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62
아버지가 그런 엄마를 다독였다.
“뭐 생각해 둔 거라고 있어?”
“네. 블루필름이라는 영화사에서 제작하는 예술 영화인데, 조연으로 캐스팅되었어요.”
지연이 끼어들었다.
“정말? 언제?”
“2주 전에.”
“그걸 왜 이제 얘기해! …나 임용때문에 그랬구나. 괜찮은데.”
유명과 같은 00학번으로 교원대에 입학한 지연은 올해로 4학년을 마치고 서울시 초등임용에 지원했다. 시험을 치기 위해 본가에 올라온 그녀는 어제야 2차까지 모두 마치고 한숨 돌렸다.
“영화 주제가 뭔데?”
“발레에 관한 영화야. 팬텀 오브 오페라의 발레버전이랄까.”
“헉 발레? 오빠가 맡은 역은?”
“팬텀 역.”
“우리아들은 잘 해낼거야. 화이팅!”
이건 엄마의 응원이었고,
“아직 신인이니까 흥행이나 성공, 이런 것보단 충실히 기본기를 쌓는 것을 목표로 해라.”
이건 아빠의 조언,
“아…그래서 방에 쫄쫄이가 있었구나. 나는 오빠 취향인 줄 알고 존중해주려고 했는데···”
이건 동생의 태클이었다.
“야, 신지연. 너 내 방 왜 들어왔어!”
“야구잠바 좀 빌리려고. 헐렁한 게 핏이 예쁘단 말이야.”
“말도 없이 가져가는 게 빌리는 거냐?”
“좀 빌려줘. 지금 말했어. 됐지?”
몇분 전의 어른스러움을 던져버리고 투닥거리는 남매를 보고 부모님은 못말린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발레영화라고? 진짜 무용수도 나와? 나 발레 좋아하는데.”
과일을 먹은 후 방에 들어온 유명에게 야구잠바를 돌려주러 들어온 지연이, 침대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아참, 그랬지.”
그러고보니 유명에겐 20년도 넘은 기억이라 흐릿하지만, 고등학교 때 지연이 발레리나 사진도 모으고 가끔 엄마를 졸라 공연도 보러갔던 것 같다.”
“혹시 윤세련이라고 알아?”
“…진화예고 윤세련?
“어. 맞는 거 같은데. 이번작품 여주인공이야.”
“헐…발은 다 나았대?”
“…?”
그러고보니, 기도한 감독이 얘기했었지.
그녀가 발 부상으로 발레리나를 은퇴했다고.
“그 언니 팬층이 엄청 두꺼웠지. 기술이며 예술성이며 한국에선 보기 힘든 재능이라고 다들 극찬했었거든. 오로라발레단 입단하고 최연소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지 않을까 다들 기대했었는데···”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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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파트너
“그런데?”
“거의 프리마(*프리마돈나: 발레의 여성 주역)가 되기 직전에 발가락 인대에 문제가 생겼다더라고. 다친 게 아니고 연습과다로 닳아 없어진 거라 회복이 거의 불가능할 거라는 진단을 받았대.”
“…힘들었겠네.”
그렇게 잘하던 일을 못하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본인도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15년의 무명 생활을 버티긴 했지만, 다시 그 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그 때도 연기를 지속할 수 있을까.
유명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내막을 꽤 자세히 알고 있네?”
“발레팬 사이에선 유명한 스토리야. 얼굴도 예쁘고 집안도 좋고, 다 갖고 태어났는데도 그렇게 독하게 연습하는 게 대단하다고 다들 응원했었거든. 오로라에서도 연습실에 제일 일찍 나오고 불끄기 직전에야 나가는 걸로 유명했었대.”
“그래…”
“평생을 발레에만 전념하다가 그만두고는 그 시간을 뭘로 채우고 있을지 안타까웠는데…연기자가 된 모양이네. 다행이다.”
그걸 연기자가 된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유명은 지연에게 더 이상의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심정이 상상되어, 조금 마음이 아팠다.
*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갔다.
가장 중요한 투자자 유치 문제는 이미 끝나 있었지만, 주조연 배우가 먼저 선정된 사정에 따라 스텝의 셋업이 뒤늦게 시작되었다. 영화사에서 조감독과 캐스팅 매니저가 붙고, 감독은 본격적으로 세팅에 돌입했다.
크랭크인은 4월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기감독은 주조연 둘을 하나로 묶어 연습을 지시했다.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었지만, ‘발레’’연기’라는 특성상, 유명은 발레를 더 배울 필요가 있고, 세련은 연기를 더 배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팀 짜고, 캐스팅이며 로케이션이며 나가있을 일이 많을 거에요. 두 분이 서로 도와 연습하시고, 저도 가끔와서 대본이나 배역 해석에 대해 함께 회의하는 걸로 합시다.”
