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00
100화. 그녀
“은정이요?”
“자세히 설명해줘 봐야 못 알아들을 거고 그저 결단기 이상의 수사만이 대량의 순은 중에서 뽑아 낼 수 있는 법보의 원재료 중 하나라고 알아둬. 매우 진귀한 것이고 내 주작환에도 함유되어 있어.”
어리둥절한 한립의 표정에 소녀가 조금 귀찮아하며 답했다. 은정에 대해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하는 소녀의 기색에 한립도 다른 물음으로 대체했다.
“그럼 어째서 전 검을 날려 조종할 수 없는 거죠?”
계속해서 질문해오는 한립 때문에 소녀가 다시 냉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검의 주인이 아등바등 법술을 부려 제련해 놨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은 못 쓰는 게지. 녹여서 다시 만들지 않고서야 쓸모없는 물건이나 마찬가지란 소리다.”
한립의 안색이 심히 안 좋아졌다. 이 검을 얻고 기대가 컸는데 저 말대로라면 불가능하단 소리가 아닌가!
“쓸모없다니요? 지금 사용하는 건 안보이십니까?”
잠시 말이 없던 한립이 돌연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은검을 이용해 흑룡의 몸을 갈랐다. 소녀가 마구잡이로 칼질을 하는 한립의 모습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흑룡이 비록 이(二) 등급으로 밖에 성장하지 못했으나 전신이 모두 귀중한 재료니라! 껍질은 질 좋은 보호구로 뿔과 발톱은 최상급 법기로, 남은 단액은 진귀한 단약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이다!”
뜬금없는 자세한 설명에 한립은 조금 불안해 졌다. 상대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깝구나 아까워. 삼 등급만 되었어도 머리의 교룡의 내단을 차지하려 결단기 수사들도 날뛰었을 텐데. 법기든 단약이든 최상의 재료니 말이다.”
“교룡의 내단이요? 그게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설마 이것은 아니지요?”
소녀의 안타까운 기색에 한립이 돌연 흑륭의 복부에서 주먹만한 붉은 구슬을 꺼내 들었다.
“음? 흑룡의 몸에서 꺼낸 것이더냐?”
갑자기 표정이 달라진 소녀가 한립에게 가까이 다가와 자세히 그것을 살펴보았다.
“닮기는 했는데…… 이 교룡은 겨우 이 등급이니 내단을 지니고 있을 리가? 게다가 흑룡은 물의 속성을 지니는 악룡이니 내단의 빛깔도 남색이어야 한다. 잠깐 이리 줘 보거라.”
소녀가 참지 못하고 한립의 손에서 둥근 물체를 빼앗아 만지작거리는데 갑자기 구슬이 폭음과 함께 터지며 소녀와 한립을 빨아들였다.
* * *
한립은 아름다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처음 맛보는 여인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품에 취했고 여인은 더 깊은 춘몽 속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꿈이라도 꿈이란 결국 깨지기 마련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에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한립이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뜬 그 앞에는 아름다운 얼굴이 얼음장 같이 굳어서는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고운 얼굴이 생소하면서도 익숙해 한립의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일어났느냐?”
열여덟 정도로 보이는 여인이 담담히 내뱉는 말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 한립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그제야 자신이 벌거벗은 채로 역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인을 꼭 안고 있음을 발견했다. 여인이 한립을 보고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눈썹을 매섭게 올려 보았다. 옥 같은 얼굴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싸늘히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냐! 이 손 당장 못 치워?”
한립이 너무 놀라 그녀를 놓아주었다. 여인은 서둘러 한립의 품에서 벗어나 일어섰다.
“으앗!”
그러다 여인의 허리가 굽혀지며 고통스런 표정으로 다시 한 번 한립의 품으로 떨어져 내렸다. 부드러운 몸이 한립의 온 몸을 뒤덮자 그는 참지 못하고 자신에게 벗어나려는 여인을 꼭 껴안고는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무어라 말하려던 여인의 말은 순식간에 삼켜졌고 열렬한 입맞춤 아래 다시 둘은 하나가 되었다. 욕망에 들뜬 두 남녀의 폭풍 같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제 절색의 여인이 한립의 가슴에 붉어진 얼굴을 묻고는 눈을 뜨지 못했다.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쁜 가슴만이 그녀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 지를 말해주었다. 한립은 보드라운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지 못하며 아쉬워했다. 여인도 결국엔 평정을 되찾고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그녀는 조용히 두 눈을 떴다.
