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혈시(血侍)
등 뒤에서 소왕야의 목소리가 들릴 땐 한립도 조금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들을 바라본후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넌 진가의 사람이 아니냐? 네 놈이 축기기 수사였다니.”
소왕야가 한립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 소리쳤고 그 옆에선 깡마른 인물도 말은 없었지만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대머리 거한은 진중한 눈길로 한립을 뚫어져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보다 성취가 높은 축기기 중기 수사이니 조심하거라. 아무래도 흑풍진(黑風陣)의 도움을 받아야만 잡아갈 수 있겠다.”
“혈시 대인! 그렇다면 교주님의 수련에 더 큰 도움이 될게 아닙니까?”
그 말에 소왕야는 걱정은커녕 오히려 희색을 드러냈다.
“흐흐. 그렇지. 이전에 잡아들인 이들은 겨우 축기기 초기 수사들에 불과했으니 저 자의 피가 훨씬 효과가 좋을 것이다.”
소왕야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어 한립을 쳐다보고는 돌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왜 이곳에 온지는 모르나 오늘 살아 돌아갈 생각은 접어라. 흑풍진을 펼쳐라!”
웃음이 뚝 끊긴 후 소왕야의 서늘한 외침이 들려오자 흑의인들이 서둘러 커다란 검은 깃발을 꺼내 들고는 한립을 둘러쌌다.
“너흰 제대로 방어하고 있거라. 나머진 내가 맡을 테니.”
이 말을 남기고 한립은 흐릿한 그림자가 되어 사라졌다.
“조심하라!”
거한이 한립의 움직임을 보곤 안색이 돌변해 외쳤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한립의 몸이 흑의인 곁에서 반짝 나타났다 사라지니 깃발을 휘두르고 있던 수도자가 아무 낌새도 없이 머리를 잃었다. 목에서 피를 뿜어낸 시신은 그대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거한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나머지 흑의인들이 놀라 다른 수를 쓰기도 전에 한립이 다른 이의 곁에 몸을 드러냈고 또 머리 없는 시신이 늘어났다.
그러자 더는 버틸 수 없었던지 너도나도 흔들던 깃발을 멈추고 분분히 각양각색의 보호막이나 방어 법기를 발동하려 했다.
그러나 손이 느린 수도자들은 이미 둘이나 순식간에 죽어나갔다.
“죽고 싶으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거한은 두 눈에서 기이한 검은 빛을 번뜩이더니 전신을 핏빛 광으로 덮고 한립을 향해 충돌해왔다. 거대한 몸집에 걸맞지 않은 엄청난 속도였다.
한립은 자신을 덮쳐오는 거한과 방어막을 갖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흑의인들을 번갈아 보며 과감히 몽산사우가 있는 수십여 장 밖으로 물러났다.
허공에 몸을 들이 박은 거한은 바로 방향을 돌려 한립 일행이 있는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법기를 꺼낼 생각도 없는지 그저 맨 몸이었다.
이에 몽산사우 중 둘째가 기회라 여겼던지 바로 손을 들어 녹색의 삼릉자(三稜刺)를 거한의 면상에 날려 보냈다.
대머리가 삼각형의 가시 같은 것이 날아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법기를 피하거나 몸을 멈출 생각은커녕 그저 방향을 유지하며 뚫고 나가려는 생각인 듯했다.
마른 사내가 흥분해 소리쳤다.
“삼릉자는 상계 법기 중에서도 뛰어난 물건이니 분명 요절을…… 엇, 삼릉자가!”
그가 말을 하다 말고 놀라 소리를 쳤다.
삼각형의 가시가 거한의 몸을 두른 핏빛에 닿자마자 마치 잡아먹히기라도 한 것처럼 요동을 치다 멈춰버렸다.
“겨우 이런 것으로 날 어찌해 보겠다니!”
광소를 한 거한이 거대한 손으로 삼릉자를 짓누르자 바로 녹색 빛이 사라지며 영기를 잃었다.
이제 몽산사우는 물론이고 한립 마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자는 귀려문 소주처럼 특이한 최상급 마공을 익힌 자였다. 거한이 순식간에 몽산사우 앞으로 와 그들의 방어막을 내려쳤다.
‘쿵!’
단 한 번의 괴성이 울렸을 뿐인데 연기기 수사 네 명이 연합해 방출한 빛의 보호막이 움푹 들어가며 빛을 잃었다.
안색이 급변한 이들이 저 붉은 기운이 감도는 주먹엔 그들의 법기로는 대응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배님, 어찌할…….”