그들은 연습실을 빌렸다.
전신거울과 발레 바가 설치된 작은 연습실.
다행히 유명은 휴학생이고 세련은 백수이기에 시간이 많았다.
세련은 유명이 발레리노로 보이는 몸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5kg 정도 감량하는 프로그램으로 해 주세요.”
“지금도 충분히 마르지 않았어요?”
“팬텀이니까 좀더 골격라인이 선명해 보이는 것이 좋겠어요.”
유명은 전문가의 도움을 적극 활용했다.
자신이 배우로서 상당히 몸을 단련해 왔다한들, 발레리나에 비할 바는 못된다. 무대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신체를 끊임없이 조형하는 사람들.
“발레 동작들은 발끝으로 서거나 한발을 드는 등의 불안정한 상태에서 대부분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든 밸런스는 중앙에 있어야 해요. 코어 근육과 등 근육, 복근이 무척 중요하죠. 유명씨가 발레를 계속 할 건 아니지만 카메라에 상반신이 잡히긴 할텐데…”
“계속 할 거라는 가정 하에 훈련시켜 주세요. 일반인 말고 프로 모드로.”
“후회할텐데? 후훗.”
반면, 연기를 가르칠 때의 유명은 가차없는 코치였다.
“그 표정은 두려움에 떠는 게 아니라 화가 난 것 같은데요.”
“누나는 연기할 때는 너무 나이브해요. 발레 동작은 그렇게 공을 들이면서.”
“발레에서 온 몸으로 표현하는 연기를, 좀더 디테일하게 표정으로 가져온다고 생각해요. 결국 근본적인 건 같아요.”
“아름다운 표정만 지으려고 하지 마세요. 괴로움, 분노, 질투. 좀더 적나라하게..!”
첫인상과 달리, 세련은 의외로 순둥했다.
튀는 복장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다니는 것은 여전했지만, 연습실에 들어와 연습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틀어올리는 순간, 그녀는 발레리나 시절의 윤세련으로 돌아가, 성실하고 끈기있게 연습에 임했다.
세련 또한 유명에게 호감을 느꼈다.
안되면 말고라는 낮은 기대치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의 연기를 보고 나니 자신이 꿈꾸던 이야기가 시각적으로 구현될 수도 있을 거라는 가능성이 샘솟았다. 함께 연습해보니 그는 정말로 재능있고 열정적인 사람이었기에 신뢰가 쌓여갔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그들은 가까워져 갔고,
“유명아, 지금 이 장면에서 내면 연기는···”
몰입해 갔다.
“누나, 방금 파드되(*남녀 두 사람이 추는 발레)에서 무게중심은···”
파트너.
15년간 연기를 했어도 유명에게 단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던 이름.
처음으로 유명은 함께 연기하는 상대와 시야를 공유하고, 깊은 감각을 교감해나가는 기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날, 기도한 감독이 대역 발레리나를 구해왔다.
“운대 무용학과 학생이에요. 세련씨와 체형이 비슷하고, 발레에서 느껴지는 색깔도 유사해서 맞춤한 대역인 것 같아요. 유명씨 대역은 아직 못구했구요.”
“안녕하세요. 문수진입니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머리를 꾸벅했다.
세련을 보았을 땐 아…하고 알아본 표정을 지었지만, 입밖으로 아는 체는 하지 않았다.
“2막 지젤 솔로 볼 수 있을까요? 쥬떼가 들어간 부분으로.”
“네.”
그녀가 연습복으로 갈아입고 몸을 풀었다.
가방에 든 주머니에서 발레슈즈를 꺼내어 신는다.
유명은 순간 세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음악이 흐르고,
등을 활처럼 휘고, 소테(saute: 점프).
한 자리에서 빠르게 피루에트(pirouette: 제자리회전).
그리고 드미 쁠리에(*무릎을 반쯤 굽힘) 후 그랑 쥬떼(grand jete: 다리를 공중에서 뻗는 큰 도약).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세련이 짝짝 박수를 쳤다.
“훌륭하네요. 제 대역으로 차고 넘치시는 것 같아요.”
오케이 사인이었다.
*
감독은 계약을 위해 대역 발레리나를 데리고 돌아갔다.
그 후에도 유명과 세련은 늦게까지 연습하고, 밤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누나, 안가요?”
“응. 금방 갈게. 먼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