하나의 손이 쭈뼛쭈뼛 올라갔다.
학생들의 시선이 몰리자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
“고마워요. 오랜만에 이런 열정을 접하고, 처음 희곡 공부를 할 때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어요. 앞으로도 작품 감평은 언제든지 환영이고, 이쪽 길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재능있어요.”
준호의 얼굴이 벅차올랐다.
그는 옆에 앉아 있는 친구의 팔뚝을 툭- 한 번 건드렸다.
이 녀석 덕분이었다. 요즘 점심을 같이하는 그들은 주로 연극과 희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수분같이 흘러나오는 유명의 끝없는 관련지식과 조언은 준호의 대본을 급속도로 성장시켰다.
유명도 뿌듯이 웃었다.
“봐, 너 재능있다니까.”
유명이 소근거렸다. 진심이다.
제대로 배우지 않아 서툰 부분들은 분명히 있지만, 창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는 크리에이티브. 그의 대본들을 보면 거친 아이디어들이 끝없이 샘솟아 있다. 자신은 그것을 정리할 방법을 알려준 것 뿐.
“상상해봐. 내가 한 번씩 읽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네 작품속의 배역들이 각각의 배우에게 맡겨져서 실제로 재현된다면…어떨 것 같아?”
“…”
준호의 침이 꿀꺽 넘어갔다.
*
가을공연을 준비하는 오디우스의 연습실.
하나-
둘-
본연습 전 신체훈련. 바디밸런스.
두 줄로 선 배우들이 거울을 앞에 두고 한 쪽 무릎을 든다. 허리를 뒤로 젖혔다가 들린 무릎을 펼친다. 아크로바틱한 바디밸런스 훈련의 난이도에 다들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후아…대단하네.’
다들 몸집이 다른데도, 들어올리는 팔과 다리의 각도가 들어맞는다.
몸을 쓰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의식하며, 동료 배우들과 포지션과 속도를 맞추는 고도의 연습. 바디밸런스는 신체 훈련인 동시에 동료와 호흡을 맞추는 훈련이었다.
‘전공자들이라 그런지, 난이도가 달라.’
창천은 물론 전생에 15년을 몸담았던 극단의 훈련보다도 수준이 높다.
프로라 해도 수준은 천차만별. 유명이 속해있던 극단은 이나 같은 극단이 아닌, 적자에 시달리는 작은 극단이었다. 직장을 다니다 그만둔 일반인들도 섞여있는 극단멤버들에 비해, 어릴 때부터 연기의 길을 택한 친구들은 신체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높았다.
그럼에도, 유명은 그 친구들 사이에서도 최상의 클래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이유야 말할 것도 없다.
‘몸이 가벼워.’
예전의 삶에서, 다른 배우들과 연습하고 공연할 때면 늘 몸이 무거웠다. 마치 두 배, 세 배의 중력을 이겨내려 발버둥치는 것처럼.
이를 체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던 유명은 강박적으로 신체훈련을 했었다.
그 압박이 사라진 지금, 몸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작은 근육의 수축과 이완까지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다.
“신체훈련 끝! 10분 후 본연습 들어갑니다.”
조연출은 공지와 함께, 두툼한 A4용지를 한아름 안고 왔다.
“새로 각색한 대본입니다. 다들 한 부씩 받아가세요!”
오오- 하는 환호성이 쏟아지며 너도 나도 손을 내밀었다. 유명도 손에 한 부를 받아 들었다.
원저 R.L.B. 스티븐슨
각색 민주란
고딕체로 크게 박힌 표지를 흘긋 보고 다음장을 넘겼다.
[어터슨: 저는 닥터 어터슨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한 가지 기묘한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저에겐 한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헨리 지킬. 아아, 가엾은 친구. 그는 흠잡을 데 없이 온화하고 자상한, 진짜 귀족이었습니다. 그 유혹에 빠지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