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29
129화. 현혹
노인과 문사 차림의 사내가 잠시 후 귀령문 소주와 연여언이 의사당에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연가가 귀 문파의 요구를 받아들였는데 더 할 말이 있습니까?”
연가 어르신의 말투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연 선배님 너무 격식을 따지실 것 없습니다. 저와 여언 낭자가 서로 생사의 주술을 통해 혼약을 맺었으니 앞으로 저를 소문주가 아니라 왕선이라 불러주십시오.”
예를 올린 왕선이 겸손하게 말했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아직 언이와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것도 아닌데 소문주에게 무례를 범할 수야 없지요. 어쨌든 연가는 이제 귀령문의 일원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입니다.”
연가 노인이 무표정하게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귀령문 소주는 그의 말에 상대가 아직 자신에 대한 경계를 풀고 있지 않음을 눈치 챘다. 그는 강요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여언 낭자에게 어르신을 뵙고 싶다 한 것은 연가에서 어찌 약속을 이행할 것인지 여쭙고 싶어서 입니다. 닷새 후면 여섯 개 종파가 월국을 공격할 텐데 연가의 철수가 늦어지면 일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시지요. 우리 연가가 비록 인원이 많아 보이나 실제로 혈연관계가 먼 방계 친인척들이나 법력이 없는 범인들은 제외하고 움직일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소리 소문 없이 철수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연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사 차림의 현야가 소주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
“그럼 후배도 안심입니다. 사실 대규모 인원이 한 번에 움직이면 칠대선파의 이목을 속이기 힘들어지고 이런 때에 정보가 새는 것은 좋지 않겠지요. 옆에 계신 분이 놓치는 정도가 없다는 현야 선생이시겠군요. 고명하신 이름을 이전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귀령문 소주가 가볍게 웃음을 지어 보이자 문사는 가슴이 서늘해졌지만 겉으로는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후배가 어르신을 찾아 뵌 것은 그 일뿐 아니라 연가가 지금 연령보 안에 있는 200명이 넘는 축기기 수사들을 어찌 처리할 생각이신지 알고 싶어서 입니다. 그들은 각 문파의 중견 제자인데다 이틀 내로 이동해야 하는 연가가 그들에게 들킨다면 일을 크게 그르칠 것입니다.”
귀령문 소주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으나 그 말뜻을 알아들은 연가 노인과 현야의 안색은 대번에 달라졌다.
“소문주의 의견은…….”
홍불 노인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혈령대법을 익히는 수사는 혼백을 죽여 제를 올려야 순조롭게 수련을 시작할 수 있지요. 지금 연령보에 있는 수사들을 우리 귀령문 음화대진(陰火大陳)에 가둬 육체는 태워 버리고 남은 혼백을 이용해 여언 낭자가 이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축기기 수사들의 영험한 혼백이라면 반드시 낭자가 혈령대법 제 일성을 연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주의 제안에 노인과 현아는 마음에 오한이 드는 것 같았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칠대선파의 제자들은 몰라도 타국 수사들은 우리 언이에게 수련 반려를 청하러 모인 것인데 연가가 나서서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짓을 저지를 수는 없습니다.”
현야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노인이 상대방의 말에 응하기라도 할까 서둘러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러자 노인이 침중한 기색으로 그를 제지했다.
“소문주가 합리적인 제안을 했지만, 정말 그리했다가는 이 세상천지 어디에도 연가의 이름을 내밀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연가가 먼저 청하여 온 수사들이니 우리가 나서서 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한 곳으로 모아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들을 어찌 처리할 지는 귀 문의 역량에 맡기지요.”
현야가 노인의 말에 안심을 하며 동의했다. 그러나 귀령문 소문주는 얼굴로 불쾌함을 내보였다.
“그 수사들의 혼백은 여언 낭자를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연가의 이익이 될 일에 조금도 움직이려 들지 않으시다니 너무 하십니다.”
그 말에 홍불 노인이 잠시 말이 없었으나 치밀한 능구렁이가 명분이 없을 리 없었다.
“언이는 곧 소문주에게 시집을 가 소문주의 부인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사람을 위해 힘을 보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 연가도 정식으로 귀령문의 일원이 되면 칠대선파를 상대하는데 손속의 정을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먼저 청해 온 손님들을 연가가 해한다면 가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말겠지요.
