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45
145화. 형왕
최근 가주는 가문에 위기가 왔음을 깨닫고 어린 자녀들을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단속했다.
만일 천지분간 못하고 돌아다니다 마도인들에게 걸린다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 두 달간 진언이 온갖 구실로 집 안에 붙잡아두니 답답함이 극에 달한 이들이 앓는 소리를 해대고 있던 차였다.
그들을 더욱 열 받게 한 것은 한립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진언을 따라 자유롭게 출타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천금 같은 기회가 왔으니 난리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이번 연회의 주최자인 형왕(馨王)은 지금 월국 지존의 형제 중 하나였다.
진언의 말대로라면 황실 종친이라 볼 수 있으나 성격이 호방하여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있다 했다.
황실 사람이라 고관 그리고 상인들은 물론 강호의 기인기사까지 그 인맥이 광범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만 권력을 탐한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병권을 잡은 관료들은 피하니 이런 처신이 백성들 사이에서도 좋은 명성을 얻게 된 이유였다.
한립은 간단하게 그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으나 다 믿지는 않았다. 어쨌든 겉으로는 명성이 좋으나 그 속은 음흉한 인간들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왕부는 황성이 있는 북성에 있지 않고 남성 구역에 위치해 있었다. 한립 등이 마차를 타고 한 시진 정도를 달리자 겨우 남성 구역의 대로에 접어들 수 있었다.
남성은 진가 저택이 있는 동성 구역과는 확연히 달랐다. 대부분 규모와 형식이 획일화 되어있었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그들의 관직에 따라 저택의 면적은 물론 건물 양식까지 정해졌다.
그들은 관부의 명에 따라 관직에 맡는 거처를 배정 받았으니 함부로 개축이나 건물 형식을 변화했다간 처벌을 받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형왕은 황실의 종친이기에 당연히 남성에서 가장 대단한 건물에 거주하고 있었다. 형왕부는 거대한 진가 저택보다도 규모가 커서 정말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형왕부 총관은 몹시 마른 노인이었는데 그는 형왕을 대신해 얼굴에 웃음을 띠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대문 앞에 이미 크고 작은 수십 대의 마차가 당도하니 거대한 형왕부 앞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아직 문으로 들지 못한 이들이 대리석 계단 위에서 서로 한담을 나누는데 복색의 화려함이나 고상한 태도로 보아 범상치 않은 신분의 이들이 분명했다.
도처를 돌아보며 모든 것을 파악한 후 수도자가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한립은 마차에서 내려섰다.
다른 진가 도련님과 아가씨들이야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내려 신이나 무언가를 재잘거리고 있었다.
아직 밖에서 기다리는 이들을 보니 진가뿐 아니라 대부분이 가문의 어린 자제들을 동반하고 있었다.
‘왕야란 자가 연회를 기회로 젊은이들을 맺어주려는 것은 아닐 테고? ’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한립이 슬쩍 진언을 보니 표정이 굳은 것이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는 듯했다.
“할아버님, 우리도 어서 들어가요!”
열 예닐곱은 되어 보이는 진가 공자가 가만히 서있는 진언을 재촉했다. 보아하니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옆구리를 찔려 나선 것 같았다.
“그래, 그러자꾸나.”
버릇없는 재촉에도 진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상한 말투로 그들의 의견을 따랐다. 그들이 걸음을 떼기도 전에 먼저 온 손님들을 맞이한 형왕부 총관이 바삐 다가왔다.
“진 어르신 오셨습니까? 왕야께서 며칠 전부터 요즘 통 얼굴을 보이지 않으신다고 찾으셨었습니다. 어서 드시죠, 왕야께서 좋아하시겠습니다.”
“하하. 그래 요 며칠…….”
총관의 말솜씨가 빼어나 누구라도 그와 대화를 하면 물 흐르듯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 듯했다. 진언도 미소를 지으며 익숙한 얼굴의 총관과 몇 마디를 나누었다.
그러나 총관은 아직 문 밖에 맞이할 귀빈들이 있었기에 곧 그들을 안내하고 자리를 떠났다.
