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62
162화. 실종
다음 날 방을 나서 다른 이들과 대청에 모인 한립은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 있을 일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절대 전도오행진에 대해선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한립 입장에서 목숨을 보전할 마지막 수단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효과적이었다. 전도오행진을 사용할 필요 없이 대승을 이끈다면 그것이 최선이긴 하지만 말이다.
류정 등 황풍곡 동문들은 한립의 속내도 모르고 오늘 밤 있을 일전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축기기 수사와 싸워본 경험이 없어 더욱 기대감이 큰 것 같았는데 한립이 이번 계획이 좋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한 주요 원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실전을 경험해보지 못한 수사는 아무리 법력이 높아도 경험이 풍부한 상대에게 크게 당하거나 목숨을 잃은 경우가 많았다.
한립은 웃고 떠드는 이들의 얼굴을 보며 묘한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천신만고 끝에 겨우 축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오늘 밤 누군가는 황궁에 묻힐 것을 안타까워 한 것이다.
“한 사제, 나 좀 잠깐 봐요.”
종위랑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진교천이 돌연 한립에게 밖으로 나가자는 의사를 전해왔다. 그 말에 한립 뿐 아니라 그녀의 동문들조차 깜짝 놀란 것 같았다.
그들은 한립과 항상 남자 수사들을 돌같이 보던 사매를 번갈아 쳐다보는 중이었다. 한립의 얼빠진 표정을 본 종위랑이 진교천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그러자 얼굴이 붉어진 진 사매가 종위랑을 흘겨보고는 바로 방을 나서 버렸다. 당연히 한립이 따라 나올 거라는 기색이었다.
“멍하니 뭐 하는 게야 사제, 저런 미인이 기다리는데 주저하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류정이 가볍게 한립의 등을 치며 농을 건넸다.
코를 긁적이며 쓴 웃음을 감춘 한립은 다른 남수사들의 부러운 눈빛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더 머뭇거렸다간 오히려 의심을 살 분위기였다.
대청을 나서자 진교천이 아련한 눈빛으로 화원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한립의 걸음소리를 듣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화원을 좀 걷죠.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할 말을 마친 그녀는 한립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화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살짝 미간을 모은 한립은 소리 없이 웃음을 흘리고는 그 뒤를 따랐다.
아름다운 여인과 정원을 거니는 것은 확실히 상쾌했다.
몇 걸음 뒤에서 고운 자태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따라 나온 보람이 느껴졌다. 게다가 상대는 몇 년 전 말 못할 인연이 있는 여인이 아닌가!
“혈색시련에서 성과를 냈을 때만해도 운이 좋은 자라 여겼을 뿐이었으니 나와 큰 오라버니의 안목이 부족했어요. 당신이 양 가죽을 뒤집어 쓴 늑대 같은 자라는 것도 모르고 말이죠! 우리 오누이를 속였을 뿐 아니라 당시 그곳에 있던 수많은 고인들도 당신 손에 놀아났으니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한립이 회상에 잠긴 찰나 진교천이 등을 돌린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미 예상한 바라 그리 놀랍지 않은 지적이었다.
“양 가죽을 뒤집어 쓴 늑대라니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소제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의 얼굴은 너무 태평해서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 같았다.
“아직도 날 속이려는 건가요?”
한립의 대답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던지 진교천이 고개를 돌려 냉랭한 눈빛을 드러냈다. 그러나 한립은 여전히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교천이 더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그래요, 혈색시련 일은 그렇다 치죠. 그럼 다음 질문엔 사실대로 답해줘요.”
“진 사저가 물어보신다면 무엇이든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떤 질문이 나올 것인지 알 것 만 같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그였지만 얼굴에서는 그런 마음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칠, 팔년 전쯤 태악산맥 동쪽에서 무슨 일이 있지 않았나요?”
그녀는 얼굴이 붉어져 무언가 어색한 표정이었다.
“칠, 팔년 전이라면…….”
한립은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척했다.
‘지난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다니. 표정으로 보아 자신을 구해준 이에게 마음이 흔들리기라도 한 것인가? ’
그러나 한립으로선 그녀와 옛일을 들추어 반려가 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아마 그녀와 육가의 친밀했던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벽이 생긴 듯했다.
“글쎄요, 그때라면 마 사형을 도와 약재 밭을 돌보느라 바빴고 혈색시련이 있었다는 것 정도 밖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립은 생각을 마친 듯 고개를 들며 담담히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그 모습에 진교천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명 그때쯤 한 사제가 문파를 나갔다는 기록을 기억하는데요?”
“아, 그러고 보니 혈색시련을 준비하느라 법기와 부적 등을 사러 잠시 다녀온 일이 있었네요.”
그는 진교천의 물음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그를 노려보아 한립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더 물을 것도 없겠군요. 한 사제, 먼저 들어가 봐요. 난 혼자 생각을 정리하다 들어가야겠으니.”
그녀의 눈에 일순 실망의 기색이 스치더니 바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진교천의 음성엔 지친 느낌이 확연했다.
이에 한숨을 내쉰 한립은 상대가 자신의 말을 믿든 안 믿든 다시 이 일로 자신을 성가시게 하지 않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그가 말을 돌리며 일부러 모른 척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저 거만한 성격에 다시 물어오기 힘들 것이다.
“그럼 전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저.”
포권을 한 한립은 주저 없이 화원을 빠져 나왔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진교천의 시선이 그가 향한 쪽으로 향했다.
“당신이 아니면 누구란 말이죠? 당시 그만한 실력을 가진 이중 본문을 빠져 나온 이는 당신뿐이었어요, 한 사제!”
