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51
151화. 불길한 신호
잠시 후 소녀와 노인이 들어왔다. 왠지 조금 어색해 하는 그들의 모습에 한립도 이들의 요구가 궁금해졌다.
“결정을 했더냐?”
“선배님, 저와 손녀가 이야기를 나눈 결과 물건이 아니라 어떤 청을 올리려 합니다.”
“어떤 청을 하려는 게야?”
“그, 그것이 제 손녀가 선배님의 수행이 깊은 것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선배님의 문하에 제자로 들어가고 싶다 하니 정성을 봐서라도 손녀를 받아주십시오!”
노인이 말까지 더듬으며 말을 끝내자 소녀가 영특하게도 한립 앞에 나서 예를 올렸다. 이런 요청을 받으리라 생각지 못한 한립은 조금 당황했다. 그리고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를 보고 제자를 들이라는 것은 우스운 일일 뿐이었다. 이미 마도인에게 악명을 날려 자기도 살기 힘든 판국에 무슨 혹까지 붙이고 다니란 말인가!
이 일은 허락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말을 듣고 보니 저 소저의 자질을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으나 그럭저럭 쓸 만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린 나이에 벌써 연기기 육성의 경계에 있지는 못할 터였다. 그는 저 경지에 들기 위해 무수히 많은 단약을 집어삼켰어야 했다. 그런 그녀가 산수로 떠도는 것은 조금 아까운 일이었다. 그가 직접 제자로 들이진 못해도 합당한 사부를 소개시켜 줘도 될 듯했다.
기억하기론 마 사형이 아직까지 제자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백약원을 떠나자 불평을 하며 제자라도 한 명 들여 이곳을 맡겨야겠다고 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이 소저가 총명하고 자질도 괜찮으니 마 사형에게 소개를 시켜보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어쨌든 정말 둘이 사제지간이 될지는 둘의 인연 아니겠는가? 한립이 생각에 잠기자 노인과 소녀는 상대가 자신들의 요청을 진지하게 고려한다고 여겨 기대감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리와 보거라 영근을 좀 살펴보자.”
“예!”
소녀는 얌전히 명에 따라 그 앞으로 나서 하얀 팔목을 내밀었다. 한립이 가녀린 팔목에 손을 대 영기를 주입해 보았다.
“이영근이라니 자질이 나쁘지 않구나.”
중얼거리듯 말하는 소리에 소녀와 노인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그가 당장이라도 소녀를 제자로 받아 주리라 기대하는 듯했다.
“자질은 충분하나 아쉽게도 난 지금 제자를 받을 생각이 없구나.”
크게 실망한 표정의 소녀를 보고 한립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비록 제자를 받지 않으나 다른 축기기 사형을 소개해 주마. 네가 제자가 될 수 있을지는 사형의 마음이겠지만 말이다.”
“정말이십니까?”
울상을 짓던 소녀가 정신이 번쩍 들어 되물어왔다. 한립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품에서 말을 전하는 부적을 꺼내 무어라 중얼거린 후 그것과 옥패를 소녀에게 넘겨주었다.
“부적과 옥패를 지니고 황풍곡 백약원의 마 선배님을 찾아 가거라. 그분이 너를 받아 주실 지는 네 복에 달렸다.”
차분한 상대의 말투에 소녀는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연신 한립에게 감사 인사를 했고 노인도 크게 기뻐했다.
“제자로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니 내 너희에게 서책에 대한 대가로 따로 상계 법기를 하나씩 주마.”
그는 저물대에서 청녹색의 비단과 남색의 단검을 꺼내 노인에게 주었다. 놀랄 일이었다.
상대가 손녀에게 사부를 소개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는데 이런 선물까지 주다니 감동이었다. 노인은 서둘러 감사를 표하며 공손히 법기를 받아들였다.
상계 법기는 오랜 세월 수도계에 몸담은 그도 겨우 한 개를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두 개가 생겼으니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한립은 오래 머물지 않고 남겨놓은 영기의 표식을 거둬들인 후 그곳을 나섰다.
