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3
13화. 영웅호걸의 말로(末路)
문 대인이 표정 없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한립의 손목에 손을 올려놓았다.
온 정신을 기울여 한립의 내력을 살피며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일다경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안색은 어두웠고 여전히 한립을 불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었지만, 여전히 책망하는 말 같은 것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는 손짓하며 한립에게 자신을 따라 오라고 했다.
한립은 그의 뒤에 서있는 수상한 인물에게 무척 흥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마음대로 따져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
방에 들어 온 후 문 대인이 피곤한 듯 의자에 앉았다.
한립은 지금 문 대인의 마음이 편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수상한 사람을 따라 방의 중간쯤에서, 문 대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서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한립이 참지 못하고 약간 고개를 들어 문 대인을 몰래 살폈다.
“보고 싶으면 볼 것이지 무엇을 한다고 몰래 힐끔거리는 게냐?”
문 대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해졌다. 한립은 비록 아무런 내색도 안 했지만, 마음속은 성난 파도가 몰아치듯 출렁거리며 요동쳤다.
‘문 대인의 표정이 어찌 이리 단번에 괴이하게 변했단 말인가.’
한 층 더 어두운 기운이 문대인의 얼굴에 떠올랐는데, 이 어두운 기운은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수많은 촉수를 움직이며 금방이라도 발톱을 휘두를 기세였다. 이전의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무엇인가 독한 결심을 한 듯 했다.
문 대인은 호의가 전혀 깃들지 않은 시선으로 한립을 주시하며 입꼬리를 올려 그를 비웃고 있었다.
한립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불안한 마음이 생겨났다. 위험한 분위기가 방 안을 맴돌았다.
그가 경계하며 조심스레 뒤로 한 발짝 물러났고, 손을 움츠려 소맷자락에 숨겨둔 철통을 잡았다.
그러자 팽팽하게 잡아 당겨졌던 신경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그리고 문대인의 낮은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얕은 꾀를 쓰려고 들어?”
문 대인은 마치 유령이라도 된 듯 기이한 움직임으로 어느새 한립 옆으로 다가왔다. 한립은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팔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마비된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어르신, 왜 이러십니까?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말씀해주세요. 어찌 제자의 혈도를 짚으신단 말입니까?”
문 대인은 아무런 말없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터져 나오는 기침을 진정시켰다. 그 모습은 바람에라도 날아갈 듯 약해 보였다.
그러나 한립은 방금 자신을 제압하는 모습을 본 터라, 감히 그를 중병에 걸린 보통의 노인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런 약한 척 하는 모습이 더욱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다.
“어찌 이러십니까. 혈도를 풀어 주십시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한립이 다시 듣기 좋게 공손한 말들을 풀어냈다.
허나 문대인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손을 뻗어 그의 소맷자락에 숨겨진 철통을 찾아 꺼내 들고는 한립을 멸시하는 눈빛으로 비웃을 뿐이었다.
한립은 그의 이런 표정을 보고는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았다. 문 대인은 그에게 조금도 달아날 기회를 주지 않을 듯 했다.
한립이 천천히 입을 닫고 얼굴의 기색도 가라앉혔다. 그리고 문 대인을 주시했다.
그와 동시에 방 안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고요하여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전과 같았다.
“좋구나! 좋아! 좋아!”
돌연 문대인의 입에서 세 번이나 좋다는 말이 쏟아졌다.
“역시 이 문경인의 눈에 들 만한 재목이었구나.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다니. 위험에 처했으나 경거망동하지 않고, 내가 네게 쏟은 그 많은 재물이 억울하지는 않구나.”
그가 한립을 치켜세웠다.
“날 도대체 어찌할 셈입니까?”
한립이 문 대인의 말을 자르고 따져 물었다.
“하하! 널 어찌 할거냐고?”
문 대인이 한립의 물음을 반복했다.
“널 어찌 할 것이냐? 그건 네가 어찌 하기에 달렸겠지.”
“무슨 말씀입니까?”
한립이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방의 의도를 읽으려 노력했다.
“내가 말하지 않는다 해도 너처럼 영특한 아이라면 어느 정도 눈치는 챘을 테지.”