낮게 읊조려 마음의 답답함을 덜어낸 그녀는 활짝 핀 모단화(牡丹花) 한 송이를 꺾어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꽃향기를 맡으며 그녀도 무언가 깊은 생각 속에 잠겨 들었다. 난감한 순간에서 빠져 나온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청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 모두 궁금한 기색이었으나 분별없이 캐묻는 이는 없었다.
그저 몇 사람이 한립과 진교천을 두고 농을 던졌으나 한립은 그저 웃으며 어떤 심경의 변화도 드러내지 않았다. 곧 이어 진교천도 평이한 표정으로 돌아와 종위랑 곁에 앉았다.
돌아가는 상황에 다른 이들도 다시 그들을 가지고 농을 하지 않고 화제를 흑살교와의 일전으로 돌렸다.
시간이 흘러 해가 저물고 있었다.
황풍곡의 수사들은 벌써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 일전을 대비했다.
모두 자신들의 수가 상대의 축기기 수사보다 많아 유리할 것이라 믿었지만 아무도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에 소홀히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흑살교 소굴을 털어 얻게 될 이익에 부푼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흑살교의 축기 수사가 한둘이 아니니 그들이 보유한 재료나 법기 등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일을 돕기로 한 진 사매의 동문들도 이런 점을 보고 참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사악한 수사들을 없애는 일이라 해도 목숨을 걸 이유가 없었다. 이때 한립은 거처에서 꼭두각시들을 손에 들고 점검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몽산사우가 정렬해 있었다.
한립의 동문들이 모여 들자 몽산사우는 그들과 안면을 트고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화원 문하의 제자들이든 진 사매의 동문들이든 누가 몽산사우 같은 연기기 수사들을 거들떠보겠는가? 예의상 인사를 받아주고는 곁을 주지 않았다.
다른 칠대선파 제자들이 자신들을 결코 상대해 주지 않을 것을 깨달은 몽산사우들이 한립을 향해 더욱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 흑살교와의 일전은 승패를 떠나 너희가 참여할 필요는 없다. 모두 일단 월경성을 벗어나 피해있거라.”
꼭두각시들을 반짝반짝 닦아놓은 한립이 저물대에 그것들을 집어넣었다.
“선배님, 저희는 싸움을 앞두고 물러서는 겁쟁이들이 아닙니다.”
노인이 다른 이들을 대표해 의견을 전했다.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너희가 황궁에 쳐들어간다는 것은 그저 헛되이 생명을 낭비하는 일이야. 상계 법기이니 하나씩 챙기거라. 선배로서 이별을 기념해 주는 것이다.”
고개를 저은 한립은 엷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소매를 휘두르자 탁자 위에 빛을 발하는 법기들이 놓여 있었다.
역시 상계 법기만으로도 모두가 희색이 만연해 이후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몽산으로 그들을 찾아 주십사 청했다.
한립은 자신이 듣고자 하던 말을 들었으니 친히 그들을 월경성 밖까지 데려다 주어 몽산사우가 감격하게 했다. 다만 떠나기 직전 노인이 은밀히 한립의 곁으로 다가왔다.
“선배님, 다섯째가 흑살교 교도로 활동할 일은 없겠지요? 그 아인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저희 형제들에게도 이로울 것입니다.”
큰 결심을 한 표정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노인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는 떠나갔다. 한립은 사라져 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노인의 말을 곱씹었다.
순간 웃음을 지은 그가 다시 거처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해가 저물자 진가 저택에 있는 황풍곡 수사들이 모여 출병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셋째 사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방을 둘러보곤 남색의 장검을 정비하던 송몽에게 물었다.
“송 사형, 셋째 사형은 어디 가셨습니까?”
“류 사형은 마지막으로 여섯째를 찾아가 설득해 보려고 나갔다. 무 사제가 함께 간다면 승산이 더 높아질 테니까. 내 보기엔 시간낭비지만 말이야. 무현 녀석이 도우려 했다면 그때 그리 떠나지도 않았겠지!”
“여섯 째 사형을 찾으러 갔단 말입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류정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데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류 사제, 무현 사제는 역시 안 간다 하던가? 어차피 한 사람 정도 있으나 없으나 흑살교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니 걱정 말게.”
진 사매의 동문 중 가장 연배가 있는 사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 위로를 건넸다.
“그러면 다행이겠습니다만, 아예 무 사제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류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모두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해 졌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류 사형? 사형이 객잔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벌써 문파로 돌아갔단 말이에요?”
종위랑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아니, 객잔 주인에게 물으니 무현 사제가 아침 일찍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더구나. 그런데 갈아입은 옷조차 챙기지 못한 것을 볼 때 문파로 돌아간 건 아닌 듯해.”
그의 표정에서 걱정스런 기색이 가득 묻어났다. 모두가 의견이 분분했지만 무현이 어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립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설마 무현이 흑살교 교주 손에 잡혀간 것은 아니겠지? ’
류정도 한립과 비슷한 생각이 들었는지 어두워진 하늘을 창밖으로 내다보며 과감히 결단을 내렸다.
“무 사제의 일은 돌아와 논의하고 일단 출발하시죠! 반드시 단번에 흑살교를 멸해야 할 것입니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황성에 불청객이 찾아 들었다. 바로 한립을 포함한 아홉 명의 황풍곡 수사들이었다.
법기를 타고 어두운 황성의 성벽 위에 도착한 류정은 일명 금지라 불리는 곳에 발을 드리는 것이 꺼림칙했으나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단호히 손을 휘저었다.
“가자!”
과감한 명령에선 조금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류정은 당연히 먼저 앞장서 금지에 발을 들였다.
이에 다른 이들도 칠대선파의 불문율을 따지지 않기로 하고 그 뒤를 따랐다.
한립은 속도를 줄여 일행의 뒤쪽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별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숨겨둔 전도오행진을 찾고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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