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92
부족한 지젤이었다면 비웃음을 자아냈을 그 대사는,
완전한 납득과, 완전한 절망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인간이 저걸 따라할 수 있겠어.’
관객들은 잠시 저 팬텀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
달이 떨어지는 밤마다 그들은 극장 뒤편에서 몰래 만나 발레를 연습했다.
성장하는 화란의 눈빛에 점점 경외와 의존이 어린다. 완전한 발레의 신을 만난 후, 그녀의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그녀는 발레단의 다음 공연테마인 의 여주인공역을 따내었다.
그 날은 그 소식으로 그녀가 한껏 들뜬 날이었다.
“안에만 있으면 갑갑하지 않아요? 같이 산책가요!”
그녀가 손목을 덥석 잡아끌자 팬텀이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그토록 구름 위에 솟은 듯한 존재가 보여주는 최초의 인간적인 표정.
극장의 문 앞에서, 그는 망설이다 맨 땅을 한발짝 디뎠다. 발레슈즈에 흙이 묻는다. 아랑곳않고 화란이 그를 잡아끈다. 늘 끌고가기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끌려간다.
도착한 곳은,
수천 개의 꽃송이가 달빛에 알알이 부서지는, 밤의 벚나무.
그 흐드러진 아름다움에 관객들이 숨을 탁- 멈추었다.
기감독은 이 씬의 배경을 일부러 보정하지 않았다. 보정하지 않은 그림이 오히려 보정한 것처럼 보인다.
폐허가 된 재개발 구역에 꿈처럼 홀로 우뚝선 한 그루 벚나무.
그것은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팬텀의 마음 속에 잔존하는 한 그루의 인간성같은 것이었다.
그 꽃송이가 토옥 떨어진 곳에, 감정이 싹튼다.
‘완전한 발레’에 집착하고 있던 그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갈구’라는 감정.
“여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에요. 예쁘죠?”
화란이 가장 아름다운 장면.
아직은 자취가 남아있는 순수함, 막 프리마에 오른 발레리나의 신선함과 도도함, 팬텀을 바라보는 눈에 가득한 신뢰와 존경, 꿈을 손아귀에 쥐리라는 기대, 탐욕.
욕심많은 그녀가 한참 원하는 것을 거머쥐기 시작할 때이기에, 그 모든 깨끗하고 음습한 감정들이 풋풋하게 범벅되어 놀랍게 아름다울 때.
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팬텀의 몸을 휘감아 돌았을 때, 그는 화란을 내려다보았고,
바람이 폭풍이 되어 그의 마음을 강타했다.
그 타격을 견디지 못한 그가 마음을 잠그기 위해 선택한 것은,
가면의 제거.
휙-
가면을 벗어던진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시선을 꽂으며 도전적인 웃음을 입꼬리에 건다.
‘이래도 나를 보며 웃을 수 있는가?’
놀랍게도 그녀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를 직시하며, 맑게 웃었다.
“같이 춤출까요?”
그 때, 팬텀은 화란에게 완전히 패배했다.
지젤과 알브레히트가 사랑에 빠진 음악을 배경으로 파드되를 추는 동안, 팬텀의 시선은 단 한번도 화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더 이상 화란 역 여주인공의 단순한 연기가 결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팬텀의 내면연기가 무척이나 복잡하기 때문에, 대조적인 단순함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화란의 연기.
하지만 그는 아쉬움에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왜···’
장면은 점점 고조된다.
프리마로 주목받기 시작하는 화란. 반복되는 팬텀과의 레슨에서 나날이 발전하는 그녀의 발레.
인간관계에서 항상 문제되는 것은, 서로에게 존재가치가 커질수록 받는 상처 또한 커진다는 것이다.
그녀가 그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할 때 그가 무심코 흘리는 말들, 혹은 이 극장과 함께한 그의 역사가 너무 길기에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들이 화란의 가슴에 꽂힌다.
신에게 모든 인간은 평등함에도, 이제 신이 자신만을 바라봐주기를 바란다.
그런 그녀의 질투와 불안함이 무리수를 두게 만들었다.
“연애하기로 했어요.”
“뭐, 연애?”
“네. 알브레히트역의 수빈씨와요.”
팬텀의 동공이 크게 흔들린다.
