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87
그렇기에 드라마에서는 연기력이 더욱 티가 난다. 영화처럼 맘에 안 든다고 무한정 다시 찍기도 어렵고, 빡세게 후보정이 들어가지도 않으니까.
유명은 오늘은 넉넉히 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한 후, 인사를 드리고 촬영장 분위기를 파악 중이었다.
아- 아-
목을 풀고 관절을 가볍게 스트레칭한다.
대본을 넘기면서 형광펜으로 칠해진 자신의 대사를 다시 한 번 복기한다.
그 때 누군가 유명의 팔을 툭- 건드리고, 유명이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신인연기자- 아…안녕.”
“안녕하세요. 힘이 넘치시네요. 부럽다.”
오늘도 흐느적거리며 해파리같이 인사하고 의자 위에 늘어지는 형체는 차하린. 벌써 콜타임인가 하고 시계를 보니 아직 30분 전이다.
자신은 신인이라 그렇다지만, 12년차 배우가 매번 일찍도 오네.
“오빠 연기 어디서 배웠어요?”
“어? 학교 연극팀에 있긴 했는데, 따로 배웠다고 할만한 건 없는데?”
“그래요? 그 특이한 연기는 뭘 보고 샘플을 딴 거지···”
혼자 중얼거리는 하린의 말을 듣고 유명이 움찔했다.
그녀의 말대로 유명이 보형을 완성시킨 데 중요한 참고가 된 것이 있다.
주인공 김하나의 수호천사.
다정하고 포근하고 감미로운 ‘그녀의 편’이지만,
때로는 칼날같이 예리하고,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통찰력이 있는 존재.
평소에는 귀여움 속에 발톱을 감추고 있다가, 필요할 때 순식간에 상대를 슥삭할 수 있는 미지의 존재라면, 그에게는 무척 익숙한 녀석이 있지 않은가.
{얘, 생기를 다루는 방법이 특이하당. 재밌넹.}
휘휘 돌다 하린의 어깨에 척하니 내려앉는 푸른 형체.
미호.
유명이 만들어낼 보형의 원형은, 저 존재에 기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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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과 알맹이
“할머니! 누가 집 앞에 이거 버려놓고 갔어!”
“응? 이게 머시여?”
“진공청소기네! 이거 있으면 할머니 이제 허리 숙이고 빗자루로 바닥 안 쓸어도 된다!”
“아니 요러코롬 멀쩡한 물건을 누가 버렸대? 천벌받게스리…쯧쯧.”
“천벌은…안받지 않을까···? 꼭 필요한 사람한테 버리고 갔잖아···”
누가 봐도 새것인 청소기를 가지고 들어와서 누가 버리고 갔다고 우기는 보형.
“하나야 오늘도 늦어?”
“응. 할머니 나랑 안먹으면 밥 잘 안드시니까 좀 챙겨줘. 때마침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에휴.”
“오늘도 야근시키면 권도준 콧등을 할퀴어 버려.”
“으하하, 미미처럼? 상상만 해도 신난다!”
하나가 로드 일로 매일 야근을 거듭하자, 그녀를 대신해 할머니 밥을 챙기고 고양이를 돌보는 보형.
“미미야-”
냥-
“네 주인은 참 이상해. 저렇게 힘들고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어떻게 매일 밝고 씩씩할까? 너도 주인 닮아서 이렇게 별종이야? 산책하는 거 좋아하고?”
냥-
“그래, 너도 귀여워.”
고양이인데도 애교많고 산책을 좋아하는 녀석과 두 눈을 마주하고, 똑같이 앙큼한 표정을 짓는 보형.
그가 연기하면 그 공기가 느긋하게 풀린다.
하나도 할머니도 고양이까지도 웃음을 머금고 있다.
“보형아! 같이 밥먹자!”
어느덧 그를 ‘보형’이라는 극중 배역으로 부르는 배옥진, 이옥형 등의 여자 선배님들은, 유명의 원래 성격이 느긋하고 애교많은 성격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촬영은 벌써 2주차에 접어들었다.
매일같이 촬영장에서 부대끼는 배우들과도 많이 가까워졌다. 그것엔 그들이 유명의 연기를 처음 봤기에, 보형의 연기가 유명의 실제 성격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한 몫을 했다.
누구나 경계를 풀게 만드는, 다정다감하고 싹싹한 하나의 집사.
배우들 사이의 관계는 좋았다.
백승효는 무뚝뚝하지만 예의바른 편, 정준희는 까탈스러워 보이지만 얘기하다보면 털털한 성격이다.
이규성은, 아직은 별 기미 없이 생글생글 웃음을 뿌리고 다니고 있다.
