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59
그들은 커피숍을 나와 옆 건물로 들어갔다.
블루필름은 3층에 있었다.
“기감독님 오셨어요?”
대리쯤으로 보이는 젊은 직원이 익숙한 듯 말을 붙인다.
“네. 장소는 어딥니까?”
“2번 회의실요. 작가분 미리 와 계세요. 투자자 쪽에서 나온 사람 하나랑요”
“아, 벌써요?”
기도한이 좀더 발을 재게 놀렸고, 유명은 그 뒤를 따랐다.
[2회의실]문 앞에 서 똑똑- 노크를 하니,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어오세요’하고 얘기했다.
감독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고, 그 등 뒤로 따라 들어간 유명은, 감독이 비켜서고서야 시야가 트였다.
‘어?’
아까 길에서 마주친 그 여자가, 회의실 책상에 뺨을 대고 엎드려 있었다.
*
“세련아, 일어나.”
“아저씨 잠깐만요. 나 어제 술 마신 거 아직 덜 깼단 말이야. 어차피 다 와야 시작할 거잖아요.”
뺨을 책상에서 떼지 않은 채로, 눈동자만 새로 들어온 사람들 쪽을 향한다. 건성으로 눈인사를 한다. 깜빡- 하고 기다란 속눈썹이 나풀거린다.
기도한의 표정이 굳는다.
“윤세련씨. 지금 약속한 2시이고, 저희 일 때문에 모여있는 자리인데요.”
투자자라 꾹 참아 보려고 했지만, 이건 아니라는 불편한 심기가 역력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아, 감독님. 죄송. 헤헷.”
슬쩍 혀를 빼어물고 고개를 까딱한다. 상대가 화가 풀릴만한 제스처를 알고 짓는 표정이다. 그 가벼운 사과에 감독은 조금 신경이 누그러졌지만, 불편한 것은 기감독만이 아니었다.
잠깐 보고 말 작가만이 아닌, 앞으로 쭉 함께 영화를 만들어나가야 할 여주인공.
첫 스타트에서부터 이런 식은 아니다.
유명은 잠시 생각 후, 입을 열었다.
“발레에서는 오디션할 때 그렇게 건성으로 합니까?”
“뭐라구요?”
유명이 싸늘하게 던진 말에, 세련이 정색했다.
초점이 잡히지 않던 눈에 빛이 돌아오고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배우에게나, 발레리나에게나 배역 오디션이 절실하고 중요한 기회인 건 똑같습니다. 윤세련씨가 지젤 오디션을 보는데, 심사위원이 그러고 있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기도한이 놀라 유명의 소매 끝을 잡는다.
‘아저씨’라고 불린 남자는 ‘감히 저런’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달싹인다.
하지만 유명은 후회하지 않았다.
싸가지가 없는 것도, 이기적인 것도 참아줄 수 있지만, 연기를 하찮게 보는 사람과는 일할 수 없다. 계속 이런 식이 될거라면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그러네요. 제가 실례했어요.”
하지만 의외로 쉽게, 정중한 사과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반듯이 앉았다. 곧은 자세를 취하자 키가 훌쩍 더 커 보인다.
발레리나 특유의 ‘척추를 길게 뽑는’ 자세.
‘아저씨’가 마땅찮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삭이고 기도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문이 벌컥 열리며 두 남자가 뛰쳐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하하. ”
좀더 젊은 쪽의 남자가 안쪽의 냉랭했던 기류를 인지하지 못하고, 눈치없이 크게 웃었다.
*
‘저 남자가 권성한.’
확실히 몸이 좋았다.
아라베스크 원장이 며칠 째 강조하고 있는 길고 단단한 근육의 본새가 남아있다.
유명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감독들은 옆 쪽으로 비켜나고 배우들이 가운데에 마련된 의자 두 개에 나누어 앉았다.
“안녕하세요. 성호실업 홍보팀 문국환 실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이 대본을 쓴 윤세련입니다.”
“저…팬이었습니다. 영광입니다!”
권성한이 선수를 친다. 흠모하는 이에게 말을 걸듯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있다.
“절 아세요?”
“그럼요! 우리 나이 또래에 발레하던 사람 중에 진화예고 윤세련을 모르던 사람이 있을리가요. 오로라발레단 프리마가 꼭 되실 거라고 응원했는데…안타깝습니다.”
“관계없는 얘기는 거기까지만 할까요.”
세련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유명은 권성한이 눈치는 참 없는 타입인 것을 알았다.
“그럼 지정연기부터 시작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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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대사
지정연기.
시나리오에서 2가지 장면이 미리 주어졌다.
아- 아-
옆에서 권성한이 목을 풀고 있다.
경합이기 때문에 쌍방의 결과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모두 보는 앞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영화사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와서 좌석을 조율한다.
