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68
168화. 혈령찬
한립은 황제를 마주보지 않고 그자의 주위를 뒤덮은 검붉은 기운을 살폈다.
그 기운 안에는 금색 자, 보라색 괴도, 남색 장검이 넘실거리고 있었는데 방금 송몽 등이 날려 보낸 법기였다. 보아하니 검붉은 기운에 갇혀 영성을 잃은 것 같았다.
한립이 살펴보니 검붉은 기운이 법기를 오염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제만 몸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 푸른 장포의 중년인은 천뢰자의 공격에 죽은 것 같았다.
한립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지만 방심하지는 않았다. 그의 명에 따라 십여 개의 꼭두각시들이 각양각색의 빛기둥과 빛 화살을 물샐 틈 없이 쏘아 보냈다.
귀한 법기를 빼앗기고 망연자실하던 송몽 등도 감히 다시 법기를 보내진 못했지만 한립의 공격에 연신 수결을 맺어가며 법술 혹은 부적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들도 황제를 쓰러뜨려야 동문들이 잔혹하게 학살당한 이 악몽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땅에 서서 무표정하게 이를 지켜보던 황제는 손을 휘저어 거대한 핏빛 방패를 만들어내 황풍곡 수사들의 공격을 모두 막아버렸다.
그러나 그럴수록 황제가 내뿜는 기운이 희미해져 갔고 곧 사라질 듯 요동쳐 한립 등이 더 맹렬히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황제가 비웃더니 바로 품을 뒤져 녹색의 작은 병을 손에 쥐었다.
그가 눈알만한 단약을 꺼냈는데 전체가 불길한 붉은 색에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를 풍겼다. 황제는 거침없이 단약을 삼키고 병을 던져 버렸다.
붉은 단약이 황제의 뱃속으로 들어간 순간 모두가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다.
온 몸을 부르르 떨던 황제의 몸에서 엄청난 붉은 기운이 방출되며 작은 상처는 물론 천뢰자를 맞아 잃어버린 법력까지 회복된 것이다.
“이럴 수가!”
송몽은 수십 개의 얼음송곳을 쏘아 보내는 것도 잊고 중얼거렸다. 한립도 상대가 무슨 기상천외한 수법으로 이런 일을 해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 자가 복용한 건 수수단(修髓丹)으로 법력을 보충해주는 일종의 마공을 이용한 것이죠. 자신이 수행을 깎아 만드는 것이라 자신이 복용하면 위기에 순간 목숨을 살려줄 영약이 되고 남에겐 치명적인 독약이 된다고 해요.”
서늘한 음성이 진교천 뒤에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종 사저 괜찮은 거야?”
“난 괜찮아. 다만 류 사형을 죽인 저 자식을 반드시 죽이고 싶을 뿐이야.”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가 진교천에게 간신히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도 저자를 죽이고 싶지만 문제는 저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종위랑의 서늘한 말에 한립이 그녀를 돌아보며 던진 말이었다. 모두가 한립의 말을 듣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황제는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방패를 거두고 몸의 기운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검붉은 기운에 뒤덮인 법기들도 점차 녹아 들었다.
각종 법술과 꼭두각시들의 공격이 쏟아져 내렸으나 검붉은 기운에 모두 막혀버렸고 그의 법력은 원래 상태보다도 더 높아져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상대를 훑어보더니 돌연 손을 꺾어 어깨 너머로 가져갔다. 그러자 어디선가 붉은 구슬이 나타났다.
이 광경에 한립의 눈이 번뜩였다. 저것이 천뢰자에 죽은 중년인이 남긴 구슬이라면 이제 혈응오행단(血凝五行丹)이 모두 모인 셈이었다. 황제만 죽이면 결단기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는 보물을 얻을 수 있었다.
“아직 천뢰자가 더 있느냐? 나도 내 마공의 방어력을 시험해 보고 싶으니 있다면 한번 던져 보거라.”
조심스레 구술을 챙겨 넣은 황제가 한립을 향해 서늘히 물었다.
“난 당신이 흑살교주인지 아니면 방금 죽은 이가 교주인지가 더 궁금하군요. 세상에 자신을 희생해 남의 수행을 돕고자 하는 수사가 있다는 것도 이해가 안가는 바입니다.”
