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5
15화. 잡안검법
“잡안검법이요?”
“그렇다네. 자네 생각에는 잡안(眨眼), 그러니까 눈을 깜빡이는 것과 검법이 무슨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러니 이 이름이 웃긴다는 거지.”
“사형은 이 검법을 익혀본 적이 있습니까?”
“당연히 없네. 누가 내공조차 사용하지 않는 무공에 시간낭비를 하겠나? 빚 좋은 개살구지. 나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무공을 익혔다는 걸 들어본 적도 없네.”
려비우가 말을 이었다.
“듣기로는 당시 그 검법을 만든 장로가 칠현문을 여러 번 위기에서 구했다더군. 임종 직전에 이 잡안검법을 반드시 칠정당의 일곱 가지 절기에 속하게 해달라고 유언했다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잡안검법이 어떻게 칠절당의 칠절(七絶)로 꼽힐 수 있겠나.”
려비우의 이야기를 들은 한립은 이것이 바로 자신이 오랫동안 찾고 있던 무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려사형, 그럼 잡안검법을 한 부 베껴와 줄 수 있을까요?”
“하하! 문제없네. 만약 다른 검법을 부탁했다면 어려웠을 테지만, 이 잡안검법은 칠절당 구석에 처박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으니 말이야. 내가 원본을 갖고 나올 테니, 사제가 그것을 옮겨 적은 후에 돌려주겠나? 그런 다음 제자리에 갖다놓으면 아무도 모를 걸세.”
한립은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그럼 이만 난 가봐야겠네. 늦었다가는 칠절당 총관에게 몰래 빠져 나온 것을 들킬지도 몰라.”
려비우가 옷을 걸치며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리곤 동굴 입구로 천천히 기어 나갔다.
한립은 동굴 밖으로 사라지는 려비우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점차 미소가 사라지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 *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도 신수곡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가장 눈에 띈 것은 뜨거운 햇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몸을 칭칭 싸맨 채 삿갓을 쓰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지친 내색 없이 문 대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와 친분을 쌓아보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는 상대해 주지 않았고,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꼭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같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허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간혹 그의 뒷모습에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을 뒤져 봐도 누구와 닮은 것인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한립은 곧장 방으로 들어와 침상에 누웠다. 눈을 감고 오늘 배운 무공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그는 한 번 눈으로 본 것은 절대 잊지 않았는데, 장춘공을 수련하면서 얻게 된 능력 중 하나였다.
시간 날 때마다 어떤 무공이든 머릿속에 정리해 담아 두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무공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려비우가 한립의 실력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것이다.
두 달 전, 한립은 두 종류의 영약에 힘입어 장춘공 4성을 돌파했다. 그리고 지금은 5성에 이르렀다. 황룡단과 금수환의 약효는 너무 강해서 한립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는 이 양약을 조금 남겨두었는데 그것은 6성의 고비에 다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문 대인과의 약속한 기일까지 6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비록 려비우에게 무공을 전수받고 있지만, 딱 맞는 내가진기(內家眞氣)가 없는 그로서는 그럴듯한 몸동작만 익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무공이 약한 자에게는 먹힐지 모르나 문 대인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한립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잡안검법 뿐이었다. 그 검법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 * *
며칠 후, 한립은 몰래 신수곡을 빠져 나와 려비우와 만나기로 하였다. 문 대인은 한립이 몰래 빠져 나가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가 어디를 가든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그것은 아마 그를 옥죄거나 간섭하면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흐트러져 수련에 방해가 될까 염려해서였다. 한립의 약점을 쥐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그를 위협하기 보다는 스스로 수련에 전념하길 바랐다.
한립은 길을 지나는 동안 다른 제자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드디어 동굴 속 비밀 장소에 다다랐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린아이처럼 물장구를 치는 려비우가 보였다. 그는 한립의 발소리를 듣더니 뒤를 돌아보며 심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 사제, 가면 갈수록 늦는군. 내가 매번 반나절은 기다린다네. 한 번이라도 일찍 올 수는 없나?”