연기할 사람은 중간의 빈 공간에, 지켜보는 배우는 뒤쪽의 자리에, 옆에 감독들이 앉을 의자가 놓이고 세련과 ‘아저씨’의 곁에 직원이 앉는다.
경합 결과에 영향권자는 아니고, 진행을 위해 참석한 인물 정도로 보인다.
“scene 8, 윤화란과 팬텀의 조우와 scene 75, 화란을 윽박지르는 팬텀. 두 신 한 분씩 연달아서 가겠습니다. 화란 대사는 제가 쳐 드릴게요.”
머리를 질끈 묶은 여성 직원이 능숙하게 진행한다.
유명이 기감독과 보낸 대부분의 준비 시간을 사용한 것이 이 두 가지 장면이었다.
그것은 팬텀의 두 성품-주인공 윤화란이 발레의 천사로 착각할 만한 순수하고 부드러운 품성과, 그녀가 발레에서 멀어질 것 같을 때 내뿜는 광폭한 성품을 보여주는 장면이며, 그것은 기감독이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보고 유명에게 꽂혔던 두 일면이기도 했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권성한이 점수를 따려는 듯 먼저 자원을 했고, 세련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운데로 나와 목을 뚝뚝 꺾고 선다.
scene8은 다음과 같다.
[어두운 연습실, 늦게까지 연습하다 잠들고 만 화란은 어둠에 소스라치며 연습실을 나온다. 출구는 잠겨있고 정신없이 다른 출구를 찾다가 길을 잘못 든 화란. 헤메다 보니 어느덧 연습실 건물과 이어진 발레극장에 들어와 있다.걸려있는 튜튜(*발레용 스커트)들과 소품들이 어둠 속에 공포스럽게 조명되고, 그녀는 패닉에 빠져 소리를 지른다. 그 때 실링의 창문에서 한 줄기 달빛이 떨어지며 가면을 쓴 남자가 나타난다.]
“아이야, 길을 잃었니?”
“누…구세요?”
“아, 너 백조 군무를 하는 아이 중 하나구나. 이름이 뭐였더라?”
“…윤화란이요.”
“그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한 가지 알려주마.”
“네?”
“백조의 호수가 끝나고 다음 공연, 지젤일 거야.”
“…네?! 그걸 어떻게?”
“후훗…다 아는 수가 있지.”
[윤화란은 처음에 생각한다. 극단 관계자 높은 분인 모양이라고. 가면을 쓴 것은 이상한 취향이지만, 관계자가 아니면 다음 공연이 지젤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지.미리 알았으니 지젤 연습을 해야겠다. 그럼 혹시 나도 후보라도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두 손을 꼭 모아쥔다.]
[하지만, 밤12시 정각이 되자, 실링에서 만월의 흰 달빛이 스팟처럼 떨어져 환한 무대를 만들고, 공기가 연주하듯이 잔잔한 음악이 깔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자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춤을 보고서 윤화란은 남자가 발레의 천사라는 것을 확신한다. 인간이 해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발레.찰나같은 파 쇨(*독무)이 끝나고, 그녀는 홀린 듯이 묻는다.]
“당신…발레의 천사님인가요?”
“음···? 보는 사람이 그렇게 믿는다면 그럴지도. 같이 춤출래?”
특이한 시나리오였다.
지문에 여주인공의 감정이 디렉팅에 가까울 정도로 표현되어 있다. 수정을 봐줬다는 작가는, 어차피 윤세련이 연기할 것임을 알고, 그 부분을 건드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상당히 여주인공의 시점에 이입하게 되는 시나리오.
하지만 팬텀은.
팬텀의 시점에서 그녀는 어떠한가.
유명은 그것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앞에서 연기하고 있는 권성한은 어차피 염두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잠시 후 해내야 하는 자신의 연기.
권성한의 scene 8과 scene 75 연기가 모두 끝났다.
짝짝짝-
의례적인 박수와 함께, 세련은 성의없이 채점지에 낙서를 했다.
‘내가 머리에 그린 팬텀이 튀어나올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조악하다.
시나리오 초반 팬텀의 말투는 어린아이를 내려다보는 절대자의 톤.
자칫 느끼하게 들릴 수 있겠다는 우려가 그대로 현실에 드러났다. 갑자기 세련은 의욕이 푹 꺾였다. 원래도 꽂혀서 써내려가긴 했지만 제작할 생각은 없었던 시나리오다.
제작까지 하게 된 건…2년간 아무것에도 의욕을 보이지 않는 자신을 염려해, 뭐라도 하게 만드려는 아빠의 강권 때문이었다.
‘아…귀찮네.’
그리고, 아까 자신에게 정색했던 그 배우가 나왔다.
직원이 다시 한 번 지문의 끝부분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