“단지 약간의 추측일 뿐 자초지종은 모르겠습니다.”
한립이 부정하지 않고 담담히 인정했다.
“그래 좋다. 이것도 나쁘지 않겠지. 무엇이든 묻고 싶다면 묻거라. 뱃속에 꽁꽁 감춰 두지 말고.”
문 대인이 음침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마치 어두운 기색이 몇 층 더 짙어져 흉악한 기세를 내뿜는 듯했다.
“난 당신이 줄곧 나를 경계하고 있었고, 날 스승의 눈으로 본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허나 상관없었지요. 나 역시 당신을 정말 제자의 마음으로 대한 적이 없으니까요.”
문 대인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 * *
“네 보기에 나의 나이가 얼마나 들어 보이더냐?”
그가 안면근육을 몇 번 꿈틀거리더니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60세 전후로 보입니다. 허나 이리 물어 보는 것을 보니, 당신의 실제 나이는 분명 보이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설마 그것보다 훨씬 많거나 아니면 훨씬 어린 겁니까?”
한립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투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쯧쯧. 정말 네가 장춘공(長春功)을 익힌 이가 맞기는 하구나. 농촌에서 자란 일개 철부지 어린아이가 이렇게 기민하고 총명해지다니!”
문 대인이 입술을 쉼 없이 끌어올리며 뜨거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네 추측이 맞았다. 난 이제 겨우 서른일곱 살이 되었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숫자가 문대인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말도 안 됩니다!”
줄곧 평정을 유지했던 한립이 단 번에 놀라 소리쳤다.
“말도 안 되지! 정말 말도 안 돼! 날 본 사람이라면 60세가 아니라 외부에 알려진 대로 70대라 하여도 의심치 않을 것이야.”
문 대인의 음성이 급격히 높고 날카로워졌다. 한립의 귀에 그것이 어찌나 날카롭고 참기 힘든지 마치 자신의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나 문경인은 여러 해 전, 월국(越國) 남주의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했었지. 적지 않게 이름을 날려서 다 내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하하! 당시 남주에서 ‘귀수(鬼手)’의 위력을 몰랐을까. 정파와 사파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걷는 길이 바로 내 길이었지.”
문 대인이 원래의 음성을 되찾고 나지막한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엔 막 뽑아낸 검과 같은 날카로움이 서려있었다.
마치 예전의 원기가 왕성한 때와 같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립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문 대인에게 이런 사연이 있었다니.
“안타깝게도 좋은 세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권술에서 더 높은 경지를 이루려는 와중에 간사함 놈의 흉계에 걸려 들고 말았지. 가장 믿었던 사람 손에 의해 독에 중독되고 말았다.
비록 내 타고난 의술이 뛰어났기에 어느 정도 독을 다스릴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회복할 방법은 찾지 못했지.
그때 일신의 무공도 타격을 입었는데 의탁할 곳도 사라졌지. 원수들이 흉수를 펼칠까, 원래 갖고 있던 가산과 집안사람들도 모두 내팽개친 채 월국(越國)의 다른 지방을 떠돌며 방법을 찾아다녔다. 원래 내가 가진 내력을 되찾을 방법을 고대하면서 말이야.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회상하며 다시 그때로 돌아간 듯 했다. 두 손의 주먹을 어쩌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흐르는 데도 알지 못했다.
얼굴에는 분노로 가득해 자신에게 그런 흉계를 펼친 간악한 자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치는 듯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한립 조차 소름이 돋고 한기가 느껴졌다.
“하늘도 간절한 마음을 알았는지 결국 어느 신비로운 곳에서, 기서 한권을 얻도록 해주었지. 그 서책은 기묘하고 심오해서 엄청난 노력 끝에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서책 앞부분에는 내력을 회복할 방법이 있었지. 난 그 방법에 따랐지만 그 결과…….”
문 대인은 숨이 찬지 말을 멈추었고 곧바로 잇지 못했다. 순간 그의 얼굴에서 분노보다는 한 줄기 후회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 결과 지금의 이런 괴이한 모습이 됐군요.”
한립은 그가 말하려 했으나,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대신 했다.