노인은 한립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희희낙락하며 비단 법기는 소녀에게 주고 자신은 단검을 챙겼다.
당장 내일이라도 황풍곡으로 출발해 손녀에게 사부를 찾아줄 생각을 하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판이었다.
소가 노인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한립은 벌써 진가 저택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법기를 타고 자신의 거처까지 들어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침실로 들어갔다.
새로 얻은 무명구결은 아무리 생각해도 실용성이 뛰어나 당장 밤을 세워 익혀볼 요량이었다.
구결은 영력을 운용하는 잔기술 정도라 법력이 충분히 받쳐주는 한립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 하루 밤 사이에 그는 대충 공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막 운공에서 눈을 뜬 그는 최근 운이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저물대 안에서 무언가 퍽하고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세 어두워진 얼굴로 저물대를 뒤져보니 어제 오 선사에게 준 구슬과 똑같이 생긴 구슬의 표면이 갈라져 있었다.
묵묵히 그걸 내려다 본 한립은 바로 방문을 열고 나섰다. 주위를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바로 신풍주에 몸을 실어 어딘가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는 월경성 밖의 작은 산촌 마을에 도착했다. 허공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그는 연신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결국엔 마을에서 수 리 떨어진 구석진 구릉에 한립이 내려섰다. 그의 눈빛이 거대한 버드나무에서 떨어질 줄 모르더니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법술을 외웠다.
“수(收)!”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버드나무 밑 깊숙한 곳에서 녹색 빛이 솟아올랐다. 그 빛은 표면이 터져나간 구슬을 안고 있었는데 바로 한립이 오 선사에게 건넸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한숨을 내쉰 그가 손을 뻗자 구슬이 한립의 손에 떨어졌다.
구슬을 감싸고 있던 빛은 한립의 손바닥으로 흡수되고 깨진 구슬만 남았다. 침묵 속에서 화구를 날려 버드나무를 재로 만든 한립은 구덩이 안을 자세히 살폈지만 이렇다 할 수확을 얻지 못했다.
“보아하니 놈들에게 당했구나.”
고개를 저은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가 오 선사에게 아무렇게나 골라 준듯했던 자광주(紫光珠)는 본래 자광감응주(紫光感應珠)라 불리는 것이었다.
이 법기는 두 개가 한 쌍으로 구슬을 이용해 보호막을 형성할 뿐 아니라 천(千) 리 내에서 상대 구슬의 보호막이 깨지면 다른 구슬도 터져나가는 기이한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이 법기는 마도육종 중 합환종(合歡宗) 제자들이 주로 가지고 다니는 방어성 법기로 그들을 사냥하며 얻은 수확물 중 특이하다 여겨 팔지 않고 남겨 둔 것이었다. 그가 오 선사에게 이것을 줄 때는 정말 만일을 대비해서였다.
그런데 겨우 하루 밤 사이에 이 법기를 사용한 데다 상대에게 당해 종적을 감출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정말 의외의 사건이라 한립도 다음 행보를 결정하기 어려웠다. 그는 잠시 고민을 하며 구덩이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한립은 신풍주를 타고 하얀 빛 줄기로 변해 길을 뒤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떠나자 잡초가 우거진 구릉이 다시 고요해졌으며 종류를 알 수 없는 새와 벌레의 소리가 간혹 들리는 것 외에는 어떤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헉헉’
한참이 지난 뒤 갑자기 구릉에서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한립의 손에 재가 된 버드나무에서 십여 장 떨어진 나무 아래에서 사람 하나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는 온 몸을 검은 천으로 감싸 두 눈 만을 내놓고 있는데다 노란색 보호막까지 두르고 있었다.
그가 완전히 흙을 뚫고 나오자 그 보호막은 점차 빛을 잃고 사라졌다. 곳곳을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살핀 그는 낮은 소리로 외쳤다.
“그 자가 갔으니 모두 나와 보거라.”
