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9
‘감정이 확확 변하는데도 캐릭터는 분명하게 느껴져. 김철수라는 인물의 성격이 목소리만으로도 상상이 갈 정도야.’
연출은 1장이 끝날 때까지 유명의 리딩을 끊지 못했다.
그리고, 유명과 비교되어 완전히 묻혀버린 박한상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저…저 새끼가···!’
*
첫 리딩을 끝내고 다른 사람으로 순번이 돌아가고 나자,
유명은 몸에 힘이 풀려 팔걸이가 달린 나무 책상의 등받이에 등을 미끄러뜨렸다.
‘달라. 이렇게 다를 줄이야···’
발성이 막힘없이 시원하게 공기를 가로질렀다.
맞받는 상대역의 기운에 내 대사가 먹혀 잠기지도 않았다.
고작 리딩인데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강의실답게 네모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천장, 그리고 네모 안에 찍혀있는 무수한 점들.
내가 점이니까 남들도 점일거라 생각했다. 누구나 이런 압박감을 이겨내면서 연기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보통은 네모라는 것을, 어느 정도의 반경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신만 몰랐던 것이다.
눈시울이 약간 뜨거워져 왔다.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연기는 늘 즐거웠다.
괴롭지만 즐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편안하고 즐거울 것이라니.
어떤 세상이 펼쳐질 지 상상이 가지 않아, 유명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오래 물 속에 있다 나온 사람이 육지에 오르면, 몇 배 몸이 가볍게 느껴지듯이,
오래 타인의 생기에 짓눌려가며 연기해온 그이기에 생기의 압박이 없어지자, 타인의 몇 배로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다는 것.
지금 그는 네모에도 갇히지 않은 천장 자체였다.
그리고 그 천장조차 그의 끝이라고 볼 순 없었다.
*
장장 두 시간만에 리딩이 끝나고 쉬는시간.
“신유명.”
“네!”
“전에 연기한 적 있어?”
철주의 물음에 유명은 잠시 고민했다.
원래의 삶에서는 이 공연이 그의 첫작이었고, 15년간 연기를 하다 회귀했다고 할 순 없으니···
“없습니다. 처음입니다.”
철주는 유명을 잠시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돌렸다.
그 때 한상이 유명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잠깐 나좀 보자.”
일방적으로 속삭이더니 밖으로 나가는 한상, 유명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안 보이는 복도 쪽에 도착한 한상이 띠껍게 짝다리를 짚고 섰다.
“야, 너 너무 나대는 거 아니야?”
“네? 제가 언제.”
“첫리딩에 왜 이렇게 오바해? 2학년이면 2학년답게 배우는 마음으로 조용히 참여하고 적당한 단역 받아서 데뷔할 생각을 할 것이지. 그리고 앉아서 읽기만 하는 리딩은 쉬워. 실제 몸쓰면서 대사 치면 그 리딩이 나오는 줄 알아?”
유명은 기가 찼다.
무슨 프로도 아니고 아마추어 판에서,
24살이 23살에게 갑질을 하고 있다.
원래 38살이던 유명의 눈에, 24살 애송이가 선배랍시고 훈계하는 꼴은 그야말로 같잖기 짝이 없었지만,
“그냥 열심히 한 건데 그렇게 보였으면 죄송합니다.”
“그래 임마, 잘 좀 하자.”
박한상은 유명의 어깨를 툭 치고 들어갔고,
유명은 다시 강의실로 들어가 박한상의 옆자리에 앉은 후,
[배역 지망표]김철수
곽기자
남사장
박한상의 지망표를 넘어다보곤, 똑같이 써서 제출했다.
사회인에겐 사회인의 복수 방식이 있었다.
*
서류신은 10시쯤 집에 들어왔다.
전공과목으로 빽빽한 3학년 1학기 수업 외에도, 오디우스의 봄 공연 준비로 눈코뜰새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가방을 열어 짐을 풀다보니, A4용지 한 묶임이 툭 굴러나왔다.
‘아, 이거 봐야 되지.’
류신은 이걸 써온 특이한 경영대생을 떠올렸다.
생긴 건 차분해보이는데 상당히 당돌한 후배.
초짜 연극인이 해온 극작이 대단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뭔가 남다른 구석이 있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대본을 폈다.
첫 장면은, 에이즈에 걸려 죽음에 임박한 프레디 머큐리의 독백으로 시작되었다.
[하루하루,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내 몸은 썩어가고 있지만, 정신만은 평온하다.내 곁을 지키는 짐과, 매일 찾아오는 메리. 나는 정상에 서 있을때보다도 덜 공허하다.]
You are my best friend -Queen
.
.
깜빡-
정신이 들었다.
류신은 맨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한 번도 집중이 깨지지 않고 대본을 끝까지 읽었음을 깨달았다.
손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식은땀이다.
‘얘…천재 아니야?’
류신이 눈을 부릅뜨고 대본을 다시 넘겨봤다.
단막극이기에, 시간과 장소의 변화는 주인공의 연기로만 환기시켜야 한다.
그런 시점들은 자신이 잡아 음향이나 연극적 장치를 넣어줘야 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프레디,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며 동작과 표정이 변한다.소년의 얼굴에서 청년의 얼굴로. 메리를 유혹하기 시작한다.] [프레디, 왼쪽으로 몸을 돌리며 분위기가 반전된다.
이성애자의 얼굴에서 동성애자의 얼굴로. 사방에서 남성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운데 선 주연 배우가 몸을 돌리는 것만으로, 그리고 그 때의 연기만으로 장면 전환을 할 것을 요구하는 대본.
그것도 일반일 때는 오른쪽, 이반일 때는 왼쪽이라는 메타포를 써서.
말도 안되는 요구이다. 말도 안되는 요구인데···
‘상상이 가.’
신들린 연기력을 가진 한 배우가,
몸을 조금 비트는 것만으로 성격이 변하고, 나이가 먹는 것을 연기한다.
류신은 이 가당찮은 대본을 읽고 상상해버린 것이다.
그 연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뭐하던 놈이지?’
류신이 그 상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유려한 대본이 몰입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건 절대 초보의 대본이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필명으로만 활동하던 각본가이거나, 혼자서 연습했다면 최소 수십 편 이상 습작이…아니야. 그래도 말이 안 되는데.’
대사에는 호흡과 운율이라는 것이 있다.
대본을 극으로 만들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구어로 내뱉었을 때 자연스럽게 들리는 문장을 쓰기가 어렵다. 소설을 대본으로 만들 때 따로 각색가가 반드시 붙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 대본은 어떤가.
프로 시나리오 작가를 넘어, 아예 프로 배우가 썼다고 해도 믿길 정도로 입에 붙는 자연스러운 대사들.
그 뿐인가.
대화가 맞물릴 때의 긴장감, 역마다 확고하고 매력적인 캐릭터, 드라마틱하게 이어지는 장면의 흐름까지, 15분 중 단 1분도 허비하지 않고 ‘극적재미’를 향해 꽉 짜인 대본.
‘이런 새끼가 왜 연기를 하겠다는 거야. 자기 재능을 모르나?’
류신은 초조하게 손끝을 물어뜯으며 한참 방 안을 배회하다가, 가방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어 들었다.
아까 돌린 조모임 연락처 리스트였다.
RRR-
두 번 정도 신호가 가고 달칵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