“그렇다. 그 서책 덕분에 내력은 회복했지만 뜻밖에도 내가 빠르게 늙어 지금의 모습이 되고 말았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귀신같은 모양이 된 거지.”
문대인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라면 지금쯤 그 원인을 찾아냈을 테죠?”
“난 서책의 방법을 행하는데 착오가 있어 사기(邪氣)가 침입해, 이 지경이 된 거였다. 지금 난 하루를 살려면 보통 사람이 열흘을 사는데 필요한 정기를 써야 하지. 조금씩 생명이 깎여나가고 있지만 다행이 난 몸을 보양하는 데 정통했고, 또 그 서책에 따라 일종의 비약을 제조해 노화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버틴 것이지.”
“내가 구결을 수련하는 것과 그것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한립이 곧바로 정곡을 찔러 물었다.
“내가 이렇게 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서책에서 해결책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바로 네가 수련하고 있는 ‘장춘공’이었다. 장춘공이 4성에 다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 내력을 이용해 운기행공을 하면, 내가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지. 그리고 잃어버렸던 내 원래의 신체와 정신을 되찾을 수도 있고.”
“그런데 그것이 하필 왜 나란 말이오? 무공이 뛰어난 사람을 찾아 이 구결을 수련시켰으면 될 일 아닙니까?”
한립이 잠시 중얼거리더니, 마음속에 오랫동안 묻어왔던 궁금증을 말하였다.
“넌 이 장춘공이 개나 소나 다 익힐 수 있는 것이라 여기느냐? 이 구결은 우선 나이가 어린 자가 내력을 수련하기 시작할 때야 비로소 익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련자가 영근(靈根) 체질이어야만 한다. 비록 나 역시 이 영근(靈根)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네 녀석 이전에 수백 명의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가르쳐 보았어도 한명도 이 장춘공을 익혀내지 못했었다.”
문대인은 다시 화가 나는 기색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한립이 조금 어리둥절하였다. 이 구결을 수련하는 것이 이리 지나치게 까다로운 일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남은 세월 동안 난 이 구결을 수련할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할 거라 여겼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강호를 떠돌며 유량하기 시작했지.
뜻밖에 나처럼 간악한 자의 흉계에 빠져 생사를 오가는 칠현문 문주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 후 문주의 요청으로 칠현문의 공봉이 되었지. 원래는 모든 것을 가슴에 묻고, 이 산에서 최후를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기적은 있더군. 허허! 처음에는 정말 제자로 받을 마음이었지. 그런데 당시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귀신에 홀린 듯, 너희에게 장춘공을 수련해보게 하였다.
사실 너희가 장춘공을 익히지 못하더라도 제자로 들여 내가 보유한 의술과 무예를 전수하려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네가 이 무공법에 반응을 보여 왔어! 하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던 게야!”
문 대인이 단숨에 이 수수께끼의 진상을 밝혔다. 병중에도 얼굴 가득 홍조를 띠는 것을 보니, 자신이 만난 이 행운에 매우 득의양양한 듯 보였다.
“난 아직 4성에 이르지도 못 했는데, 어찌 이 모든 것을 털어 놓는 것입니까?”
“그것은 네 자신을 원망해라. 내 그렇게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였건만, 네가 날 만족시켜주지 않고 줄곧 놀고만 있으니 어찌 하겠느냐. 4성이 코앞까지 당도했음에도 시간을 끌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지.
원래는 나도 2년은 더 기다려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하산을 해 돌아다니다 원수에게 발각되었다. 악전고투 끝에 결국 놈을 죽일 수 있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정기를 소진하고 만 것이야.
수명도 크게 줄었다. 이제 기를 써도 1년 남짓 밖에 살날이 남지 않았는데 나더러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냐?”
문 대인의 표정이 일순간 바뀌더니 다시 흉악한 표정으로 한립을 향해 소리쳤다.
한립은 모든 것을 알게 된 후에도 평소와 같은 얼굴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파도가 몰아쳤다.
그가 일찍부터 문 대인에게 숨겨진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눈치 챘지만, 이렇게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상대의 신세(身世)와 내력 그리고 무명구결의 진실까지 모든 것이 그의 상상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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