그를 거쳐간 많은 발레리나가 있었고, 그 중 일부는 한 단계 더 나아갈 재능이 있음에도 주저앉았다. 연애, 사랑, 결혼. 그런 것들은 언제나 재능있는 발레리나의 적이었다.
공들여 가르친 그녀들을 떠나보낼 때 늘 허무했지만, 그는 곧 다시 다른 재능있는 발레리나를 선택하고 키웠다. 그에게는 발레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말에 느껴지는 분노는, 단지 재능있는 발레리나를 놓치게 된 안타까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도 무리수를 둔다.
보란듯이.
새로운 발레리나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문연정과 레슨하시는 걸 봤어요.”
“아, 재능있는 친구라.”
“…제가 있는데 왜!”
“올해 신입단원 중에 재능있는 아이들이 많더라고. 너도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기 전에 분발해.”
“그게 무슨! 당신이 저만 가르친다면 그럴 일은 없어요!!”
“재능있는 발레리나에게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질 거야.”
냉정하게 잘라내는 그의 말에 화란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다.
자신들이 공유한 시간들. 가끔씩 그가 자신만은 특별하게 여겨주고 있다고 느꼈던 것은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초조하다.
원래 그녀는 발레에, 프리마의 자리에 욕심이 드글거렸던 발레리나.
스승을 얻고 실력을 얻고 조금 안정되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파괴된다.
카메라가 어지럽게 흔들리다가, 툭- 머리를 떨구며 발치를 비춘다.
그리고 순식간에,
(쿵-)
발이 잘린다.
그 섬뜩한 영상에 관객석의 머리들이 짠 듯이 의자 뒤로 밀렸다.
쿵- 쿵- 쿵- 도입부에서 뚝 끊겼던 도끼소리가 이어지듯이 귀에 꽂히고,
이제 더 이상 애니메이션이 아닌, 잘린 화란의 발이 경쾌하게 춤을 춘다. 붉은 피를 사방에 흩뿌리면서.
물론 화란이 보는 환상이었지만,
그 CG는 놀랍도록 정교하여 관객들의 머리 속에 섬뜩한 잔상을 남겼다.
*
그 때 팬텀의 시선을 그녀가 한 번만이라도 마주했더라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팬텀은 표정을 싹 바꾸었겠지만, 얼핏 실수로라도 그 애절한 표정을 한 번만 보았더라면.
그렇지 못했기에, 결국 스토리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점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가는 그녀의 질투.
환청이 기익 기익 긁는 소리를 내고, 환상이 빙글빙글 잔상을 남긴다.
프리마로서의 데뷔를 앞두고 그녀의 선택은···
불안요소의 제거.
“아아아아악—”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코르드의 일원은 쉽게 제거되었다.
그 장면을 뒤로 하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사뿐사뿐, 무대로 걸어나간다.
그것을 지켜보는 눈.
오래된 극장에 한 두개 쯤은 있을 법한 틈새에서 뿜어져나오는 집요한 시선.
망원렌즈가 흐릿한 형태를 당겨서 잡고, 아직도 형태가 불분명한 그것이 몸을 가볍게 풀쩍 날려서 다른 그늘 속에 내려앉는다.
카메라가 추적하듯이 팬텀을 따라 그늘로 들어가고,
모든 것을 목격하고 만족스럽게 웃음짓는 팬텀의 흉측한 얼굴에서,
새하얀 이가 오싹하게 빛났다.
공연의 막이 오른다.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여 프리마의 자리에 오른, 혜성같은 신예의 데뷔무대.
그 무대 위에서 지젤이 웃는다. 운다. 미친다. 파리하게 나부낀다.
일견 단순해보이던 연기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깊이있는 지젤의 발레에, 남자는 감탄하고 말았다.
‘세계무대에서 통할 법한, 수준높은 지젤···’
공연이 끝났다.
자신만만한 그녀가 수 차례의 커튼콜에 우아한 인사를 하다, 객석의 어느 그늘 속으로 시선을 던진다.
얼핏 아무것도 없는 듯한 그 구석을 쭈욱 클로즈업하자,어둠 속에서 드러난 팬텀의 눈이,
그녀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팟-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엔딩크레딧이 올라갔다.
크레딧을 멍하니 바라보던 사람들이 한명, 두명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