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4
14화. 암거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달아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립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부러 태연하게 행동해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마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문 대인은 한립의 변화를 감지하고 만족스러워 했다. 상대가 평정심을 잃었을 때 비로소 진심을 털어놓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부러 연공의 성취를 미루고 있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그래. 이전의 단계들은 겨우 3년 만에 끝냈던 네가, 그 후로 2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4성이 되지 못했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한립을 바라보고 있는 문 대인의 얼굴이 불만으로 가득 찼다.
“내가 뭐라고 해도 대인님은 믿지 않으시겠군요.”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연공의 성취를 감춘 파장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그동안의 수수께끼가 한순간에 풀렸지만, 도무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더 말할 것도 없다. 네가 일전에 보였던 행동에 대해서는 관심 없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게 1년의 시간을 준다면 장춘공을 4성에 이르게 할 수 있겠느냐?”
“제가 어찌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 먼저 혈도를 풀어주고 이야기하시지요.”
문 대인은 한립의 대답을 듣고 흉악하게 일그러진 안색을 풀었지만 혈도를 풀어주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 주둥이를 어찌 믿겠느냐. 수련하는 척하며 빠져나갈 궁리를 할지.”
잠시 후, 품속에서 박달나무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가 조심스레 함을 열자 흰색 환약 한 개가 보였다. 문 대인은 그제야 한립의 혈도를 풀어주고는 그 함을 들이밀었다.
“총명한 아이니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겠다. 어찌 해야 할지 스스로 알겠지.”
한립은 굳어진 손가락을 펴며 함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단숨에 삼켜 버렸다.
“하하! 그렇지. 역시 넌 똑똑한 아이야. 나를 살려준다면 섭섭지 않게 보상해주마. 내 너를 직접제자로 삼을 수는 없더라도, 네가 그토록 원하는 부귀영화는 누리게 해주지.”
문 대인이 호쾌하게 손뼉을 치며 한립에게 약속했다.
“이제 이 환약에 대해 말해 주십시오.”
“그래 좋다. 이것은 시충환이다. 진짜 환약은 아니고 모종의 비법으로 만든 곤충의 알이지. 네가 그것을 먹었으니 그것은 네 안에서 1년간 잠복기를 거칠 것이야. 하지만 안심해도 된다. 1년 동안은 네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을 테니. 그러나 1년 후에 해독제를 먹지 못하면 넌 서서히 죽게 될게다. 알에서 환충이 부화해 네 안의 크고 작은 장기들을 전부 뜯어 먹기 때문이지. 네가 상상도 못할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말이다.”
한립은 환약에 대해 듣자 온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일단 지금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듣자하니 집안에 부양할 가족들이 많다지? 매월 집으로 보내는 은자는 넉넉한지 모르겠구나. 부족하면 내게 말하거라. 나 역시 네 가족은 항상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느니라.”
문 대인의 짧지만 깊은 한 마디에 그동안 숨겨왔던 발톱이 드러났다. 한립은 새파랗게 질려서는 어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남아 있는 의지로 간신히 이를 악물었다. 그에게 살려 달라고 사정을 하거나, 위협을 가해도 그는 한립의 약점을 놓지 않을 것이다.
“마음 푹 놓으십시오. 1년 안에 반드시 4성에 이를 테니.”
한립은 문 대인을 향한 증오의 감정을 활활 불태우며 말했다. 그는 아직 사사로운 정이나 가족들의 생사에 초연하지는 못했다.
이번 문 대인과의 승부는 한립의 처절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한립의 말이 끝나자 문 대인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자신의 얼굴을 감추는 데 지쳐보였다.
‘이 장춘공이란 것이 참으로 요사스럽구나. 코흘리개를 상대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워서야.’
장춘공은 누가 익히느냐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는 무공이며, 아무나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립이 천성적으로 총명하고 성숙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 * *
한립이 방을 나가려다 말고 물었다.
“등 뒤에 서 있는 사형은 줄곧 말씀이 없으시군요. 누구십니까?”
“맞춰 보거라. 네가 그리 기지가 넘치니 아마 맞출 수 있을 게다.”
문 대인은 한립의 물음에 실소를 금치 못하며 교활하게 답을 피했다. 그러자 한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등 뒤의 사내를 한번 쳐다보고는 말없이 방을 나왔다. 그리고는 방금 전 일어났던 일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순식간에 당했어. 겨우 이런 잔꾀를 갖고 그를 상대하려고 했다니, 역시 문 대인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그의 손에 당하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자.’
한립은 생각에 잠긴 채 자신의 거처로 빠르게 이동했다.
한편 방에서는 문 대인이 지친 얼굴로 한립에게서 뺏은 철통을 살펴보고 있었다. 철통에 미세하게 솟아난 부분을 누르자 순식간에 독침이 쏘아졌다. 독침이 쏴진 자리에는 새까만 구멍이 하나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본 문 대인은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 있나. 언제 이런 독약을 만든 게야. 난 한 번도 일러 준 적이 없거늘. 한번만 더 까불었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문 대인이 분노에 차 있을 때, 한립은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동쪽 하늘에서 서서히 해가 밝아왔다.