검은 얼굴의 노인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한립에게 묘수가 있는지 물어보려 했다.
한립은 말없이 손을 뻗어 눈부신 하얀 빛을 뿜어내는 작은 방패를 방출했다. 방패가 금세 몇 배로 몸을 키우더니 두 번째로 날아오는 붉은 주먹을 막아섰다.
‘쿠앙!’
귀를 찢을 듯한 엄청난 충돌음과 진동에 미리 대비하지 못한 부근의 수사들은 바닥에 주저앉을 뻔 했다.
몽산사우도 머리가 울리고 눈이 부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유일하게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은 한립과 거한이었다.
한립은 하얀 방패에 난 작은 흔적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놀람을 삭였다. 이 하얀 껍질 방패가 얼마나 단단한지는 한립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 상대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높아졌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저물대로 손을 가져갔다.
동시에 검은 빛 한 쌍과 금빛 여섯 개가 동시해 출격해 거한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이렇게 많은 최상급 법기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자 거한도 크게 놀라 두려운 빛을 드러냈다.
거한이 크게 울부짖으며 전신의 핏빛 기운을 끌어 올렸고 폭이 삼장을 될 법한 거대한 빛의 구가 되어 하늘에 떠올랐다. 허공에서 꼼짝도 않는 그를 향해 금부자모인과 오룡탈이 달려들었을 때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법기들이 빛을 찔러대도 그 안에선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고 가까이 접근하면 무언가에 막힌 듯 더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초조해진 한립이 돌연 무슨 생각인지 주위를 살폈다.
역시 흑의인들이 소왕야와 왕 총관으로 예상되는 복면인의 지휘아래 다시 대오를 이루고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검은 깃발들이 웅웅거리며 검은 안개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영석 광산에서 보았던 청양마화(靑陽魔火)를 떠올리게 했다.
‘절대 안 돼.’
그는 하얀 방패를 검은 얼굴의 노인에게 던져주었다.
“일단 쓰고 있거라. 난 저것들을 먼저 처리할 테니.”
한립이 번쩍이더니 방어막을 뛰쳐나갔고 거한의 핏빛 구를 찔러대던 법기들도 자연히 한립에게로 돌아왔다.
한립은 주변을 맴도는 법기들을 보곤 저물대에서 동일한 모양의 작살 세 개를 더 꺼내 들었다.
그것들을 가볍게 허공으로 던지자 동시에 세 줄기의 붉은 빛이 흑의 수사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화염연환비차(火焰蓮環飛叉)’는 붉은 거미와의 일전에서 거둔 수확이었는데 위력도 괜찮고 세 개가 한 벌로 이루어져 있어 조종하기에도 편했기에 지니고 있었다.
한립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나머지 검은 빛 두 개와 금빛 여섯 개까지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갔다.
이게 바로 대연결의 무서운 점이었다. 총 열한 개의 법기가 허공을 가르는데도 일사분란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많은 최상급 법기가 각자 날아오자 깃발을 운용하던 수사들도 어찌할 바가 없었다.
그들 중 하나가 다가오는 세 줄기 붉은 빛을 보고 손에 들고 있던 깃발을 던져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검은 기운을 뿜던 깃발들은 연달아 공격해 오는 화염연환비차의 공격에 조각이나 버렸다.
붉은 빛들을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바로 그의 코앞까지 다가가 방어막에 부딪쳐 왔다. 안타깝게도 겨우 연기기 수사가 형성한 저계 방어막이 최상급 법기를 막아낼 리 만무했다. 방어막은 맑은 소리를 내며 연기 속으로 흩어졌다.
‘푸확’
절망에 가득 찬 그의 두 눈은 세 줄기의 붉은 빛이 자신을 감싸는 것을 확인하고는 거대한 화염으로 변해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 뒤편으로 날아간 두 개의 검은 빛과 여섯 개의 금빛이 각각 다른 수사의 방어막을 뚫고 머리와 몸을 분리해 버렸다.
이제 남아있던 흑의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진법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대부분이 한립을 등지고 최선을 다해 도망가기 시작했고 일부 머리 좋지 못한 수사들이 법기를 들고 한립의 공격을 막아보려 했다.
아쉽게도 한립은 그들에게 시간을 허비할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빠르게 그들을 제압해 나갔다.
11개의 금색, 흑색, 홍색 법기들이 벌떼처럼 쏟아져 내리니 연기기 수사들의 법기는 바위에 부딪친 계란처럼 박살났다. 그 법기의 주인들도 자연히 다른 이들처럼 두 동강이 나 쓰러졌다.
