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67
그 곳에는, 거대한 벚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가지가 버드나무처럼 휘청이며 머리를 숙이는 수양벚나무, 혹은 능수벚.
우아하게 떨어지는 가지마다 밤에 내리는 별처럼 새하얀 꽃송이를 한껏 머금고 있다.
그 신비스러움에 잠시 다들 말을 잇지 못했다.
“와···”
“이거…수령이 얼마나 될까요?”
“50살은 족히 넘었을걸. 이 동네에서 장군님이라고 불렀다더라고.”
“너무 예뻐요···”
“많이 봐둬. 어디 재벌가 사유지로 이식할 거라고 하더라. 이 풍경도 올해가 끝이야.”
나무를 멍하니 바라보던 것도 잠시, 그들은 셋업을 시작했다.
마침맞게도 달은 휘영청 만월.
조명은 약간의 보조만 해주면 될 뿐이다.
새하얀 연습복 차림의 화란과 팬텀은 발레슈즈를 신고, 벚나무 아래 마주보고 섰다.
바닥은 온통 떨어진 꽃잎들로 분홍색 융단이 깔려있었다.
감독이 음악을 틀었다.
지젤과 알브레히트가 사랑에 빠질 때의 음악.
“소리는 다 후시(*편집과정에서 따로 녹음하여 삽입하는 것)로 딸 거니까 걱정말고, 자연스럽게 화란과 팬텀이 되어서 움직여 보십시오. 이야기를 해도 좋고, 춤을 춰도 좋고…분위기대로 마음가는대로요.”
평소와 달리, 세련이 먼저 움직였다.
맥주 한 잔과 달밤의 분위기에 한껏 도취된 모양이었다.
“아하하하–”
맑게 웃음을 터뜨리며 유명의 팔목을 잡고 이끈다. 따라오는 유명은 이미 팬텀의 연기에 들어갔기에 얼떨떨한 표정.
“여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에요. 예쁘죠?”
봄의 싱그러움을 한껏 담고 팬텀을 올려다보는 화란의 반짝반짝한 눈빛.
팬텀의 눈동자에 서서히 색이 깃든다.
“음- 음음-”
허밍을 낮게 흥얼거리던 세련이, 자신의 허밍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깨끗하다.
평소엔 질투로, 경쟁심으로, 욕망으로 습한 기운을 뿜어내던 발레리나라 해도
음악이 시작되고 춤을 출 때만큼은, 경건할 정도로 깨끗한 열정.
그 투명함에, 비틀린 마음이 건드려져 버린 팬텀이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제 손으로 가면을 벗어 던졌다.
들킨 적은 있어도, 스스로 가면을 벗어보기는 처음.
‘도망치겠지.’
소리지르며 달아나는 그녀를 상상하며 팬텀이 조소를 지을 준비를 할 때,
흔들림 하나 없이, 시선을 부딪혀오며 그녀가 맑게 웃는다.
“같이 춤출까요?”
그 말은, 첫 만남에서 팬텀이 화란에게 내밀었던 말.
발레의 신이 자신을 선택해주었다.
그녀에게만은, 그의 흉측한 얼굴이 의미가 없다.
발레에 미친 그녀는 아름다움과 추함에 개의치 않고 발레 그 자체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녀에게 팬텀과 발레는 동격의 존재이기에.
아아…
손이 잡힌다.
화란의 손에 이끌려, 나무 아래 선 그가 목을 꺾어 위를 바라본다.
그 때, 바람이 분다.
“클로즈업! 클로즈업!!”
떨어진 꽃잎과, 바닥에서 날아올린 꽃잎들이 팬텀의 몸을 휘감아 돈다.
마치 꿈결같은 풍경.
‘아름다운 것은 발레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손바닥을 들어 꽃잎 하나를 쥐어챈 그가, 화란에게 시선을 내린다.
아름다운 것은···
시선이, 순간 광폭해졌다.
화란에게 고정된 시선에는 더 이상 객관성이 없었다.
*
“와, 레전드다. 난 진짜 천재인가봐.”
다음 날 촬영장.
어제 찍은 화란과 팬텀의 댄스 장면을 모니터링하던 촬감이 자뻑에 도취되었다.
