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우연한 만남
영석을 탈탈 털어 새로 얻은 약방의 원료들까지 모두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석이 떨어지자 한립은 이를 악물고 400년 된 약초를 팔았고 마도인들을 사냥하는 임무에 여러 번 참가해 상금과 그들의 저물대까지 챙겨 영석을 다시 모았다.
그러던 중 몇 개의 부보와 대연결의 힘을 빌어 축기기 후기 수사를 만나면 곧장 달아났고 초기나 중기 수사를 마주치면 목숨을 빼앗았다. 이런 식으로 1년 간 지내자 한립도 칠대선파 축기 수사들 중에서 조금은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이제 황풍곡에서 겨우 축기 중기에 불과하면서 연달아 마도인 수십 명을 사살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가 막 떠나려던 참에 돌연 콧속을 파고드는 어떤 향기를 느끼곤 걸음을 멈췄다.
향기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바로 뒤에 냉랭한 표정의 여수사가 서 있었다. 그녀는 놀랍게도 자신과 긴밀한 인연이 있었던 진 사매였다.
익숙한 향기와 함께 그날 밤의 뜨겁고 자극적이었던 기억이 떠올라 그를 흔들려 했다.
금지 원행에서 보고 이제껏 마주친 적이 없었고 진영에 온 것도 몰랐다.
“다섯째 백부, 여기요!”
진 사매는 담담한 표정으로 한립을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바로 퉁퉁한 진 형의 손에 저물대를 건네주었다.
“핫하! 마침 이것들이 필요한 참이었는데 교천이가 딱 맞게 와주었구나!”
진 형은 진 사매를 보더니 기분이 좋아져 턱살을 흔들며 웃어 젖혔다.
‘다섯째 백부? ’
방금 진교천이 뚱보 진 형을 부른 칭호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가 반 년 가까이 친분을 쌓아온 진 형이 그녀의 집안 어른일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축기기 중기의 실력으로 보아 집안에서도 어느 정도 지위가 있을 터였다.
진 사매는 처음에 한립을 쳐다본 후로는 냉랭한 표정을 유지한 채 다시는 눈길을 주지 않아 한립을 조금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럼 가볼게요, 진 형. 나중에 다시 들를게요!”
더 이상 머물 마음이 없던 그는 바로 거래장을 벗어났다. 그제야 진교천이 서늘한 시선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는 눈썹을 끌어올렸다.
“백부, 저 겁쟁이도 물건을 사러 온 건가요?”
“겁쟁이?”
진 뚱보는 진교천의 말에 정말 멍해졌다.
“방금 전에 여기 있던 녀석이요!”
“설마…… 한립을 말하는 게냐?”
작은 눈을 깜박이던 그는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네, 바로 그 자요. 뭐가 잘못되었나요?”
백부의 표정에 진교천의 표정이 묘해졌다. 사실 금지 원행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한립은 그녀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가 해명한 대로라면 남의 싸움이나 숨어서 지켜보다가 그저 운이 좋아 큰 수확을 거둔 자가 아니던가?
다섯째 백부가 잠시 말이 없다가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교천아, 넌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되어서 모르겠구나. 네가 어째서 저 자를 그리 판단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전장에선 꽤나 명성이 있는 인물이다. 연달아 열댓 명의 축기기 마도인을 해치운 자이니 결코 겁쟁이일 수야 없지.
심지어 난 이번 전쟁이 끝나면 가주에게 저 이를 추천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 만일 저런 수사가 가문에 조력해 준다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게다.”
“그가 마도인 축기기 수사를 수십 명이나 처리했다고요?”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얼굴에 놀람과 불신이 어렸다. 그리고 진교천이 다시 거래소의 대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는 한립은 이미 그곳을 떠난 후였다.
그곳을 빠져 나온 후 그는 이화원의 거처로 향했다. 평소대로 안부를 여쭙고 사제 간의 예를 올리려는 것이다.
이화원은 결단기 수사였으니 다른 보통의 제자들과는 대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군의 진법 중심부에 위치한 좋은 거치에서 사모님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한립의 사형 일곱 중 대사형은 녹파동에 남아 그곳을 지키고 있었고 한립과 넷째 사형 송몽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임무를 받아 다른 곳에 파견을 나가 있었다.
