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90
그런데 유명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얘기하신 사정들이 부수적으로 거들었을지는 몰라도, 본질적으로는… 실장님이 백승효씨 이 작품으로 뺀 건 그만큼 대본이 좋았기 때문이고, 주피디님을 날리는 결정을 내린 건 ‘좋은 작품’에 방해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굿엔터에 몸담은지 한 달여.
15년을 업계의 그림자로 살아가면서도 몰랐던, 직접 속한 후에야 알게된 사실들이 있다.
문유석 실장, 무서운 사람이긴 해도 배우를 돈벌이 도구로만 보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
일을 할 때 당장의 수익보다 배우의 커리어, 작품성을 고려하는 사람이라는 것.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유명의 말에, 문유석은 잠시 말을 잊었다.
“진심을 효율로 포장해서 얘기하는 습관, 별로 안좋습니다. 나중에는 진심을 얘기해도 믿기 어려워질테니까요.”
그 말에 잠시 벙찐 표정을 짓던 유석은,
하하하하하하-
엄청난 폭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 지나친 웃음으로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낸 그는,
“아, 한 방 먹었네요. 이렇게 혼난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요.”
시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아···’그들’의 방식을 혐오하면서도, 나도 보고 배운대로 하고 있었네요. 주의할게요.”
그리고 비워진 술잔을 채우고, 건배를 제의한다.
“그래도, 배우 신유명을 응원하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그건 믿어주세요.”
챙-
유명이 대답없이 잔을 부딪혔다.
초가을의 정원에 맑은 술잔소리가 메아리친다.
그날 그들은, ‘진짜 동료’의 문턱에 살짝 들어섰다.
*
예상 외의 휴식기에도 대본을 파던 유명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기도한 감독의 정신없는 목소리.
“유명씨, 혹시 제가 8월 말에 소식 안 전했습니까?”
“무슨 소식요?”
“어…얘기한 줄 알았는데 편집한다고 정신없어서 깜빡했나 봅니다. 저희 영화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작으로 선정됐습니다.”
“네??”
유명이 화들짝 놀랐다.
감독님…아무리 작품 외적인 부분은 엉성하다지만 이걸 깜빡하는 건 아니잖아요···
“다음주가 벌써 영화제라 저는 내려갈 건데…유명씨는 한참 드라마 촬영 중일테니 오시긴 어렵겠지요?”
연예계에 소문이 파다한 피디마약사건도 당연히 모르고 있고.
“시간 됩니다! 저도 갈래요!”
그렇게 부산행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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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와, 이건 정말 혁명입니다!”
기도한이 감탄을 거듭했다.
2004년 개통된 KTX를 처음 타고는 너무나 신기한 모양.
너무 빨라서 어지럽다, 이거 사고나면 비행기 사고처럼 몰살 아니냐, 서울 부산이 3시간 반밖에 안 걸리면 이제 정말 생활권이다 등의 얘기를 하면서 유명의 동의를 구한다.
“그러게요. 정말 빠르네요.”
2010년 후반에 SRT가 개통되면서 강남-부산 2시간 반 시대가 열린다고 얘기하면 기함하시겠지.
기감독의 연락을 받고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을 결정했지만, 바로 출발할 수는 없었다.
드라마 스케줄이 싸그리 날라갔지만, 작은 잡지 인터뷰며 미용실 재방문 등의 자잘한 일정들이 남아있었기 때문. 그 사이에 기감독은 먼저 개막식을 다녀왔고, 볼일이 있어 다시 올라왔다가, 유명과 함께 다시 내려가는 중이었다.
‘아쉽네, 개막식.’
부산국제영화제는 유명도 여러 번 갔었다. 물론 배우 자격으로 간 적은 없다. 언제나 관객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오지 않는 해외 수작들이 상영되는 PIFF(현재는 BIFF)는 그에게 꿈에 가까운 장소였다. 유명한 배우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자신도 이제 배우이면서도, 유명은 그런 관객같은 생각을 했다.
“그럼 편집은 완전히 끝난 건가요?”
“피프가 9월 이내 완성 가능한 작품만 출품 가능하대서 간신히 맞췄습니다. 그나마 세련씨가 따로 번역가를 붙여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자막도 제대로 못 넣었을 뻔 했습니다. 거의 마지막 제출이었다고 하더라구요.”
“다행이네요.”
그의 입에서 세련의 이름이 나오자, 가슴이 조금 찌릿하다.
“누나는…영화제는 참석 못한대요?”
“네. 요즘 바쁘다고 하시더라구요.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영화제 선정 소식 알리면서 번역가 붙여주겠다고 한 거였습니다.”
