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89
“컷! 컷! 컷!”
유명은 혀를 내둘렀다.
독한 배우다. 공손을 가장하면서, 하는 짓은 피디와의 전면전이 아닌가.
“참,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야.”
촬영 모습을 보며 함께 대기 중이던 배우 배옥진이 혀를 끌끌 찼다.
“소녀가장이라 그런가, 저걸 다 참네.”
“소녀가장요? 하린이가요?”
유명이 깜짝 놀라 물었다.
“즈이 집에서 말고, 기획사에서 소녀가장이라고. 다 기울어진 소형기획사에서 의리 지킨다고 나오지를 않잖아. 거기는 하린이 말고 돈 되는 연예인이 없으니 쟤만 굴리고. 쟤 스케줄 봐. 저렇게 무리하면서도 촬영장에 절대 지각은 안해요. 애가 요령이 없어.”
“그런···”
“연기력 되고, 외모 되고, 십년 넘게 예의바르고 성실하다는 평판이 자자하니, 옮긴다고 하면 계약하자는 곳은 많을텐데…전에 우리 회사 올 생각 없냐고 물었더니 어릴 적부터 자기 서포트해준 사장님이라고, 자기도 배신하고 나가버리면 회사 망한다고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하린의 사정을 듣고 유명은 말문을 잊었다.
고작 스물 둘짜리 어린 애가. 지고있는 무게가 많기도 하다.
그래서 원생에서 그녀는 더 뜨지 못했던 걸까.
“유명이 너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많이 보고 배워. 어릴 때부터 연예계 생활하면서 저렇게 반듯하고 예의바르게 자란 애가 드물다. 그런 와중에 연기 욕심은 강해서 저러고 있네. 기획사만 좀 든든해도 저 정도 수모는 안 당할텐데.”
“…”
연기욕심. 그리고 연기 외적으로 발목을 잡는 요소.
그녀의 발버둥은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게 한다.
“컷- 차하린씨, 제발 좀. 응?”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시 꾸벅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보며, 유명은 울컥하는 기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
[이제 촬영 끝났겠네요. 오늘 본가로 간다고 하던데, 도착했어요?] [막 도착했습니다. 이 시간에 어떻게···] [선물이 있어요.] [또 무슨 선물요?] [조간신문 봐요. 재밌을 거에요.]밤샘 촬영을 마치고 집에 막 돌아온 길이었다.
피디에게 촬영 내내 시달린데다, 하린의 사정을 듣고 마음이 착잡해진 유명이 피곤한 몸을 누이는데, 또롱- 하고 문자가 왔다.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유석이었다.
{누구냥.}
‘문 실장님.’
{아, 재밌는 인간. 뭐라고 하냥?}
‘신문을 보라는데?’
지금 시간은 새벽 4시반.
낮 12시로 잡힌 콜타임 때 컨디션을 유지하려면 당장이라도 자는 게 맞겠지만, 그가 재밌다고 할만한 일이 보통 사건은 아닐 것 같아서 유명은 신문배달을 기다렸다.
탁-
30분쯤 후 들리는, 현관 앞에 신문이 던져지는 소리.
유명은 가족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문을 열고 신문을 가져왔다. 아버지가 보시는 경동일보.
펄럭-
신문을 죽 넘겨보던 유명은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유석이 말한 ‘재밌는 것’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지상파 피디, 대마초 상습흡연 의혹]지상파 피디가 대마초를 상습적으로 흡연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제보에 따르면 J씨는 99년부터 상습적으로 대마초를 흡입해 왔으며, 최근까지도 수 차례 구매 루트를 통해 구입해 왔다고 한다. 연예계의 마약 복용 문제는 몇 년에 한 번씩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나, 근절되지 않고 있다. 단체로 흡연하게 되는 대마초의 특성상 연예관계자들이 얽혀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유명이 신음소리조차 내뱉지 못하고 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것을 보고, 미호가 비집고 들었다.
{뭔컁. 엇…이거 주피디냥?}
‘그…런 것 같네…’
{잘됐당.}
‘뭐?’
놀란 유명의 음성과 대조되는 미호의 냉정한 목소리.
{드라마 중간에 이게 터졌다고 생각해 봐랑. 지금 떨궈내고 가길 다행이당.}
‘그건 그렇지만···’
{좀 소란스럽긴 하겠지만 작품을 위해선 다행이당. 감 떨어진 인간이 피디라 너도 갑갑했지 않냥.}
‘…’
{내일 촬영 취소되겠넹. 푹 자랑.}
쌩-한 결론을 내리고, 미호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리고 유명은 생각에 잠겼다.