한립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총관의 뒷모습을 쫓는 눈빛에서 의혹이 자라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불안감이었다. 명백히 영기의 흐름이라곤 찾을 수 없는 몸이었는데 총관이 다가온 그 순간부터 모골이 송연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엄청난 요괴를 옆에 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고 긴장된 것이다! 자신도 명확한 근거는 없었지만 이런 예감은 대부분 맞아 떨어지는 때가 많았다. 그는 왕부의 총관을 주의해야 할 인물 명단의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한립아 가자꾸나. 네게 소개시켜 줄 분들이 많다.”
진언은 총관이 자리를 뜨자 웃는 얼굴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그 소리에 다른 진가인들은 옆에 서있다 기분이 상한 것은 당연했고 일가의 가주가 이리 편애를 해도 되는 것인지 몰래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립만은 진언이 저런 핑계를 대 자신을 곁에 두어 안정을 보장받으려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진언을 모시고 형왕부의 응접실인 대청으로 들어섰다.
대략 백여 명이 모여 있었고 모두 둘이나 셋쯤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당연히 진가처럼 여덟 명이나 온 집안은 얼마 없었다.
아직 왕야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귀빈들이 모두 자리하고 나서야 등장할 셈인 듯했다. 진언이 안으로 들자마자 바로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그들과 간단한 한담을 나눈 진언의 시선이 사람들 틈을 훑더니 바로 병색이 있는 노인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 노인 곁에도 일남일녀의 젊은이들이 서있었다. 사내는 눈썹이 짙고 눈이 큰 것이 진중해 보였고 여인은 평범한 외모였으나 두 눈만은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거침없이 진언의 뒤에선 자녀들을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는 한립도 포함되어 있었다.
“화 형 같은 대단한 신의(神醫)가 납시다니 웬일이오. 화 형의 성격이면 이런 자리는 거절하고도 남음이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흠, 나야 정말 이런 데엔 올 마음이 없었으나 왕야의 애첩이 그 괴상한 질병에서 나았다지 않느냐! 어떤 고인이 그런 일을 해낸 것인지 궁금해 왔다.”
진언이 작은 목소리로 농을 건네니 화 노인도 격의 없는 말투로 미소를 지었다.
“왕야가 화 형을 청했었다는 소식이 헛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화 형의 의술로도 못 고치는 병이 있단 말입니까?”
진언이 표정을 보니 화 노인이란 자의 의술이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허허허! 이 세상에 수많은 기이한 질병이 있을 진데 지금까지 의원으로 명성을 날린 것도 감지덕지지. 내가 고칠 수 없는 병이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네.”
“화남, 화방은 어서 인사 올리거라, 진 할아버지시다.”
화 노인이 옆에 서있던 두 명에게 명하자 남녀가 진언을 향해 바로 예를 올렸다.
“하하, 몇 년 못 본 사이에 많이도 컸구나. 지금 지닌 것이 없으니 이 비취 옥패라도 기념으로 주마.”
따뜻한 눈빛으로 친우의 손자손녀를 본 진언이 품을 뒤져 푸른 옥패 한 쌍을 꺼내 들었다.
그의 말과는 달리 누가 보아도 엄청 값나가는 물건이 분명했다. 어린 소년은 잠시 눈이 빛났으나 금세 그런 기색을 지웠고 소녀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옥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쯧, 실없이 굴지 말고 받거라. 진 아우는 남이 아니니 받아도 된다.”
화 노인이 그 모습을 보더니 웃음 섞인 질책을 했다. 그제야 남녀가 진언에게 옥패를 하나씩 건네받았고 소녀는 뛸 듯이 기쁜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다른 아이들은 본 일이 있고 이 아이가 이번에 월경에 왔다는 조카인가?”
“그렇습니다. 이 아이가 집안 어른의 후인인 한립입니다. 한립아, 이분이 네 백부 되는 분이시고 월경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신의이시다. 황상만을 진료하는 어의인 엽 의원과도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의원이신 게지.”
“화 백부님을 뵙습니다!”
