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51
평범하고 심약해보이기에 제 뜻대로 갖고놀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처음의 그 섬찟할 정도로 차가운 말투는 뭘까.
나대는 순간 잘릴 것 같은 압박감에 주란은 얌전히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으..응. 알았어.”
유명이 슬쩍 웃었다.
*
어느덧 기온이 떨어지고 코트의 계절이 왔다.
예년보다 쌀쌀한 날씨에 행인들은 옷깃을 여미고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이 저택은, 뒤쪽의 저택과 연결되어 있었군요.”
“나는 그 저택의 주인을 알고 있네. 바로 헨리 지킬의 저택이야.”
“그 수상한 남자가 건네준 어음에도 지킬 박사의 서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둘의 관계는 뭘까요?”
바깥의 추운 날씨가 거짓말인 것처럼, 연습장 내부의 공기는 뜨거웠다.
원래도 열의 넘치는 오디우스 멤버들이었지만, 두 주역의 실력과 열정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계까지 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류신 선배 다른 건 다 좋고, 래니언 박사와 마주칠 때 위치가 좀더 DL(*Down Left: 무대 앞좌측)로 내려왔으면 좋겠어요.”
“이 정도?”
“네, 딱 좋아요.”
류신이 대본을 꺼내 슥슥 메모를 한다. 이미 그 대본은 붉고 푸른 수많은 펜 자국으로 뒤덮여 있다.
“유명이도 좋아. 무대 설치되고 나면 경계라인이 20% 정도 확장되는 거 유의해서 포지션 잡고.”
“응. 알겠어.”
유명도 대본에 체크를 한다. 류신의 대본과 만만찮게 닳고 닳은 대본이다.
“각자 통으로 연기하는 버전은 둘다 좋아요. 그런데 반반씩 붙을 때가 아직도 좀 뜨네요. 초반보단 많이 좋아지긴 했는데 그 쪽을 좀더 연습해 봅시다.”
“알았어.”
“어.”
초반부터 우려했던 것.
지킬과 하이드 역을 반반씩 연기할 때 캐릭터의 톤이 달라지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버릇과 특징적 표정 등을 맞춰가면서 예전보다는 훨씬 같은 사람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위화감이 있었다.
유리는 생각했다.
‘사실 욕심이지. 처음보는 일반 관객이 봤을 땐 ‘톤이 다르다’라는 생각보단 둘다 잘한다고 경탄할 수준이긴 해.’
그럼에도 연출도, 두 배우도 아직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연습시간 외에도 유명과 류신은 공강마다 서로를 찾아 연기를 맞추고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서로를 더 인정하고 있었다.
“자, 다시 한번 런쓰루(*Run Through:장면 전체를 순서대로 돌리는 것) 갑시다.”
연습이 끝난 후, 민주란이 소지품을 챙기고 있는 유명에게 다가왔다.
“흠..흠…좀 하네.”
“…?”
“아니 뭐, 연습보다 보니 왜 선유리가 내 뜻 안따라줬는지 알겠다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아 진짜···! 너 연기 잘 한다고! 그 땐 내가 경솔했어. 미안해.”
이런 사과같지 않은 사과를 봤나.
“그래, 고맙다.”
“어. 뭐, 나중에 프로에서 만나더라도 유감갖지 말자고. 같은 오디우스잖아.”
참 일관성 있는 캐릭터다. 한달 가까이 연습장에 함께 나오면서 자신의 연기를 보고 나니, 척 져서 좋을 것 없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지. 유명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 때 하는 거 봐서.”
“야…너-”
뭔가 말하려는 민주란의 말을 끊은 건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민주란, 뭐해. 얼른가서 연출 수정사항들 고치자.”
“어…어! 지금 바로 갈게! 신유명, 나 사과했다~ 우리 다 턴 거야!”
주란이 다급하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준호 쪽을 향해 뛰어갔다. 희한한 조합이다.
그 날 이후로 주란은 준호가 조금만 정색을 해도 안절부절 못하고, 준호는 평소 성격으론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주란에겐 강하게 나간다.
역시 관계 설정에서 ‘기선제압’의 효과는 크다니까.
유명이 재미있다는 듯 피식했다.
그나저나, 류신과 조합되는 부분의 타개책을 빨리 찾아야 하는데.
*
{그게 왜 고민이냥?}
“응?”
미호가 유명의 이야기를 듣고 혀를 쯧쯧 찼다.