이제 달아나 버린 흑의인들을 제외하면 소왕야와 마른 복면인만이 남아있었다. 그들이 믿고 있던 흑풍진(黑風陣)은 모습도 드러내지 못하고 한립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한립의 시선이 소왕야에게 옮겨가자 그들이 흠칫 놀라며 태세를 정비했다. 동시에 소왕야와 마른 복면인의 몸에서 검은 빛이 발산되며 그 속에 몸을 숨겼다.
“흥, 허튼 수작을 부리는구나.”
한립이 그들을 비웃었다.
비록 어떤 공법을 운용하는지는 몰랐으나 아마 거한의 마공과 비슷한 종류인 듯했다. 다만 저들은 검은 빛을 내고 거한은 핏빛을 내니 수행상의 차이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왕야와 그 일행은 후회막심이었다. 한립의 실력이나 법기 등이 그들의 예상을 훨씬 초월했던 것이다.
그들도 축기기 수사를 본적이 없는 것은 아니나 한립은 흑살교 단주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둘은 말할 것도 없고 단주 세 명은 모여야 그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육안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는 신법을 쓰며 열 개가 넘는 법기를 한 번에 조종하는 축기기 수사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비록 혈시 대인이 무언가 비밀스런 법술을 준비하는 듯 보였으나 그도 한립의 적수가 될 거라 확신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실력이 웬만한 축기기 수사는 넘어섰지만 한립을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아예 없었다. 그들은 공법을 운용해 무언가 하려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도 서서히 뒷걸음치고 있었다.
놀란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몽산사우도 한립이 펼친 기량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축기기 수사가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실제로 얼마나 강한지 경험해 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런 한립이 열댓 명의 연기기 수사들을 상대하며 그 중 태반을 손쉽게 죽이는 것을 보곤 그 압도적인 공법과 법력에 그저 탄복할 뿐이었다.
한립이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소왕야와 마른 복면인을 잡아오려는데 저쪽에서 맹수의 포효가 들려오며 붉은 빛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소왕야와 복면인이 기뻐하며 그곳으로 시선을 돌린 것은 당연했다. 한립의 표정이 가라앉더니 서둘러 저물대를 뒤져 정교하고 작은 법기 하나를 손에 쥐었다.
그가 즉시 그것을 혈광이 뿜어져 나오는 곳으로 던져버렸다.
노란색 종이 한립의 손을 떠나더니 금세 여섯 장은 될 법한 거대한 동종으로 변했다. 그가 종유동굴에서 엄월종 선악에게 얻은 전리품 차천종(遮天鐘)이었다. 흉악하기 그지없던 거대 거미도 잡아 가둔 바 있으니 얼마나 위력적인 법기인가!
‘댕!’
거대한 울림이 지나고 괴이한 붉은빛을 뿜던 거한이 종속에 갇혀버렸다. 그리곤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읽어낼 수 없게 되었다.
한립이 손을 뻗자마자 일어난 일에 소왕야와 복면인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혈시 대인이 저렇게 쉽게 잡힐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지체할 것 없이 그 둘을 향해 고개를 돌린 한립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뻗었다.
두 손에서 무수히 많은 불길이 치솟아 앞다퉈 날아갔다. 마치 하늘에서 빽빽히 유성우가 떨어지는 것처럼 온 하늘이 불길로 가득 찼다.
그 불덩이는 그물처럼 촘촘하게 소왕야를 감쌌고 그가 만들어낸 검은 기운을 흐트러뜨렸다. 온몸이 난타당한 소왕야가 이 공격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옆에서 참혹한 비명이 전해졌다.
그는 다급히 옆을 보고는 경악했다.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마른 복면인이 검은 기운을 모두 잃은 채 한립에게 잡혀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쪽 팔이 잘려져 엄청난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쯤 되자 한립이 두려워진 소왕야는 그 무능한 혈시에게 욕을 퍼붓고 싶었다. 한립은 차가운 시선으로 소왕야를 힐끗 보고는 마른 사내의 복면을 벗겨냈다. 예상대로 왕총관이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우리 몸에 있던 살기(煞氣)를 그렇게 쉽게 부수다니!”
놀란 소왕야는 양손을 뻗으며 열댓 개의 검은 빛을 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립이 그를 비웃었다. 그리고 그의 한 손이 들리자 거무튀튀한 방패 모양의 물건이 나타났다.
그것에 달려든 소왕야의 검은 빛들은 약간의 충돌음을 내고는 경로를 이탈했다. 소왕야가 자세히 보니 그건 방패가 아니라 거대한 거북이의 등껍질로 제련한 법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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