어쨌든 그들을 이대로 보내줄 수도 없으니 귀 문이 나서는 것이 가장 상책일 것이고, 우리 연가도 다른 수도자들에게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소문주 신변의 결단기 수사 둘만 있더라도 축기기 제자 수십 명은 처리할 수 있을 테지요.”
귀령문 소문주가 노인을 깊이 응시하더니 그의 말을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잠시 후 시종일관 말이 없는 연여언을 보더니 결국에는 결정을 내렸다.
“어르신이 그리 말씀하시니 우리 귀령문에서 이번에는 악역을 맡겠습니다. 그리고 그 수사들의 혼백은 이 왕선이 여언 낭자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치시지요!”
“하하! 소주의 선물은 노부가 우리 언이를 대신해 잘 받겠습니다. 언이는 어서 소주에게 인사를 올리거라. 소문주가 널 위해 이만저만한 일은 하신 게 아니니.”
홍불 노인은 연가가 나서지 않게 된 것에 희색을 보였다.
“소주의 마음씀씀이를 여언이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
절색의 가인이 앞으로 나서 예를 올리니 귀령문 소주도 눈빛이 달라졌다.
“여언 낭자가 하루 빨리 혈령대법을 수련한다면 제게도 좋은 일이니 이리 예의를 차리실 것 없습니다. 그럼, 어르신께서 칠대선파 수사들을 어디에 불러들이실지 정하시면 알려주십시오. 왕선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가 연가 노인을 향해 예를 올리고 의사당을 나섰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후 남아있던 연가 노인과 현야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 * *
한립은 지금 머리가 무척 아팠다. 그 원인은 바로 서로 대치하고 있는 3인과 한 명의 낯선 인물 때문이었다. 낯익은 3인은 바로 연우와 봉 사형 그리고 동훤아였고 낯선 인물은 정말 아름답게 생긴 사내였다.
지금 동훤아는 그에게 안겨있었고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그 아름다운 사내의 낯짝에 심취해 있었다. 한립이 그 꼴을 보곤 속으로 수없이 욕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미 동훤아에게 빠진 두 녀석이 한립을 보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한립이 동훤아를 저 사내의 품에서 빼내오길 기대하는 것이다. 한립은 질투로 불타오르는 두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며 눈앞의 사내와 동훤아의 눈빛을 살펴보았다.
두 사람 말에 따르면 오늘 동훤아를 데리고 유명한 점포를 다니며 원료와 부적 등을 둘러보는데 그 중 한 점포에서 저 사내를 마주쳤다 한다. 그런데 동훤아가 그를 보자마자 바로 홀린 듯 추근거리더니 점점 더 행태가 대담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곤 사내가 동훤아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하자 연우와 봉 사형이 막아선 것이다.
그런데 사내가 그들을 비웃으며 동훤아가 원한다면 자신도 그녀를 두고 가겠다 하니 연우와 봉 사형도 할 말이 없어졌다. 누가 보아도 동훤아가 원해서 그의 품에 안겨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립은 대강의 사정을 파악해갈 무렵 상대에게서 몇 가지 의혹을 발견했다. 우선, 사내의 외모 때문에 정확한 연령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매끈한 피부로 보아 어려 보였으나 행동거지나 눈빛은 또 삼, 사십 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은근히 경박스러웠다.
두 번째로 그가 나타났음에도 동훤아가 차갑게 훑어보고는 다시 아름다운 사내를 쳐다보기 바빴다. 그 시선이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아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은 또 누구지? 설마 자네도 이 소저의 추종자인가? 내 미리 말해두는데, 소저가 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이 아름다운 여인을 내 품에서 데려갈 수 없다.”
사내는 한립의 얼굴과 축기기 수준을 확인하고는 바로 그를 무시하며 동훤아의 어깨를 감쌌다. 한립은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그저 동훤아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럼 댁은 누구길래 감히 칠대선파의 수사에게 미혼술(迷魂術)을 건 거지? 담도 큰 놈이로구나.”
한립의 말이 떨어지자 사내가 안색이 미미하게 변하더니 금방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무슨 헛소리냐! 소저와 나는 마음이 맞아 함께 하려는 것이다. 더 이상 앞길을 막는다면 나 전 아무개가 출수를 해도 원망 말거라!”
