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42
142화. 접견
월경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진가의 가주가 시골 촌뜨기의 의심을 받다니 정말 드문 일이었다.
진언의 말에도 반신반의 하는 얼굴로 한립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서신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서신을 받고도 바로 뜯어보지 않았다.
‘짝! 짝!’
진언은 의미심장하게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객실 밖에서 흰머리의 노인이 들어와 서신을 건네받았다. 그것을 받아 든 노인은 예리한 눈길로 봉투를 살피더니 탁자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말을 마친 노인은 소리 없이 객실을 나갔다. 노인의 말에 안심한 진언은 한립을 향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봉투를 열어 서신의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 쪽에서 이를 지켜보던 셋째 부인은 한립을 향해 미소를 보이고는 찻잔을 들어 상등품의 차를 즐기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찻잔을 들어올리기도 전에 서신을 보던 진언이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어르신, 무슨 일이십니까! 설마 서신이 가짜입니까?”
“아니네. 이 서신은 과거 내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어른이 보낸 것이야.”
그녀가 관심을 보이자 진언의 표정이 순식간에 평상시대로 돌아오며 설명했다. 그리고 애첩에게 아무 일 아니라는 눈빛을 보여준 후 다시 한 번 한립을 훑어보았다.
“네가 한립이더냐?”
진언의 말투는 아까와 다를 바 없었으나 그를 오래 보아온 셋째 부인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예, 제가 한립입니다. 저희 할아버님 말씀대로 제가 이곳에서 머물러도 될까요?”
“하하!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내 어릴 적 아버님과 함께 화원 백부를 딱 한번 뵈었으나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오늘 그분의 후인이 찾아 왔으니 내 친 조카처럼 돌봐줘야겠지.”
진언이 갑자기 크게 웃으며 목소리를 높이자 밖에 있던 하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주인이 저리 기쁜 이유를 궁금해 했다.
“이리 오거라. 안으로 들어가 화원 백부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 나누자꾸나. 내 한 조카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니 누구도 들어올 것 없다.”
진언이 한립의 팔을 잡고 친밀하게 이끌며 순식간에 구석에 있는 문으로 사라졌다.
한립은 진언을 따라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고, 진언이 방 안의 도자기를 움직이자 벽이 열리며 밀실이 나타났다.
진언이 주저 없이 걸음을 옮기자 한립도 그 뒤를 쫓았다. 밀실 안은 그리 넓지 않았으나 필요한 것은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탁자와 의자뿐 아니라 목재로 만든 책장도 있었는데 모든 가구가 아주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이 선사님이 보내주신 분이시니 역시 수도자시겠지요? 방금 객실에서는 큰 실례를 범하였습니다.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밀실 문을 잠근 진언이 한립을 향해 극진한 태도로 사과를 전했다.
“결례는 무슨, 모르고 한 일이니 괜찮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행동해야 하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의자에 앉은 한립이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이미 어리둥절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원래의 대범한 태도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립의 곁에 선 진언은 시종일관 공손한 태도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수도자들이 어떤 이들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신에 가까운 힘을 지녔고, 게다가 이 선사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진가가 이렇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없었으니 상대에게 조금도 소홀할 수 없었다.
“그리 예의 차릴 것 없네. 진가 가주도 앉지. 당신이 말하는 이 선사님이 바로 내 사부님 되시니 나도 완전히 외부인은 아니네.”
“어찌 범인이 수도자님께 그런 무례를 범하겠습니까? 이곳에 서서 선사님의 분부를 듣겠습니다.”
진언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자 한립도 더 권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진가를 찾아 주신 것은 무슨 연유 때문이십니까? 이 선사님의 서신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습니다.”
진언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의 부친이 임종 전에 알려주신 바로는 진가의 대 은인인 이 선사는 엄청난 위기상황에서야 직접 몸을 드러내거나 누군가를 보내주신다 하였다. 설마 진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위험에 빠진 것인가?
한립은 진가 가주의 초조한 기색을 보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월국 수도계가 타국의…….”
아주 담담한 말투로 마도육종이 칠대선파 관련 범인들을 노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자 진가 가주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 그럼…… 다른 나라 수도자들이 우리 범인들을 상대로 살수를 쓰려한단 말입니까? 이런, 이 일을 어찌 한단 말입니까!”
“진가 가주는 걱정 말게. 월국에 침입한 수사들의 수행이 그리 높지 않다 하니 내가 있는 한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게야.”
진언이 어쩔 줄 몰라 하자 한립이 차분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 * *
한 시진 후 한립과 진언은 밀실을 나섰다. 객실로 돌아온 진가 가주는 셋째 부인에게 깔끔한 거처를 마련해 한립이 머물 수 있게 하라 분부했다.
표면적으로는 은혜를 입은 이의 후손이 찾아왔으니 보답을 위해서라는 구실을 들었다. 셋째 부인은 입을 꾹 다물고 무어라 반대하지 않았다.
부인은 이미 진언이 결정을 내렸으므로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립과 진언 사이에 무언가 감춰져 있다는 것도 직감했다. 그러나 진언이 언질을 주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괜히 입방정을 떨 수도 없었다.
그녀는 부군이 한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사생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행동과 살가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리에 밝은 셋째 부인은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한립을 친절하게 대했다.
이렇게 객실을 빠져 나온 한립은 다시 하인 진평을 따라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이제 진평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끝마다 작은 어르신이라 부르며 아까와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한립은 겉으로는 진평의 대우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진가의 하인들이 아주 약삭빠르다고 생각했다. 한 순간에 안색을 바꾸니 이런 일에 아주 도가 튼 듯 했다.