“죄송해요. 사형. 난…….”
한립이 우물쭈물 하고 있을 때, 려비우가 먼저 거대한 꾸러미를 한립에게 던져주었다.
“이게 뭐에요?”
“뭐라니? 자네가 부탁해서 어렵게 빼내온 잡안검법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려비우가 그를 보고 진지하게 말했다.
“이게 그 검법라고요? 혹시 저를 약 올리려고 숫돌을 넣어온 건 아니죠?”
그가 두 팔을 들어 무게를 어림짐작해 보려다가 그만 넘어질 뻔했다.
“하하하!”
려비우는 그런 한립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저 조용히 웃다가 나중에는 땅에 쓰러져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다.
한립은 미친 듯이 웃고 있는 그를 내버려두고 보따리를 살짝 건드려 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보따리 위에 아른 거리더니, 단단히 묶여 있던 매듭이 저절로 느슨하게 풀려나갔다.
짝짝짝!
보따리가 풀리자 경쾌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려비우는 웃음을 멈추고 이제는 벌개진 얼굴로 한립에게 박수를 보냈다.
“사제가 전사수(纏絲手)를 다루는 솜씨를 보면 이 무공은 마치 자네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네. 이 무공을 알려준 지 겨우 두 달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말이야.”
“설마 내가 이 무공을 선뵈길 바라서 이렇게 한 보따리를 싸온 것은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보따리를 풀어보면 무슨 말인지 알 걸세.”
려비우가 웃음기를 지우고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한립은 다시 손가락을 이용해 보따리를 전부 풀어냈다. 그제야 보따리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이 모두 드러났다.
“이건…….”
한립의 두 눈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했다.
“어떤가? 놀랬나?”
“내 눈이 어떻게 된 건지 아니면 사형이 미친 건지 모르겠군요. 칠절당 장서의 반을 훔쳐낸 것입니까? 이 사실을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사형과 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한립은 거대한 서책더미를 만지작거리며 흥분해 따져 물었다. 하지만 려비우는 개의치 않아하는 얼굴이었다.
한립이 어떤 말을 해도 그는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뭔가 잘못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생각했다.
“사형이 바보도 아니고 광인은 더더욱 아니지요.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행했다면 이유가 있을 겁니다.”
려비우는 한립이 화를 가라앉히고 원래대로 돌아오자 약간 아쉬워했다. 그리고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이 다 있나. 내 방금 설명하려 했으나 틈을 주지 않는군.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나를 탓하는 건가. 정말 너무하군.”
한립은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재촉하며 다시 물었다.
“이상한 말씀 그만하시고 어서 해명이나 해보십시오. 사형을 부러워하는 사제들이 이런 사형의 모습을 본다면 뭐라 하겠습니까? 무척이나 실망할겁니다.”
려비우는 다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좀 더 그를 놀리고 싶었지만, 한립의 걱정스런 마음을 눈치 채고는 서책 한권을 던져주며 손짓했다.
“펼쳐서 살펴보면 다 알게 될 걸세.”
“그냥 말하면 될 것을 음흉하게 뭐하는 겁니까?”
려비우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머리가 아파왔지만, 곧 표지를 넘겨보자 놀라고 말았다. 첫 장에는 검은색으로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잡안검법’
“아직 놀라긴 이르네. 다른 책들도 한 번 살펴보겠나.”
려비우가 이어서 몇 권의 서책들을 넘겨주었다. 그 책들에도 똑같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려사형……. 제발 이게 전부 잡안검법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안타깝지만 그것이 바로 정답이라네.”
려비우가 두 손을 펼쳐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도 안 돼. 여기에 있는 서책들은 어림잡아도 100권은 돼 보이는데, 어찌 전부 잡안검법이란 말입니까?”