그러나 옆에서 듣고 있던 연우와 봉 사형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이미 흉흉한 기세로 사내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쩐지 동 사매가 귀신이라도 든 것처럼 우리 둘을 무시한다 했더니 네 놈이 사술을 부려 미혹한 것이었구나! 당장 그 법술을 풀지 않으면 네 놈이나 원망 말거라!”
“그러니 말입니다. 저도 어쩐지 이상하다 했습니다. 동 소저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를 두고 처음 보는 사람을 따라간다 했더니! 내가 동 소저를 대신해 너를 혼내주겠다.”
봉 사형과 연우는 말을 하면서 이미 보라색 방울과 짧은 창 형태의 법기들을 꺼내 들었다. 당장이라도 무력을 사용할 기세였다. 사내는 축기기 초기와 중기 수사 둘이 자신을 위협하니 얼굴이 싸늘해졌다.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그 모습에 한립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고 무의식이 그 자가 굉장히 위험한 인물이라는 경고를 보냈다. 그는 머리를 굴려 동훤아의 귓가에 고함을 지르듯 전음을 보냈다.
‘동훤아! 뭐 하는 짓이냐! 홍불 사백께 감금당할 것이 두렵지도 않더냐!’
동훤아는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바로 발버둥을 치며 상대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이 상황이 무척 당황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그 모습에 연우와 봉 사형은 크게 기뻐했다. 이제 완전히 정신을 차린 그녀는 사내를 쳐다볼 생각도 않고 한립의 등 뒤로 달려와 숨어버렸다. 그렇게 스스로 분노한 사내의 시선을 차단한 것이다.
세 명이 모두 경계심을 갖고 자신을 노려보니 지금 동훤아를 강제로 데려가는 것은 무리였다.
이길 수 없어서가 아니라 동훤아가 의식을 차렸으니 도망가 버릴 확률이 높았고 다툼이 벌어지면 다른 수도자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자신의 입 안에 물고 있던 고기를 빼앗긴 일이 없던 그였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아름다운 얼굴이 구겨지며 소리쳤다.
“이것으로 끝이라 생각 마라, 너희 셋을 기억해 두었으니 각오하거라!”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사내의 몸에서 오색의 광이 번뜩이더니 한 줄기 노을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이어 그들은 한립이 머무는 풍열객잔으로 들어갔고, 동훤아가 이번 일을 설명하는 것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자와 눈이 마주치니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그저 필사적으로 그에게 잘 보이고 싶고, 그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고요. 마치 주인을 모시는 것처럼요! 분명 생전처음 본 사람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난 정말 누구의 노예도 되고 싶지 않은데 말이에요!”
동훤아는 말을 하면 할수록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그 사내에게 정신이 제압되어 처음으로 죽음 보다 두려운 공포를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설명을 듣는 두 사내의 표정도 굳어갔다. 그 곱상한 놈의 미혼술이 저렇게 대단하면 그들이 어찌 맞서겠는가?
“모두 걱정하지 마십쇼. 상대의 미혼술이 얼마나 대단하든 우리 세 사람에겐 통하지 않을 것 입니다.”
“한 사제는 어찌 그리 생각한 겁니까?”
“간단합니다. 상대가 사내에게도 미혼술을 걸 수 있었다면, 그렇게 독한 눈빛으로 노려만 볼게 아니라 우리도 가만 두지 않았겠지요. 혹은 상대가 법력이 부족해 다시 미혼술을 펼치지 못 했을 수도 있으나 우리 셋을 앞에 두고도 믿는 구석이 있는 표정을 보였던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전자의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설명을 들은 봉 사형과 연우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그 대단한 미혼술은 여인에게만 걸 수 있다니 법력과 법기에 자신이 있는 그들이 두려워할 이유는 없어졌다.
“한 사형! 그럼 우리 여 수사들은 그런 자를 만나면 평생 조종당해야 하는 거예요? 정말 싫어요, 난!”
동훤아의 얼굴이 파리해져서는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였다. 게다가 한 사형이라 부를 때는 얼마나 애절한지 처량해 보였다.
그러나 한립은 듣고 잠시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동훤아는 구출된 이후로 자연스럽게 한립에게 기대는 마음이 생겨났다.
다행이 한립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다른 두 사람이 앞다퉈 가슴을 두드리며 앞으로 동훤아를 보호해 그런 일이 없게 하겠다 장담했다. 어쨌든 축기기 수사 두 명이 자신을 지켜주겠다 하니 그녀도 한결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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