어떤 마魔가 그를 진창으로 끌어내렸을까.
몇 년동안 히트작을 내지 못했다는 평가? 화려한 연예계의 뒤에 침잠한 어둠? 손만 뻗어도 너무 닿기 쉬운 유혹?
오랜 세월 이 세계의 외부자같은 내부자로 살아오면서, 마에 당해 사라져간 수많은 인물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안다. 마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마음 속에 있음을.
마에 당하지 말자.
유명은 씁쓸한 가슴 속에 다짐을 새겨넣었다.
*
역시나 다음날 촬영은 취소되었다.
당황스런 목소리로 연락온 조연출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며 정리되면 다시 촬영스케줄을 잡겠다고 했지만, 주피디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틀 후 쯤, 새로운 피디가 배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방 학 피디.
지난 주에 피디파업이 극적으로 합의점을 찾은 후 복귀한, 젊고 유망한 피디라고 한다.
정리와 셋업을 위해 1주 간의 휴식기를 가지고 다시 촬영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문유석이 유명을 호출했다.
이번에는 어느 고급 한식집. 내실 앞의 정원을 가로질러 얕은 내천이 흐르는 운치있는 곳이었다.
“주피디, 유명씨에게 내내 태클이었다면서요?”
유석이 웃으며 술을 따랐다.
“나한테 진작 얘기하지. 선물 괜찮았어요?”
그 술잔을 단번에 목으로 넘긴 유명이 조용히 응수했다.
“제 선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원래 계획하셨던 일인 듯 한데요.”
그 말에 유석이 움찔했다.
저건 떠보는 말이 아닌, 확신을 가지고 내뱉는 어조이다.
“어떻게 알았어요?”
“백승효 씨, 위약금까지 물고 이 작품으로 돌리지 않으셨습니까. 되리라는 확신이 있거나, 되게 만들 자신이 있으셨겠죠.”
유명이 확신한 이유는 그것만은 아니었다.
방학 피디가 새로 배정되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생각해냈다. 원생에서도 그가 피디였음을. 유석은 그때도 적절한 시점에 주일호를 날려버렸던 것이다.
“혹시 피디파업 때문인가요?”
“와, 지금 소름 돋으려고 했어요.”
유석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조금 가셨다.
“대본이 좋았고 황금시간대니 이렇게 급한 일정만 아니었어도, 아니 피디만 좀더 공신력이 있었어도 주연이 더 A급 배우에게 돌아갔겠죠. 그래서 일단 그 흐름에 편승하고, 피디파업이 끝나자마자 주피디님을 날려버렸다, 맞습니까?”
유석이 앞에 놓인 술을 천천히 마시며 시간을 벌었다.
그저 착하고 성실한 친구인 줄 알았더니…
“신유명씨, 이런 사람인 줄 몰랐네···”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습니다. 백승효씨 계약되어 있던 작품도 나쁘지 않았다는데 굳이 여기로 돌린 이유.”
“흠…알고 싶어요?”
“네. 최소한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와 일하길 바라니까요.”
유석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급하게 밥을 지으면 설익기가 쉽죠. 그래서 화력을 활활 올리거든요. 특히나 배가 고프면 더.”
“…?”
“KBK도, 주피디도 여러가지로 몰려 있는 상황이었어요. 이럴 때 판이 커지죠. 그래서 억지로 육작가도 갖다 꽂은 거고, 편성시간도 스텝도 홍보일정도…평소보다 몇 배 ‘밀어주는’ 구도가 됐어요.”
“…”
“승효, 괜찮은 배우지만 원래라면 이런 환경에서 고맙다고 떠받들리며 들어갈 급은 아니죠. 그런데 이렇게 급한 판에 ‘다른 계약을 깨고’ 와줬다는 것에 우리쪽 입지가 훨씬 올라갔어요. 이제 피디까지 바뀌면 다 깔린 판이죠. 뭐, 그런 거에요.”
“…그런 거군요.”
문유석, 역시 무서운 사람이다.
되도록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지난 번에 저한테 조언 하나 해주셨는데, 저도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 보세요.”
“먼저 짚고 넘어갈 게 있네요. 원래 계획되어 있었던 일을 저를 위해 한 것처럼 얘기해서 마음의 빚을 지우려는 ‘효율적인 방식’ 기분 나쁩니다.”
단도직입적인 유명의 말에 유석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 빚으로 뭔가 해보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그냥 신유명씨에게 그만큼 기대하고 있다는 의미로…아니에요, 변명이군요. 미안합니다.”
유석이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