이번에는 한립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몸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그의 손을 털어내고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저물대로 다가갔다.
한립은 잠시 주저하기는 했으나 그녀를 막지 않았다. 눈처럼 새하얀 치마를 꺼내 들고는 침착하게 옷을 입은 그녀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그녀가 어느새 옷을 다 걸치곤 뒤를 돌아보다 자신의 옆에서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한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누군지는 잘 알겠지? 오늘 있었던 일은 그저 실수야. 꿈이라고 생각하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말하자 한립도 코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오늘 일이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날엔 죽을 줄 알아!”
“입 꼭 다물고 있을 테니 안심하십쇼. 밖으로 말이 세어나가면 날 죽이면 될 것이고요.”
한립이 미소 지으며 온화하게 답했다.
“흥! 잘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한립의 태도에 여인은 기뻐하기는커녕 조금 성이 났다. 끝으로 여인과 한립은 한 동안 입을 다물었다.
사실 결단기 수사라도 그간 수련에만 집중하느라 남녀 사이의 일에 대해선 경험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중에 한립을 다그쳐 말이 세어나가지 못하게 했으나 그래도 마음이 심란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립도 그녀와 별 다를 바 없었다.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 첫 번째 여인이 결단기 수사일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녀는 아름다운 용모부터 자신이 상상하던 평범하고 온화한 여인과는 천지차이였다. 이 인연이 그에게 화가 될지 복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눈앞의 여인에게 자연히 호감이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생겼다 해도 만일 갑자기 돌변해 자신을 공격한다면 자신도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마음은 없었다.
“이 구슬은 무엇이기에 우리 둘을…….”
말을 이어가기가 껄끄러워 여기까지만 말하고 말았지만 그녀도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흑룡의 음낭대(淫囊袋)란 것으로 보기 드문 수컷 교룡이 지닌 것이야. 워낙 희귀한 것이라 당시엔 떠올리지 못했지만 여인이 건들이게 되면 최음 작용을 일으키는 물질을 내뿜지.”
말을 하다가 자기가 음낭대를 건드린 데에 생각이 이르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것이 있다니.”
설명을 들을수록 한립도 이해가 안 가던 일들이 차츰 정리가 되었다.
“그럼 지금 당신의 모습은 어찌…….”
“내 독문 공법인 소녀륜회공(素女輪回功) 때문이야. 공법의 기묘한 작용으로 젊은 모습을 유지하게 해주며 십년 마다 한 번씩 윤회해 다시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다만 오늘 법력을 소진한 탓에 잠시 공법이 틀어졌고 이렇게 조금 성장하고 만 거야.”
“그럼 문제가 생긴 건가요?”
“별거 아냐. 이미 공법을 대성해서 나이가 좀 들고 오년 정도 공력을 잃을 뿐인데. 그깟 오년 정도 공력이야 내겐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그녀가 설렁설렁 설명하는데 한립이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그러자 표정에서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 여인이 한립을 슬쩍 바라보며 냉랭하게 답했다.
그 말투에 한립도 물러섰다. 상대가 어쩔 수 없이 몸을 허락하고는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았기에 무어라 해줄 말이 없었던 것이다.
여인도 정말 억울했다. 그녀가 아무리 힐끔힐끔 보며 따져 보아도 저 황풍곡 제자는 용모도 평범, 자질도 평범하니 뭐 하나 특출한 구석이 없었다.
저런 자와 부부 간에나 할 법한 일을 벌이고 나니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그녀가 울적해 진 것은 당연했다.
저 자를 죽여 이 억울함을 풀고 싶다가도 또 뭔가 아쉬운 느낌이 뒤섞여 더 답답하고 화가 났다.