차하린은 쉬는 시간이면 언제나 늘어져 있다가, 큐 사인이 떨어지면 아껴둔 에너지를 모두 분출하듯이 생기발랄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 미호가 언급했던, 생기를 아끼고 아껴뒀다가 카메라가 돌아갈 때만 퍼붓는 타입. 그 에너지는 실로 강렬해서, 왜 원생에 저런 배우가 탑까지 가지 못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이다.
문제는 피디였다.
“커트- 하나, 좀더 청초하고 발랄하게!”
“커트- 하나 도준한테 덤비는 게 너무 과격해. 여주인공이잖아, 좀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표정 지어봐요.
또다.
주피디는 하나가 연기할 때마가 건건이 NG를 냈다.
이유는? 여주인공답지 않아서.
‘하아···’
보던 유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옥탑방 고양이’ 이후로 떠오른 자립적이고 생활력 강한 여주인공.
파리의 연인은 이 공식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리고 육미영 작가는 그 공식에 새로운 함수를 도입해, 이 시대에서는 앞서나간 트렌드를 그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감각을 찍어내기엔 주피디의 감성이 너무 올드하다.
5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잘나가던 피디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감을 잃었다는 평판을 달고 주말드라마로, 아침드라마로 급이 떨어져 갔다.
그는 여전히 90년대 감성-남주가 멋있고 여주는 청순하고 귀여워야 드라마가 뜬다는 공식을 고집하고 있다. 현재까지 그것에 가장 배치되는 배역이 여주인공 하나였다.
“어후, 장면 하나하나 참 힘들게 찍는다. 차하린씨 내 말 이해 못하겠어? 그렇게 억척스러워 보이게 말고, 보는 사람이 절로 미소가 지어질 만큼 애처롭고 러블리하게. 이해가 안 되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획사가 조그맣다더니, 피디는 매번 막말이다. 피디의 핀잔에도 차하린은 늘 고개를 숙일 뿐 자신의 연기를 지속하고 있다.
대단한 정신력이다.
그런데 곧,
유명도 정신력을 시험당하는 때가 왔다.
3화, 보형의 태세가 급변하는 장면에서.
*
나란히 벽에 기대앉은 하나와 보형의 투 샷.
“하나야 왜 그래.”
“아니, 별 일 아닌데…그냥 오늘···”
슛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하린의 눈에서 눈물이 쉽게 또르르 구른다.
좋은 집중력이다. 그 설움을 훅 쥐어담으며 유명도 함께 눈물을 그렁였다.
“오늘 뭐? 누가 그랬어어.”
“야…니가 왜 울어…흐엉···”
보형이 함께 울먹이자 하나가 기어코 울음이 터진다. 1, 2화 내내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같은 모습만 보여온 하나였기에 그 울음이 더욱 안쓰럽다.
“그냥 오늘따라 기분이 그러네. 하아…보형아 사는 게 참 어렵다 그치?”
“뭐가 제일 어려운데?”
“할매도 자꾸 아프고…할매 생각하면 더 돈이 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욕심을 못 버리고 연예계 주변에서 맴도는 나는 한심하고…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상사는 트집잡고, 구박하고, 턱끝으로 이거 가져오라 저거 가져오라…하아, 갑의 갑질에 슈퍼 을은 웁니다.”
“상사라면…권도준?”
다음 씬을 위해 스탠바이 중이던 백승효는, 자신의 배역 이름에 드리운 싸늘함에 흠칫 놀랐다.
그는 앞 씬의 촬영장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웅···”
“하나야.”
뭘까, 이 위화감은.
“네가 진짜 갑을 안 만나봐서 그런데 갑은 그냥 갑이야. 갑질따위 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모시거든. 갑’질’은 진짜 갑이 아니기 때문에 하는 거란다.”
“어? 그러네?”
“계 같은 게···”
“…개같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개 말고 계.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먹이사슬에서 바닥에 있었던 놈들이 조금만 올라갔다 싶으면 갑질을 한다고.”
“하하하. 개가 계야?”
하린이 다시 밝게 웃음을 터뜨릴 때, 승효는 오싹함을 느꼈다.
나란히 앉아있기에 그녀는 보지 못하는 그의 표정이 카메라에 잡히고 있다.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다감하고 장난스러운데 표정만이 분리되어 있다.
무척 냉소적인 표정.
차가운 표정을 짓는 것은 쉽다. 리드미컬하고 따뜻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저 친구만큼은 못하겠지만 하라면 할 수 있다.
그런데, 표정과 목소리의 온도를 저만큼 분리할 수 있는가?
진실된 표정은 진실된 생각에서 나온다.
진실된 음성도 진실된 생각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동시에 두 가지의 감정을 모두 진실로 느껴지게 하는 것은…정말 어렵다. 뇌가 두 개인 사람은 없으니까.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 우는 목소리를 내보라. 어느 한 쪽은 ‘지어낸’ 티가 안날 수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자연스러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