“그래.”
공손히 인사를 올리는 한립에게서 별 다른 점을 찾지 못한 화 노인이 그저 자상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요즘 떠도는 세간의 소문이 떠올랐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품에서 작은 자기 병을 꺼내 건네었다.
“이건 내가 만든 호심환(護心丸)이다. 비록 모든 병을 다 고칠 순 없겠지만 웬만한 작은 질병이나 상처는 낫게 해주지. 잘 간직하고 쓰도록 하거라.”
노인이 병의 정체를 밝히자 다른 진가 소년소녀들의 질투와 지시의 기색을 드러냈다. 심지어 화남이나 화방도 놀란 표정을 지을 만큼 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범인이 만든 단약이 축기기 수사인 한립의 눈에 들 리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의 호의를 바로 거절할 수가 없어 머뭇거리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한립아, 이 호심단은 화 형의 진법이 담긴 것으로 쉽게 남에게 선물하지 않는 귀한 것이다. 오늘 처음 후배를 본 기념으로 선물하기엔 정말 대단한 물건인 게지.”
진언만이 한립이 그것을 변변치 않다 여기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친우를 대신해 해명했다.
아무래도 한립이 화 노인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화 노인은 오히려 이상하단 눈빛으로 진언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구구절절 저런 부연 설명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이리 귀한 단약을 처음 보는 청년에게 넘긴 것은 모두 진언의 얼굴을 보아 그런 것이다. 진 아우의 사람이 아니라면 천금을 준다 해도 팔지 않을 물건이었다. 그가 의문을 담아 몇 마디 하려는 찰나 우렁찬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왕야께서 납십니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삽시간에 사라지며 모두가 대청의 한 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문을 통해 하녀 넷이 나와 상석의 뒤에 서더니 그 뒤를 따라 남녀 한 쌍이 차분히 걸어 나왔다.
사내는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었고 두 눈에 호랑이 같은 기세가 어려 있었으며 아름다운 여인은 겨우 스무 살 초반으로 긴 치마의 궁장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등장하자 모두가 몸을 일으켜 예를 취했다.
“왕야와 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그녀는 왕야의 정실은 아니었으나 최근 가장 총애를 받는 여인이다 보니 부인이란 칭호를 사용한 것이다.
“다들 본 왕의 좋은 벗들인데 이리 예를 차릴게 무엇이오. 모두 앉으십시다.”
왕야는 듣던 바대로 성격이 시원시원했다. 누구라도 그를 보면 호감을 느낄 만했고 그 옆에 앉은 젊은 여인은 옅은 웃음을 띠고 말을 아꼈다. 다른 이들도 왕야의 말에 다시 분분히 자리에 앉았다.
“본왕은 말을 돌려 할 줄 모르니 바로 본론을 밝히겠습니다.”
“왕야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왕야와 오랫동안 교류하며 그 성정을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그 중에는 진심을 담은 말도 있을 것이고 왕야에게 알랑방귀를 뀌려는 자들도 섞여있을 터였다.
“여러분들을 모신 것은 첫째 사랑하는 여인 청아가 완쾌한 것을 축하하고자 함이고, 두 번째는 본 왕이 모두에게 좋은 기회를 주고자 함입니다. 다만 그 인연이 닿을지는 운에 따라야겠지만 말입니다.”
사람들은 왕야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두리번거렸다.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 좋은 기회를 주고자 한다니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허허, 청아야 보거라. 내 모두들 놀랄 것이라 그랬지 않던.”
형 왕은 그 어리둥절한 모습을 살피고는 옆의 아름다운 여인을 향해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여인이 잠시 웃더니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안 놀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왕야는 그런 그녀가 어여쁜지 짧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은 청아의 괴병을 낮게 해주신 분이 바람을 부르고 불을 토해내는 정말 신선 같은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본 왕의 어린 아들이 신선이 될 자질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시고는 그 아이를 제자로 들여 주신다 하셨지요.”
그 말을 하는 형 왕은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 대청을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설마, 수도자! 전설 속의 수도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바로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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