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84
그리고 곧 하린의 모습이 오늘에 국한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오. 선배님.”
“하린이 오늘도 졸리구나?”
연기선생님 역의 40대 배우 배옥진이 웃으며 하린에게 말을 건다. 안면이 있는 사이인 모양. 차하린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멍한 미소를 짓는다.
“요즘 스케줄 많아?”
“네에에…일평균 2시간 취침이에요···”
“쯧쯧, 애 잡겠네 잡겠어.”
이후 서브여주인 정준희가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거의 동시에 도착한 것이 백승효와 이규성.
그리고 피디와 작가가 등장했다.
“다들 오셨죠? 자기소개 한 번씩 하고 시작합시다. 하하. 저는 다 아시죠? 주일호입니다.”
피디가 먼저 인사를 했고,
“KBK와는 첫 작품인 육미영입니다. 다들 연기 잘하는 배우분들만 모셔서 기대가 큽니다.”
작가는 배우들을 치켜세우는 인사와 함께,
“가끔 촬영장에도 가보고 싶긴 하지만, 시간 관계상 대본쓰기만도 바쁠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리딩 하실 때, 제 머리속에 ‘배역’들의 이미지가 좀 더 구체화 될 수 있도록 다들 힘 좀 주고 연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슬쩍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대사 쟁탈전’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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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듯이
리딩은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대략적인 캐릭터를 조율하는 자리.
원래라면 슛에 들어갈 때만큼 대사에 힘을 주고 읽지는 않는다.
그런데 작가가 ‘연기’를 주문했다.
신인 작가라면 감히 하기 힘든 얘기겠지만, 연달아 히트작을 낸 작가님이 아니시던가.
-제 머리속에 ‘배역’들의 이미지가 좀 더 구체화 될 수 있도록, 다들 힘 좀 주고 연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별 것 아닌 말이 배우들에게는 어떻게 번역되어서 들리냐면,
-잘해봐. 그럼 대사의 양도, 킬링 파트를 가져가는 비율도 늘어날지도 몰라.
금단의 사과를 따먹어보라고 유혹하는 뱀의 목소리로 들린다.
제 배역의 비중을 더 늘리기 위해서,
혹은 다른 배우의 비중에 침탈당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 이 곳 리딩실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여주 김하나(차하린 분)는 아픈 할머니와 단 둘이서 살고 있는 씩씩한 소녀가장.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꿈을 꾸기에는 너무 척박한 환경. 그녀는 조금이라도 꿈에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 위해 굴지의 매니지먼트 ‘스타기획사’에 로드매니저로 입사하게 된다.
그 곳에서 연기력으로 이름 높지만 오만한 남주 권도준(백승효 분)의 로드 매니저가 되면서 이 세계의 만만치 않음을 배워나가게 되고, 권도준 역시 김하나를 만나고 세상이 모두 자신 마음대로 되지는 않음을 배워나가며 둘은 서서히 서로에게 빠져들게 된다.
권도준의 라이벌배우 탁규민(이규성 분)은 김하나를 좋아하는 서브남주로, 여배우 류준경(정준희 분)은 권도준을 탐내는 서브여주로 등장하는데, 이 둘 사이에도 미묘한 기류가 있어 복잡한 사각관계가 될 예정.
“배우들부터 인사할까요?”
피디의 말에, 주연 배우들이 먼저 인사를 한다.
유명은 몇 개월간 함께하게 될 또래 배우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안녕하세요, 권도준 역을 맡은 백승효입니다. 연기파 배우 역할이라 부담도 되고 기대도 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선을 확 사로잡는 남자다운 얼굴의 백승효는 목소리마저 중저음이다. 올해 27세가 된 5년차 배우로,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최근 핫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 중 하나이다. 골수팬이 많다는 소문.
“김하나 역의 차하린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전히 힘빠진 말투로 여주가 의욕없이 인사했다. 아역으로 시작하여 외모도 연기력도 수준급으로 잘 자랐다는 평판을 얻고 있고, 유명보다 어리지만 연예계 12년차 대선배이다. 뭔가 난해한 캐릭터는 아직 판단보류.
“류준경 역의 정준희입니다. 저와 딱 맞는 여배우 역으로 캐스팅되어서 무척 기뻐요. 잘 부탁드립니다!”
애교있게 인사하는 이 사람은 3년차 막 신인 티를 벗은 여배우. 전생엔 적당히 조연급을 오고가다 나이 들어서는 케이블 패널로 자주 얼굴을 비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은…
“탁규민 역의 이규성입니다. 육미영 작가님 작품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매력적인 배역으로 섭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명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말에 여러 가지 ‘의도’가 묻어난다.
최근 잘나가는 작가에 대한 아부, 섭외’해주셔서’라는 자존심을 슬쩍 세우는 어휘 선택.
물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몇 마디 말로 평가하려는 건 아니다.
몇년 후, 이 배우는 사고를 친다.
그 사고는 쌓아온 인성의 부족함을 말해주는 종류의 사고라서, 아직 사고를 치지 않은 시점이라 해도 그에 대해 좋은 감정이 들지 않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백승효보다 높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10대 팬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대세 배우이다. 하얗고 순한 얼굴과 방글방글한 미소, 마치 아이돌같은 외모에, 연기력도 그 나이 또래에서는 괜찮은 편에 속한다.
이렇게 네 명이 드라마 의 주축들.