급조된 촬영을 마치고도 한 잔을 더 마시고 헤어졌기에, 아직까지 숙취가 남아있는 퀭한 얼굴의 최촬감은 입꼬리만은 양껏 올라가 있었다.
“저도 보겠습니다.”
기감독이 머리를 들이밀었고,
“앞으로도 촬영은 취중에 할까요, 기감독님?”
“…일리있는 주장입니다. 촬영 중에 먹는 맥주값은 영수증 올리시면 경비처리해드리겠습니다.”
감독이 농담이라기에는 너무 진지한 얼굴로 받아치는 말을 듣고 세련이 풉- 웃음을 머금었다.
“감독님도 어떨 때 보면 재밌으시지 않아?”
“진심이실걸요.”
유명도 이렇게 대답하면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참 분장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세련의 대역인 문수진이 다가온다.
“저…이거 오빠 아니에요?”
수진이 내미는 것은 . 표지에는 쑥쓰럽게 웃는 유명의 얼굴이 커다랗게 박혀 있다.
“어어…나네. 내 눈앞에서 좀 치워줘. 눈 뜨고 못 보겠다.”
“와- 대학내일 표지모델같은 건 엄청 대단한 사람들이 하는 줄 알았는데. 내 눈 앞에 있다니.”
“나는 그런 걸 찍기엔 너무나 평범하구나···”
“앗, 그런 뜻이 아니구요! 오빠도 엄청 대단하죠!”
금세 얼굴이 달아올라서 손을 내젓는 수진을 보고 주변의 웃음이 터진다. 촬영장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다. 복잡다단한 사정들로 참여를 고민했던 것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슛에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컷- 한번 더 갑시다.”
“컷- 한번 더.”
“컷- 아…음···”
한 컷에서 벌써 30테이크 째.
기감독의 집요함은 나날히 더해져가고 있다. 특히 유명에게는 기대치가 과도할 정도다.
조감독은 쌓여가는 컷들을 보면서, 감독이 도대체 무엇을 끄집어내고 싶은 것인지 궁금했다. 그의 눈에는 전체가 다 오케이 컷이다.
“제가 정확한 디렉션을 드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연기는 좋지만 뭐가 걸리는데…그게 뭔지 저도 확실히 잡히지가 않아서···”
“아니에요. 제가 제대로 못하고 있는거죠. 좀 더 분발해 보겠습니다.”
“아…분발! 하지 마세요!!”
“네···?”
기감독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무릎을 쳤다.
“뭐 때문인지 알겠습니다. 존재감이 과해요.”
“네??”
이런 지적은 전생 현생 통틀어 처음이다. 유명의 표정이 흔들렸다.
“여기가 화란이 지젤 1막은 잘하는데 2막이 잘 되지 않아서, 팬텀이 샘플을 보여주는 씬이잖아요.”
“네, 그렇습니다.”
“팬텀이 가르치는 게 동작이나 아름다움보다는…스산함인데요”
지젤 2막.
알브레히트의 배신을 알고 미쳐서 죽어버린 지젤.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처녀귀신인 ‘윌리’가 된다.
이란 작품이 발레리나의 깊이를 볼 수 있는 척도로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막의 발랄한 마을처녀인 지젤은 ‘생기 넘치는’ 캐릭터인 반면, 2막의 지젤은 ‘생기 없는’ 유령.
그 극단적인 캐릭터성을 둘 다 표현해내는 발레리나의 예술성이 관전 포인트인 것이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스산함을 표현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부족한가요?”
“인간으로서는 나무랄 데 없습니다. 하지만 팬텀이니까요.”
아···
“편집으로 보정하기는 하겠지만, 인간이 따라올 수 없는 레벨의···’진짜 귀신인가’ 싶을 정도로 흐릿하지만 아름다운 지젤을 춤추는 팬텀을 보고 싶어요.”
유명이 대답을 잊었다.
이번 생에 와서…존재감을 덜어내는 연기가 필요할 줄이야.
“조금…시간을 주십시오.”
“제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다른 배우가 이 정도 해냈다면 충분히 만족했을텐데···”
“…아닙니다. 2주 정도 여유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그 씬의 촬영이 뒤로 미뤄졌고,
유명에게는 커다란 숙제가 떨어졌다. 참으로 아이러니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