{아무 문제도 안 되는 일을 그렇게 고민하다닝.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쯔쯧.}
입을 움직이면서도 미호의 시선은 제 꼬리 쪽을 향하고 있다. 풍성한 꼬리가 나풀나풀거리는 것을 앞발로 휙- 잡으려다 실패하고 만다. 유명은 미호의 앞다리에 두 손을 끼워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그게 무슨 뜻이야. 설명해줘.”
{그럼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뎅?}
“엉?”
움찔한 유명이 미호를 내려놓았다. 또 거래 제시인가 싶어서 경계심이 든 탓이다.
그걸 보고 미호가 킥킥 웃었다.
{존재감 받으면 너도 좋은건뎅 뭘 그렇게 놀라냥. 그리고 이건 너무 하찮은 도움이라 거래 성립도 안 된당. 그냥 말해줄컁 말컁.}
“말해줘, 제발! 미호님!”
유명이 바짝 엎드리자 제 앞에 놓인 그의 머리카락을 앞발로 신나게 헤집는 미호.
그리고 거만한 목소리로 답을 내려주었다.
{네가 맞추면 되잖앙.}
“응?”
{네 지킬, 네 하이드를 안 버리고 맞추려니까 힘들징. 그냥 서류신 톤에 맞췅. 어차피 각각은 분리된 공연이잖냥.}
“아···!”
유명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러게, 왜 캐릭터를 지키려고 했지. 어차피 자신 혼자 두 역을 해내는 1회차 공연과, 류신과 역을 나누는 3,4회차 공연은 다른 공연인데.
“고마워!”
유명은 황급히 대본을 찾았다.
볼펜을 들고 빈 공간이 거의 없는 대본에다 추가로 뭔가를 쓰기 시작하려다가 마음을 바꾸고 컴퓨터를 켠다.
지잉- 지잉-
새로 출력한 깨끗한 대본이 프린터에서 쭉쭉 뽑아져 나온다. 따끈따끈하다.
그 대본에, 이제는 표정 하나하나까지 외우고 있는 류신의 연기를 복기하며, 유명은 열심히 체크를 해 나갔다.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완성되어있는 제 캐릭터를 버리고 다른 배우의 톤을 맞추어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
그럼에도 미호는 너무 간단하게 해결책을 이야기하고, 유명은 거기 동의하여 새 캐릭터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어, 선하 선배, 왔어?”
“와~ 한성이는 여전히 건방지구나? 잘 나간다고 아주 맞먹으려고 하네?”
“아니? 잘 못나갔을 때도 맞먹었던 거 같은데?”
만나자마자 웃으며 티격대는 한성과 선하 사이로 재필이 끼어든다.
“선배님, 잘 계셨어요?”
“어? 이재필 교수님 안녕하세요~ 너 이번 우리극단 정기공연 평론 쓴 거 좀 뼈아프더라?”
“하…핫.”
방글방글 웃으며 재필을 갈구는 선하와 난처한 웃음을 짓는 재필 사이로 한 명의 남자가 끼어든다.
“이선하 배우님!”
“어? 백이신 씨가 여기 웬 일이에요? 창천 출신 아니었나?”
“아, 관심두고 있는 배우가 있어서 보러 왔는데, 여기서 덜컥 배우님을 만날 줄이야.”
“하…하. 일부러 피한 건 아니고, 정기공연이 바빠서어···”
“오늘 마치고 잠깐 저랑 얘기 좀···”
물고 물리는 역학관계.
여성 중견배우층이 얕은 줄라이에서는 이선하를 탐내왔고, 선하는 끈질기게 회유하는 백이신을 종내에는 피해다녔다. 설마 여기에서 마주칠 줄이야.
“개연이라서 오늘 왔는데, 더블 캐스팅이라 골라보기가 너무 아쉽네. 토요일에 한 번 더 와야겠어.”
“나는 네 번 다 볼거다.”
“부러운 자식. 하여간 교수 팔자가 상팔자야.”
윤한성과 이재필은 뒤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뒤로 한 부부가 어색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며 걸어왔다. 유명의 부모님이다.
“여긴가···”
“그런가봐. 당신은 아들 얼굴 오랜만에 제대로 보겠네? 아침엔 새벽같이 나가고, 저녁엔 맨날 그렇게 늦게 들어오니…몸 상하면 어떡하려고.”
“그만큼 제겐 중요한 일이겠지.”
저녁 어스름이 깔렸다. 찬 공기가 체온을 내리는 11월 말의 저녁임에도 극장 앞은 많은 인원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그 광경에 유명의 부모는 놀라 눈을 마주쳤다.
“동아리가 좀 유명한가보네?”
“그러게.”
객석이 오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