“…그렇군요.”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영화 말고는 모두 무딘 기감독이지만, 그래도 얼굴에 어린 한숨을 들킬까봐서.
“영화는 잘 빠졌는지요?”
“네. 유명씨는 영화제 가서 처음 보시게 되겠군요. 뭐 이번엔 배우들이 다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아, CG도 깔끔하게 붙었어요. 보면 놀라실 겁니다.”
“카테고리는 뭔가요?”
“뉴 커런츠로 배정받았습니다.”
출품작들은 영화제에서 자체 분류하여 카테고리를 배정하게 된다.
뉴 커런츠.
아시아권 신인 영화 감독들의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장편의 경쟁 부문이다. 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발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가장 메이저한 부문이며, 뉴커런츠상은 부산국제영화제의 대상 격으로 간주된다.
“일단 오늘 가자마자 두 편 예매해뒀습니다. 내일 오후에는 대영시네마에서 저희 작품 첫 상영이 있구요.”
“와- 좋네요. 오늘 볼 건 어떤 작품이에요?”
“펄 벅의 에서 모티브를 딴 쑨밍 감독의 장편작 하나와 아시안 웨이브4라는 이름으로 묶인 신인감독 단편선입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기차가 정차를 알렸다.
와르르 내리는 사람들이 대부분 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목적지는 남포동.
이 땅의 영화를 사랑하는 골수팬들이, 10월이면 총집결하는 거대한 무대이다.
*
아직은 모자도, 선글라스도 쓰지 않았다. 얼굴이 알려진 배우가 아니었기에.
그래도 남포동을 빽빽히 떠밀려 다니는 무리들은 유명이 지나갈 때 한 번씩 시선을 돌렸다.
‘일반인 같진 않은데…배우인가?’
그에게도 배우라는 외피가, 서서히 맞춤으로 변하고 있다.
“와, 방금 그 다큐 정말 몸에 전율이 돋네요.”
“그쵸? 확실히 다큐에는 ‘사실의 힘’이 있습니다. 후르릅.”
첫 날 두 편의 영화를 보고, 기감독의 친구집이라는 원룸에서 맥주를 마신 후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틀째 아침 바람부터 줄을 서서 현장표를 예매하고 다큐 한 편을 관람한 후 늦은 아점을 먹고 있었다.
밀가루피가 흐늘흐늘한 완탕. 유명은 PIFF에 올 때마다 먹어 익숙한 음식을 기감독은 감격적으로 흡입하고 있다.
“아참, 깜빡했는데요.”
이 분이 깜빡했다고 하면 이제 불안하다.
“오늘 오후 저희 작품 상영 후에, GV(*관객과의 대화)가 있습니다.”
“네?!”
“오기 직전에 공문 온 것 다시 확인하니까, GV타임이 잡혀 있더군요.”
“아니, 그건 왜 또 이제···”
“깜빡했습니다.”
후···
유명은 깊은 한숨을 쉬고 자신들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본인은 편한 청바지에 티셔츠와 가디건 차림. 감독님은…오늘도 역시나 다 구겨진 면바지에 후드집업 차림이다.
“광복 롯데백화점, 가시죠.”
“어, 왜 그러십니까.”
“그러고 GV 가시게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기감독을 끌고 1시간만에 쇼핑을 끝냈다.
정장까진 아니지만 깔끔한 팬츠와 자켓으로 갈아입히고, 근처 미용실에서 머리까지 자르고 나니 편집실에서 케케묵었던 감독님도 꽤 번듯해졌다.
앗, 그러고보니 설마 저 차림으로 개막식도 가신 건 아니겠지?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 두려워서 유명은 질문을 삼켰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약속된 시간에 영화제 프로그래머와 잠시 미팅을 했다.
“주연 배우분이 갑자기 참여하셨군요. 더 오실 분은 안계신가요?”
“네, 없습니다.”
“영화 끝나면 바로 스탭이 들어가서 의자 세팅할 겁니다. 제가 들어가서 진행할 거고, 두 분 돌아가면서 인사와 간단한 소감 얘기하시고 20분 정도 질의응답 시간을 갖게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할 말을 다 끝낸 프로그래머가 둘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멋진 영화더군요. 이번 영화제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리라 봅니다. 두 분 여기저기서 찾는 분이 많을테니 옷이라도 한 벌 맞춰 두시죠.”
지금 옷도 방금 전에 산 거라고는, 도저히 얘기할 수 없었다.
*
영화관에 입장하는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의 한 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