한립은 아직도 피로가 풀리지 않은 듯 침상에 누워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은 살아있지만 1년이 지나면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야’
한립은 장춘공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4성에 이르렀으니 1년 후에는 5성에 이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사충환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상대에게 자신의 수련 성과를 알려주고, 그를 도와주기 전에 해약을 받아먹으면 그만이었다. 그는 문득 품속에 있는 약병을 떠올리곤 그 안에서 청색의 환약을 꺼내 삼켰다. 약효가 있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수천가지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이 천하의 영약이 소용이 없다니!”
한립은 울적했다. 그는 문 대인의 이야기를 전부 믿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을 들먹이며 위협해 오니, 반항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문 대인이 정말 1년 후에 약속을 지킬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그의 말처럼 간단한 일이라면 반항할 필요가 없을 테지만, 만약 그가 숨기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돌연 살수(殺手)를 펼친다면 아무런 반격도 못하고 당할 것이다.
본래는 장춘공 수련을 빌미로 그를 위협할 생각이었다. 허나 지금은 치명적인 약점이 잡혔으니 몸을 숙이고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손에 내 목숨이 달려있다니. 그가 자비를 베풀기만을 바라야만 하는 건가.’
‘아니야, 안 돼. 문 대인이 내 목숨을 휘두르게 나눌 수는 없지. 분명히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거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져 밖으로 나가자 시원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반쯤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해를 바라보니 기운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지겠어.’
* * *
계절은 어느새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에 이르렀다. 산 속의 작은 샘에는 두 소년이 뜨거워진 열기를 식히기 위해 물을 끼얹고 있었다.
“하하! 한 사제. 정말 좋은 곳을 알아냈어. 이런 곳에 이렇게 시원하고 맑은 샘이 있다니.”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그럽니까? 이보다 더 좋은 곳도 많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두 소년은 서로 칭찬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했다. 그들은 바로 한립과 려비우였다.
약이 떨어지기 전까지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의 해후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한립이 지어준 약이 꽤나 효과가 좋았기 때문이다. 려비우는 이제 한립이 지어준 약이 없으면, 추수환의 고통을 도저히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그 결과 1년간 먹어야 할 약이 몇 개월 만에 모두 사라진 것이다.
려비우는 곧장 한립을 찾아가 약을 지어 달라 청했다. 그러자 한립은 려비우에게 칠절당의 비기를 전수해주면, 약은 얼마든지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은, 려비우는 흔쾌히 동의하여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다름 사람들 몰래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아 종종 만남을 가졌다. 그곳은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막혀 있었고, 무예를 연마할 만한 공간만 존재했다.
유일한 통로는 작은 동굴과 이어지는 입구밖에 없었는데, 이 역시 산의 절벽을 타고 자라는 나무줄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한립이 약을 전해주면 려비우가 비기를 전수했다. 이런 만남이 벌써 반년이나 지속되고 있었다.
려비우와 한립은 꽤 마음이 맞았고, 어느 샌가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한립은 다시 한 번 물을 끼얹고는 려비우를 향해 말했다.
“사형이 알려준 광망경(狂蟒劲)은 너무 강맹(强猛)해서 내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교하면서 부드러운 공법은 없습니까?”
“한 사제, 칠정당이 나 한 사람의 것인 줄 아나? 배우고 싶다고 아무 무공이나 배울 수 있게. 나도 그 중에서 선별된 일부를 익힐 뿐이라네. 내 공법이 힘에 치우쳐 있으니, 당연히 강맹한 것만 배울 수밖에.”
려비우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자 한립이 미안했는지 멋쩍게 웃었다.
“한 사제가 원하는 것은 정말 어렵구만. 자네가 곧 나를 뛰어 넘겠어.”
“무슨 말씀을요. 저야 매번 사형의 한 초식에 나가떨어지지 않습니까?”
“흥! 그것도 내가 진기(眞氣)를 쓰기 때문이지, 내 능력이라 할 수 있겠나? 만약 진기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네가 질지도 모르지.”
“사형, 사형이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어린 제자들 중에서 으뜸이라 할 만한데, 어찌 그러십니까.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하하!”
“겸손? 난 겸손 같은 건 모르네. 사제야말로 한 번도 무공을 배우거나 겨뤄본 적도 없질 않나. 지금까지 수련한 것이라곤 쓸모없는 심법뿐이고, 이렇게 단기간에 초식들을 익히다니 정말 대단하네.”
려비우가 진심을 다해 간절한 눈빛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한 사제, 내가 참견하려는 것은 아니나 당장 그 이상한 구결은 그만두고, 나와 제대로 된 무공을 익혀 보세나? 내가 확신컨대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사형은 반드시 두각을 나타낼 걸세.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이곳을 제패해 보는 것도 멋지지 않겠나.”
한립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낸들 안 그러고 싶은 줄 아시오. 호랑이 굴속에 잡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이오.’
려비우는 한립을 만날 때마다 간곡히 요청했다. 하지만 한립이 가볍게 고개를 지으며 화제를 바꾸려하자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 역시 말 못할 사정이 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칠절당에 진기를 사용하지 않고 상대를 이길 수 있는 무술은 없나요?”
한립이 묻자 그는 고개를 들어 기억을 더듬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상한 검법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지. 진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고 하지만…….”
한립은 자신이 원하던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기뻐하며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이 검법은 칠정당 내에서도 오랫동안 방치되어, 누구도 수련에 성공한 적이 없다네. 듣기로는 이 검법을 만든 장로조차 검법을 다 익히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하더군. 이름이 뭐였더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려비우는 방금 기억난 듯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옳지. 기억이 났네. 잡안검법(眨眼劍法)이라 불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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