목소리가 울리자 구릉의 몇몇 지면이 올록볼록해지며 비슷한 차림의 세 사람이 노란 보호막을 둘러쓴 채 솟아올랐다. 그 중 하나는 몸이 가녀린 것이 여인인 듯했다.
“큰 형님, 그들이 분명 이곳으로 오는 자를 붙잡아 두거나 죽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떠나게 둬도 아무 일 없을까요?”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몸을 다 부르르 떨었다. 그들에게 이런 일을 사주한 자들이 얼마나 독한지는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명할 때 축기기 수사라 말해 준적은 없으니 별 일이야 있겠느냐. 그런 자를 상대했다간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말이야.”
“큰 오라버니 말씀이 맞아요. 우리가 어찌 축기기 수사를 붙잡아 둔단 말이에요? 이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 도리를 모르는 자들이에요!”
뒤이어 나온 3인 중 여인이 화를 참지 못했다. 그녀의 말에 나머지 셋이 쓴 웃음을 지었다. 어린 여인이 아직까지도 저런 순진해 빠진 말을 하니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이미 자신들의 명줄을 쥐고 있는데 무슨 도리를 따져가며 일을 시킨단 말인가?
“소매의 말이 아주 틀리다고 볼 순 없습니다. 아마 그들도 이런 거물이 걸려들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가능성이 커요.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뿐 아니라 축기기 수사를 파견했어야 할 테니까요.”
“맞습니다. 사정을 잘 설명하면 그리 큰 벌을 내리진 못할 거예요!”
체구가 좋은 남자도 연신 동의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이 다른 이를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자기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단 말입니다. 저 축기기 수사가 어딘가 낯이 익어요.”
덩치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동시에 나머지 사람들도 놀란 기색이었다. 특히 여인이 호기심이 생겼는지 당장 무언가 질문할 기세였는데 큰 오라버니라 불리던 인물이 팔을 휘저으며 말을 끊었다.
“됐으니 일단 이곳을 벗어나 이야기 하자꾸나.”
여인이 하려던 말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를 가든 내가 데려가 주는 것이 어떻겠소?”
그들이 막 법기를 타고 떠나려는데 공중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네 명의 복면인들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할 생각도 못하고 모두 방어 법술을 펼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십 장 위에서 신풍주를 탄 한립은 조용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가슴이 내려앉은 듯 놀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자가 도대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으며 어찌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철수하자!”
큰 형이 과감하게 소리쳤다. 동시에 원반형 법기를 품에서 꺼내더니 그것을 타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머지 셋도 각자 다른 방향을 택해 동시에 비상했다. 모두 축기기 수사와 붙으면 승산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바로 도망을 택한 것이다.
어린 여인은 그들 중 법력이 가장 약했으니 불안한 마음에 법기에 타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립이 나룻배 같은 것에 타서는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었다. 바로 네 사람을 쫓지 않는단 사실에 놀랍기도 했지만 퍽 안심이 되었다. 이 틈을 타 최선을 다해 도망간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너무 놀라 고개를 틀어보니 눈부신 붉은 빛을 발산하는 화살 모양의 물건이 흉흉한 기세로 자신을 쫓고 있었다.
여인은 당황한 마음에 손에 들고 있던 빙창부(氷槍符)를 냉큼 던져버렸다. 투명한 얼음의 창이 붉은 빛과 충돌하더니 하얀 눈처럼 흩날렸다.
그러나 붉은 빛을 제지하지 못하고 여인의 물 속성 방어막을 향해 직진하고 있었다. 물 속성 방어막의 푸른빛과 붉은 빛이 맞부딪쳤다.
그녀는 충격에 밀려났으나 방어막이 깨져나가진 않아 한숨을 놓았다. 그때서야 저 축기기 수사에게 한 패가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기습한 ‘사람’을 확인했을 때 믿을 수 없는 사실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사병의 복장을 한 인형이 철갑옷을 두르고 공중에 떠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중 하나는 아까 본 붉은 빛의 화살을 겨누고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노란 빛을 분출하는 장도를 등에 매고는 서서히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왔다.
# 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