이곳에 온 첫날 인사를 올리러 온 한립을 보고 이화원은 크게 놀랐다. 벌써 그가 축기기 중기에 이렀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자질이 대단한 수사들도 축기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려면 10년 이상은 걸렸기에 이화원은 그 진상을 궁금해 했다.
당연히 솔직히 말할 수 없었던 한립은 자신도 원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이화원을 답답하게 만들었지만 이미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 제자만 살펴볼 수만은 없었다.
또한 연가가 적과 내통한 것과 동훤아 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 일은 크게 분노했을 뿐 한립을 탓하지는 않았다. 그런 적들을 상대로 한립이 살아 돌아온 것도 어려운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이화원의 거처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넷째 사형 송몽이 팔짱을 끼고 그 앞에 서있었다. 마치 그곳을 지키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마침 그도 한립을 발견했는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부님께 안부 인사를 드리러 왔구나, 한 사제!”
한립도 미소 지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송 사형은 한립이 이름을 날린 이후 억지로 대련을 신청해왔고 한립이 법기의 노련한 조종을 통해 그를 이긴 후로 오히려 둘의 사이가 좋아졌다.
“사부님께서 손님들과 상의할 일이 있으시니 잠깐 밖에서 기다려야겠어. 안 그래도 공법 수련에 진척이 있어 겨뤄보고 싶은 참이었는데 잠깐 어때?”
이곳에 보초를 서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는 송몽은 골치가 아픈 요청을 해왔다. 송 사형은 대결에서 진 이후로 종종 겨뤄보자는 요구를 해왔다.
하지만 한립은 자신의 실력이나 법기 등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해 번번이 거절해왔다. 그런 이유로 송몽의 말에도 한립은 쓴웃음을 지을 뿐 대결에 대해선 말을 얼버무렸다.
그리나 이화원의 손님에 대해서는 궁금했다. 이화원이 ‘상의’를 하는 대상이라면 분명 결단기 수사일 것이다.
그가 정보를 더 알아내려는데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남녀 수사 몇 명이 걸어왔고 이화원과 부인이 그들을 배웅했다.
역시 모두가 결단기 수사로 사내 넷에 여인 셋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의 앞을 막아 설 수 없었기에 한립과 송몽은 좌우로 나뉘어 공수를 하고 섰다.
이화원이 한립을 보고는 작게 미소를 짓자 다른 이들도 그를 힐끗 보고는 지나쳐갔다.
그러나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 하나가 놀라 걸음을 멈춰 섰고 그녀의 두 눈이 한립을 응시하며 반짝였다.
“남궁 선사께서 제 변변치 못한 제자를 아십니까?”
다른 이들이 여수사의 반응이 남다름을 눈치 채고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고 이화원은 더욱 어리둥절해서 겸양을 하며 질문을 던졌다.
‘남궁 선사’라는 단어가 귓속을 파고 들자 한립은 그저 심장이 쿵쾅거리며 머릿속이 멍해졌다. 비록 간신히 안색은 유지했으나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아닙니다. 그저 오래 전 알던 이와 너무 닮아서요.”
남궁 선자는 눈빛에서 감정을 지우고 다시 서늘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 말에 한립이 마음이 쓰렸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아, 그러셨군요.”
이화원이 한립의 안색을 살폈지만 고요한 표정만을 발견했을 뿐이다. 다른 이들도 ‘그랬구나.’하는 표정을 짓고는 있었으나 그녀의 말을 정말 믿었는지는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남궁 선자도 그런 분위기를 읽었지만 별다른 해명 없이 조용히 자리를 떠났고 다른 이들도 이화원 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제 갈 길을 갔다. 손님들이 떠나자 이화원의 미소도 점차 사라졌다.
“들어가자꾸나! 물을 것이 있으니.”
그 모습에 한립도 난감했지만 그저 그 뒤를 따라갔다. 옆에선 사모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한립을 다독이고 함께 방으로 들었다.
“엄월종 남궁완과 아는 사이더냐?”
이화원은 한립이 들어오자 다짜고짜 물었다. 한립은 이미 남궁완이 심경의 변화를 드러낸 바에야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자 남궁 사숙과 일면식이 있습니다.”
이화원도 한립이 바로 인정을 하자 표정이 풀어졌다.