진평의 안내로 저택 내의 길을 따라가다 보니 한적해 보이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주변이 조용한 것이 한립도 만족스러웠다.
“작은 어르신 이곳입니다. 이곳은 경치가 좋은 정원이 딸려있어 가주님의 귀빈들만 모시는 곳입니다.”
한립이 그곳을 살피자 진평이 간결하게 설명해 주었다. 잠시 고개를 저으며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린 한립은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모른다는 기색을 보였다. 진평은 그가 당황했다 여겨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작은 어르신께서는 아직 저녁 전이실 테지요? 소인이 얼른 상을 올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한립이 방문을 열어보았다. 역시 밖에서 보던 대로 안의 구조나 가구도 정교하고 기품이 있었다. 잠시 후 진평이 순식간에 한 상을 차려 왔다. 콧속으로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자 구미가 당겼다. 그는 바로 자리를 잡고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 모습이 우스워보였으나 진평은 여전히 예의 발랐다. 그는 한립이 식사를 마치자 가주가 가문 사람들을 소개 시켜준다고 하니 다시 객실로 가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한립과 진평이 다시 객실로 들어가자 그곳에 이미 이, 삼십 명쯤 되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진언이 아주 살가운 모습으로 한립을 자신 곁으로 불러들이자 다른 이들이 모두 놀라 한립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있는 이들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기분이 상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평소에 가주의 총애를 받던 공자 하나가 나섰다.
“할아버님,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한 번도 본 일이 없던 이인데 설마 그 자를 위해 모두 모인 것 입니까?”
손자의 불쾌한 기색을 읽은 진언이 눈을 부릅뜨며 엄하게 꾸짖었다.
“어허, 조용히 못하겠느냐? 그 자라니? 한 조카는 진가에 큰 은혜를 베푸신 분의 자손이다! 다시 한 번 예의 없게 군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진언의 말에 모두가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모두 한립을 향해 몰려들었다.
한립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마치 엉덩이에 뿔이라도 난 듯 불편한 모습으로 모두의 눈치를 보았다.
당연히 당차게 나섰던 진가 공자는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하더니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평소에 자신을 그렇게 아끼던 진언이 이렇게 나무랄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공자가 나서 혼쭐이 나자 다른 이들은 오히려 호의를 담은 눈빛으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정돈 되자 고개를 끄덕인 진언이 진가 인물들을 하나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얘가 내 큰 아이인 진지이고 지금은 나를 도와 월경의 사업을 도맡아 하고 있지, 이쪽은 둘째 아들인…….”
비록 아무렇게나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보일 테지만 한립은 진언의 소개를 들으며 그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두었다.
앞으로 그가 보호해야 할 진가의 직계들이었다. 진가 가주는 다복해서 총 다섯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둔데다 손자 손녀까지 따지면 더욱 많았다.
그 중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은 서른 살이 넘어 이미 장가를 갔고 방금 말을 꺼냈다 꾸중을 들은 공자는 큰 아들의 둘째였다.
놀랍게도 진언의 막내아들은 겨우 대여섯 살 밖에 안 되어 다른 손자 소녀보다 어렸다.
그 어린 아이에게 다섯 째 숙부라 부를 조카들을 생각하니 속으로 웃음이 났다.
진언의 부인들은 아까 본 셋째 부인 외에도 마흔 살쯤 돼 보이는 둘째 부인과 어리고 예쁜 처첩들이 일곱 명은 더 있었다.
첫째 부인은 지금 절에서 머물며 염불을 하는 중이라 외부인 앞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했다. 그 외에도 진언 곁에 있던 사내 둘은 진언의 동생들이었다.
동생들은 각자 가문에서 중요한 중책을 맡고 있었다. 그들의 자식들도 객실에 모여 있었으나 한립은 이름만 대충 기억하고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능력에 한계가 있으니 진언의 직계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음, 평아가 안 보이는구나.”
모든 이들을 차례로 소개하던 진언이 한 명이 비는 것을 발견하고 옆에 서있던 셋째 부인에게 물었다.
“평아가 아직도 외부인을 접하는 것이 꺼려지나 봅니다. 사람을 보내 부를까요?”
“그러시구려. 한 조카는 외부인이 아니니 소개는 해야겠지.”
“예, 어르신. 소련아, 어서 가 표 아기씨를 불러 오거라.”
셋째 부인이 옆에 서 있던 어린 하녀에게 분부했다.
“예, 마님!”
지난 날 한립을 안내했던 하녀가 기민하게 움직여 방을 나섰다. 그리고 진언이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일곱 해 전 쯤 나와 첫째 부인이 친지를 방문하러 가는 길에 강가에 쓰러진 젊은 여인을 구해준 일이 있다. 딱하게도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 온 몸이 상처투성이에 기억까지 잃었지.
부인의 심성이 고아 그녀가 건강을 회복하고도 갈 곳이 없자 집안 형제에게 양녀로 맡겼는데 안타깝게도 의부가 정해준 혼처에 시집을 가기도 전에 신랑 될 이가 술을 마시고 실족사 해버렸어.
그 뒤로 어린 나이에도 재가를 하지 않겠다 버티니 당시에 이 근방에서 유명한 미담이 되어 부인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이후 의부마저 병으로 죽고 나자 의지할 곳 없어진 아이를 다시 데려온 것이야.”
진언은 표 아가씨란 여인의 사정을 설명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