“설마 5일이 지나 돌아갈 시기를 놓친 것은 아니겠죠?”
돌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한립이 서둘러 물어왔다. 심란한 마음에 딴 생각에 빠져있던 여인이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더니 여전히 차분한 얼굴을 유지 했다.
“그렇게 오래 지났을 리는 없어. 감정을 증폭시키는 성분은 극히 소량이라 기껏해야 두세 시진 정도 지났을 거야. 그래도 서둘러 준비하긴 해야겠지?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말이야.”
여인이 미간을 모으더니 덧붙였다.
“여기서 빠져 나갈 때 금색 궤짝은 내 거야. 이견은 없겠지?”
여인이 싸늘하게 한립을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자 한립은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다.
지금은 정확히 알 수야 없지만 그녀의 법력이 축기기 이상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데 그녀가 원하는 물건을 탐내 무엇 하겠는가?
별 말이 없는 그를 보더니 그녀가 바로 백옥으로 만든 정자로 향해 금색 궤짝을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바로 다시 한립에게로 돌아왔다.
“그럼 저 영초들은…….”
“저런 건 필요 없으니 갖고 싶으면 네가 가져가든가.”
여인이 영초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자 한립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입을 삐죽거리며 그를 본 여인은 불퉁거리면서도 그에게 영초를 양보했다.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사실 금지에 들어온 이후 문파에 상납할 영초를 충분히 구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것도 없이 돌아가면 의심을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거리낌 없이 영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순식간에 수십 포기의 영초들을 뽑아냈다. 꼼짝 않고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인이 그가 일을 마치자 진지하게 말했다.
“금제를 깨고 나가려면 반드시 우리 둘이 힘을 합쳐야 한다. 혼자서는 빠져나갈 수 없어.”
* * *
석전의 대청 안에서는 끊임없이 ‘우르르 쾅쾅’ 하는 소리가 이어지며 엄월종 제자들이 온 힘을 다해 수 장 깊이의 굴을 파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무기를 사용하든 겨우 일촌 정도를 깨부술 뿐 그들도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몇 시진이 흐르자 남녀 제자들이 모두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마치 이미 사조를 구할 어떤 희망도 남지 않은 듯 했다. 모두가 사조를 잃어 생길 후환을 걱정했다. 바로 그 때, 석전 밖에서 거대한 울림이 전해져 안에 있던 제자들을 뒤흔들었다.
“무슨 일이지?”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데 남제자 둘이 정황을 살피러 튀어나갔다.
“사조!”
잠시 후 석전 밖에서 전해지는 남제자들의 기뻐하는 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똑똑히 울렸다. 멍해졌던 제자들은 앞다퉈 석전 밖으로 뛰쳐나갔다. 입구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지하로 수직으로 연결된 동굴이 나 있었고 그 옆에서 백의를 흩날리는 여인은 분명 나이가 조금 든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엄월종 사조는 냉랭한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며 기뻐 날뛰는 남제자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이에 남제자들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게 됐다.
‘설마 사조께서 지금 통로를 막은 금제에 대해 추궁하려 하시는 건가!’
모두의 시선이 부지불식간에 엄월쌍교라는 여제자에게로 모여들어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백의여인은 일 각 동안이나 말없이 먼 곳을 조망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출발한다.”
* * *
한립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래게 오가며 원숭이처럼 민첩한 몸놀림을 선보이고 있었다. 법기를 타고 비행하는 것에 못지않은 속도로 산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지금 그의 몸에서는 영기가 넘쳐흘러 십삼 성의 법력을 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엄청난 충만감에 미혹될 듯 했으나 어차피 얼마 지속되지 못할 호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습지에서 함께 몸을 맞댄 여인이 비술을 이용해 자신의 봉인된 법력 중 일부를 한립에게 흘려보내 주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공법이 십일 성에 불과한 한립이 연기기 최정상에 가까운 법력을 흡수했다.
그 후, 각자 법보 주작환과 금광전 부보를 이용해 천장을 뚫고 지면으로 통하는 통로를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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