한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게 물어 본들 알겠나. 나도 이렇게나 많은 잡안검법들이 있는지 정말 몰랐네.”
그는 다시 큰 소리로 웃었다. 한립이 이렇게 놀라고 충격 받은 모습을 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평상시 한립은 항상 침착하고 모든 일에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는 사람 같았다. 한립의 이런 표정을 보니 서책을 갖고 온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이 책들을 살펴보셨습니까? 모두 몇 권입니까?”
“총 74권일세. 몇 번이나 세어보았지. 모두 같은 이름이 쓰여 있더군.”
려비우가 한립의 말을 듣자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몇 권인지 알아둬야 다시 돌려놓지. 한 권이라도 빼먹으면 큰일 아니겠는가.”
* * *
한립은 누렇게 변한 서책의 종이를 천천히 넘기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한 번 내려앉을 때마다 십여 줄을 읽어나갔다.
두꺼웠던 책장이 어느새 반이나 넘어 가 있었다. 그리고 장도를 휘두르며 수련을 하고 있던 려비우가 흘끗 쳐다보았을 땐, 어느새 다른 서책을 읽고 있었다.
서책을 넘겨보며 때때로 생각에 잠겼지만 그의 시선은 책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고 잡안검법도 한 권, 한 권 빠르게 읽어나갔다. 그가 열한 번째 비급들을 모두 보았을 때 돌연 읽기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서책을 꾸러미 안으로 던져 넣고 장춘공의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방금 읽어낸 십여 권의 서책을 그의 머릿속에 담아두려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했다. 기뻐하는 얼굴에서 찡그린 얼굴로, 다시 낙담한 얼굴로 변했다.
……
얼마나 지났을까. 한립이 두 눈을 뜨고는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깜짝 놀랐다.
려비우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거의 맞닿을 거리에 놓여 있었다.
“도법을 수련하던 중에 이게 뭐하는 거예요?”
“한 사제, 시간이 얼마나 지난줄 아는가? 주위를 둘러보게.”
려비우가 입을 비죽거리며 말했다. 그제야 사방이 어둠으로 둘러싸였다는 것을 알았다.
“허! 시간이 바람처럼 지나갔네요. 이렇게 흘렀는지 몰랐어요.”
한립이 일어서며 말했다.
“어떤가? 흥미로운 점이라도 찾아냈나?”
려비우가 열렬한 눈빛으로 한립을 주시하며 물었다.
“네. 내게 딱 맞는 무공이에요.”
“어떤 점이 좋다는 거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게나.”
“이 비급들은 여러 가지가 마구 뒤섞여 있어요. 하나로 묶을 만한 공통점은 찾기 어려워요.”
한립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잡안검법은 무슨 뜻이지? 정말 그런 검법이 가능한가?”
“잡안검법은 정말로 존재해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 서책의 일부분에 불과해요. 정말 작은 부분이요.”
“감질나는군. 그렇게 답답하게 굴지 말고 한 번에 말해주게.”
느긋하고 유유자적한 한립의 말투에 답답해하며 재촉했다.
“검법에 따르면 상대의 시선이나 빛에서 착오를 일으켜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상대가 눈을 한번 깜빡거리는 사이에도 목숨을 잃게 할 수 있다 하여 잡안검법이라 부른답니다.”
“그런 기이한 검법도 다 있단 말인가? 세상에 정말 신기한 일도 많군 그려.”
“그런데 이 검법을 익힐 수 없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답니다. 진기가 소성(小成)의 경지를 넘은 자는 익힐 수 없고, 의지가 약한 자는 익힐 수 없고, 자질이 없는 자 또한 익힐 수 없습니다.”
려비우는 첫 번째 조건을 듣고는 바로 이 무공을 탐하는 마음을 버렸다. 그의 내가진기(內家眞氣)는 이미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가 자신의 내력을 버려가면서까지 위력도 검증되지 않은 무공을 배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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