작가가 연기력에 꽂혀있다더니, 확실히 연기력 구멍이 될만한 인물은 없는 캐스팅이다.
20대 배우들 중에서는 최소 중상급 이상이라고 할 만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
그리고, 유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허리를 숙였다.
“윤보형 역으로 브라운관 데뷔하게 된 신유명이라고 합니다. 저에겐 모두 선배님들이니 아낌없이 조언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겸손하고 힘찬 인사에, 대부분의 선배 배우들과 스탭들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한 명, 피디를 제외하고.
*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나머지 조단역 배우들과 스탭들의 소개가 있은 후, 리딩이 시작되었다.
“씬 1. 스타기획사 정문 앞. 거대하고 현대적인 건물. 위압적인 건물을 앙각(*카메라가 아래에서 위로 향함)으로 올려다본다. 화면 돌아가면 대조적으로 하이앵글에서 내려다보여 작아보이는 사람. 어색한 정장을 입고 있다.”
찰칵- 찰칵-
조연출이 1회의 지문을 읽기 시작하고, 오늘의 리딩 장면을 기사로 내보내게 될 기자도 사진을 연신 찍어댔다.
그리고 여주인공의 첫 대사.
“와…여기가 스타 기획사구나.”
엇-
유명이 놀랐다.
차하린의 목소리가 한껏 생기발랄하다.
“여기서 일하면 배우들도 많이 만날 수 있겠지? 아, 나도 연기자가 되고 싶은데 가난이 죄다, 죄야. 그래도 매니저하다가 잘 보여서 데뷔한 케이스도 있다니까. 아참, 그건 배우가 아니라 개그맨이었나?”
한탄마저도 밝다.
혼자말을 중얼거리는 푼수끼 있는 면모와 더불어, 좋지 않은 환경에도 쾌활함을 잃지 않은 여주 하나의 긍정적인 성격이 몇 문장만으로 잘 전달된다.
작가가 주문한대로, 제대로 힘을 넣은 대사. 내내 멍하던 눈도 초점이 돌아와 있다.
연기에 돌입하면 ‘바뀌는’ 타입인가.
“씬 2. 방문자 목걸이를 걸고 기획사 복도를 걷는 하나. 늘어진 가방이 복도의 액자에 걸리고, 아슬아슬하게 달랑이던 액자는 결국 떨어져 와장창 부서진다 첫날부터 사고를 친 하나가 하얗게 질려 있는데, 지나가던 규민이 발견하고 말을 건다.”
“괜찮아요?”
시작부터 차하린이 텐션을 올려놓자, 서브남주 이규성도 힘을 바짝 넣는다.
10대 소녀들의 눈이 하트가 될법한 순수한 미소를 걸고 친절하게 손을 내미는 규민. 액자를 깬 실수를 뒤집어 써주기까지 한다. 하나는 규민에게 한껏 호감을 느낀다.
그리고, 주인공 도준의 로드매니저로 배정받는 하나.
“저렇게 어린 여자애, 그것도 초짜를 로드로 붙인다구요? 사장님 드디어 정신이 나가셨어요?”
“그럼 어떡해! 니놈이 싸가지가 없으니까 로드가 붙어있질 않는데!”
까칠하고 오만하며 혼자 잘난 맛에 살다가 여주를 만나고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드라마 전형적인 남주의 표본이 여기 있다.
도준는 매번 투닥거리는 사장과의 담판에서 패배하고 결국 하나를 로드매니저로 받아들이지만, 스스로 뛰쳐나가게 하려고 온갖 트집을 잡는다.
“으아아! 권도준 대실망! 팬이었는데 인성파탄자였어!!”
하루종일 도준의 트집에 시달린 하나가 꿍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공원에서 나타나는 익숙한 형체.
보형의 첫 등장이었다.
*
“하나야.”
“어? 보형아. 뭐야 너 옷이 왜 이래?”
“우리 집 망했어···”
“뭐?”
“입을 옷도 없고…오늘 잘 데도 없어···”
“어떡해! 너 괜찮아? 부모님은?”
“도망…가셨어. 나만 두고. 고양이는 데려가셨는데…내가 고양이보다 밥을 더 많이 먹어서 두고 가셨나봐…허어엉.”
작가가 극찬을 거듭했다던 신인연기자에 대한 소문은 이미 배우들도 스텝들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잘 하나 두고보자는 심정으로 도끼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그들의 마음이 말랑하게 풀어진다.
“혹시 너희 집에 신문지 있어? 신문지가 보온이 잘 된대. 노숙자 아저씨들이 괜히 신문지덮고 자는 게 아니라더라. 박스가 있으면 좋은데…박스는 너무 사치겠지? 내가 너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랐지… 나는 아직 젊으니까 신문지로도 괜찮을거야···”
일반적인 연기와 질감이 미묘하게 다르다.
‘뭐지? 뭔가 대사가 아니라 노래를 듣는 듯한···아…!’
특히 미간에 주름을 깊게 지으며 대사에 귀를 기울이던 백승효는, 그 연기가 색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를 알았다.
운율.
훈련되지 않은 사람이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연기의 기본기를 탄탄히 익힌 백승효는 알아챌 수 있었다.
일상적인 대사보다 훨씬 리듬을 타며 대사를 친다.
마치 단순한 ‘일상극’이 아닌 것처럼.
같이 대사를 주고받던 차하린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사를 주고받는 것에 불과한데도, 느낌이 포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