“어찌 알게 된 사이인지 말해줄 수 있겠니?”
부인도 궁금했는지 먼저 나서서 물어왔다. 남궁완이 단박에 부인한 사실을 막내 제자는 또 긍정하니 분명 사정이 있을 것 같았다. 그 말에 이화원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한립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남궁 사숙의 사적인 사정과 관련된 일로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 그분과 약속 하였기에 사부님과 사모님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미리 준비해둔 명분으로 한립은 무척 완곡하게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한립의 말이 정말 뜻밖이었던지 이화원 부부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이화원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미 그리 약속을 했다면 식언을 하게 할 수야 없겠구나. 허나 사부로서 네게 충고를 해두자면, 남궁 선사 같은 이와는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엄월종은 마음을 사로잡는 공법에 강하니 너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수법에 걸려들 수 있어. 그래도 네가 사리가 분명하니 안심이 되기는 한다만.”
이화원의 말에 한결 마음이 편해진 한립은 명심하겠다 연달아 대답했다.
그의 예의 바른 모습에 이화원도 기분이 풀렸던지 친절하게 한립의 수련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고 한립도 그의 가르침을 새겨들었다.
반나절이 지나 한립이 수련을 하며 얻은 깨달음을 듣고는 이화원은 꽤 만족한 듯했다. 그리고는 한립이 예상하지 못한 화제를 꺼냈다.
“한립, 사적인 일을 시킬 것이 있는데 해보겠느냐?”
‘사적인 일? ’
“어떤 일이든 맡겨 주신다면, 제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에 이화원의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그는 방 안을 거닐다가 겨우 입을 뗐다.
“그리 위험한 일은 아니고, 보표(保標)가 되어 어떤 일가를 지켜주면 된다.”
‘보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고? ’
생소한 이야기에 놀랐지만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사실 송몽을 보내려고 했으나, 최근에 네가 마도인 여럿을 처리한 일로 유명하더구나. 나 이화원의 문하에 이런 용맹한 제자가 나오다니 네 사모와 난 크게 놀랐다. 듣자니 다른 여섯 개 문파 진영에도 이 이야기가 퍼져있다고 하더구나.”
이 사부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부인도 웃음을 지으며 말을 보탰다.
“게다가 송몽이 어릴 적부터 녹파동에 머무르며 속세에 나간 일이 거의 없단다. 그 아이가 속세 사정에 어두워 이번에는 네가 나서주어야 할 듯해. 보호해야 할 이들도 범인(凡人)들이니 말이다.”
그들이 자신을 칭찬하자 겉으로는 겸연쩍은 듯 웃어 보였지만 범인을 보호하는 임무란 이야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겨우 범인이 어려움을 겪어 봐야 연기기 제자가 나서도 충분할 것을 자신과 같은 축기기 수사가 나설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비록 내색은 안했지만 그래도 한립이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을 예상했던지 이화원이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네가 보호해야 할 일가는 내 사형이셨던 분의 후손들이다. 그의 외아들이 영근을 타고 나지 못해 속세에서 일가를 꾸리고 살고 있는데 그가 죽기 전 후손들의 안전과 부귀영화를 책임지겠다 약속했었다. 그에게 목숨을 빚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야. 난 지금까지 그들이 대대손손 권세를 누리게 암암리에 도와왔고 위험이 있다면 미리 처리해 주곤 했지.
그런데 마도육종이 저계 제자들을 월국 속세로 파견해 우리 칠대선파와 연관된 범인들을 처리할 거란 정보가 들어왔다. 속세에서 공급되는 물품들을 차단하고자 함인 게야.
아마 나와 그 일가의 관계 역시 파악했을지 모르니 이 풍파 속에서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줄 이가 필요하네. 당연히 마도인들의 귀에 관련 정보가 노출 되지 않았다면 가장 좋겠지만 말이다.”
모든 이야기를 듣자 한립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대 가주에게 지금 상황과 네 신분을 설명할 서신을 써주마. 그 만이 유일하게 사정을 알고 있으니 말이야. 문내에는 임무를 받아 파견을 나간 것으로 해 둘 테니 걱정 말고, 그들에 대한 정보를 담은 서책도 줄 테니 가서 어서 짐을 꾸리거라.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변고가 있기 전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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