상대의 물음엔 전혀 답하지 않고 다른 물음을 던지니 말로도 전혀 지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그 말에 너무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살기를 드러냈다.
한립이 흠칫하면서도 입을 달싹거려 네 사람에게 전음을 보내 진교천 등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당황한 그들의 모습에 한립은 단호히 소리쳤다.
“믿고 안 믿고는 모두의 자유입니다.”
마지막 말은 지면에 있던 황제의 귀까지 들어갔기에 그는 엄지손가락 굵기의 붉은 빛을 한립에게 쏘아 보냈다.
붉은 빛의 빠른 속도에 놀란 한립이 미리 펼쳐둔 하얀 방패와 거북이 등딱지 법기로 그것을 막으며 푸른 검의 방패까지 만들어 냈다. 상대의 알 수 없는 공격에 조금도 틈을 내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휙! 휙!’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무의식중에 몸을 꺾은 그의 오른쪽 어깨가 뜨거웠다. 한립이 암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니 오른쪽 어깨에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뚫려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한립은 믿기 어렵다는 눈빛으로 눈앞의 방어구들을 바라보았다.
어깨와 마찬가지로 백린순(白磷盾)과 구각(龜殼)법기에도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몸에 두른 청원검순(靑元劍盾)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방금 공격에 뚫린 것이 아니라 녹아든 것 같았다.
한립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오랜 세월 습관이 된 라연보가 아니었다면 방금 일격에 심장이 뚫려 사망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푸른 장포의 중년인을 흡수한 황제의 능력이 대단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실제 겪어본 그의 법력은 그의 상상을 훨씬 초월했다.
그러나 한립은 황제 역시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상대가 이 공격을 피하고 살아남은 것에 크게 놀란 것이다.
별 준비도 없이 휙 쏘아 보내서 별 것 아닌 것 같았지만 혈령찬(血靈鑽)이라 불리는 이 공격은 수련을 하는 틈틈이 자신의 진원을 수십 배의 압축해 놓은 것이라, 체내에 숨겨두었다가 어떤 상대라도 일격에 죽이는 필살기이자 일회성 공격이었다.
진원을 응축하는 과정이 고통스럽기 그지없었고 수행을 깎아 먹는 일이라 그가 익힌 마공의 살초 중의 살초였다.
그가 혈령찬을 시전해 죽이지 못한 수사가 없었거늘 한립이 가벼운 부상을 입고 살아남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진교천 등이 한립의 부상을 보고는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들의 핵심 공격력이라 믿고 있던 그가 부상을 입자 불안감에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시죠!”
상처에서 눈을 뗀 한립은 지체 없이 소리쳤다. 이어 발밑에 나타난 신풍주에 폭풍처럼 영력을 주입해 궁궐 한쪽으로 사라졌다.
송몽, 종위랑, 진교천 그리고 진교천의 마지막 남은 사형이 동시에 그 뒤를 쫓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잠시 당황한 황제는 곧 바로 날아올랐다. 그가 막 전속력을 내려는데 열 개의 꼭두각시들이 그를 포위하고 막아섰다.
“꺼져라!”
황제가 소리치며 꼭두각시들을 따라 한 바퀴를 돌아 한립이 사라진 방향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곧 멍하니 서있던 꼭두각시들이 여러 갈래로 찢기며 팔다리를 떨구니 다시는 원상태로 고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황제가 꼭두각시를 상대하고 있는 사이 한립은 미리 숨겨두었던 진법을 감지하고는 다른 이들을 불러 모아 죽림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그들이 죽림 안으로 숨어드는 것을 보며 기뻐했다.
대나무 숲 전면에 내려선 황제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몸의 검붉은 기운을 떼어냈다.
‘파직!’
그 검붉은 기운이 번쩍이며 쏘아져 나가더니 점점 몸집을 키워 작은 대나무 숲 전체를 뒤덮어버렸다. 피처럼 붉은 덮개가 생겨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붉은 기운이 눈앞의 죽림을 뒤덮자 황제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의 방어막으로 저들을 단단히 가두고 다른 비술을 부려 모두를 깨끗이 죽일 생각이었다.
그가 화려한 손놀림으로 비술을 준비하려는데 돌연 죽림 안에서 푸른색과 하얀색이 뒤섞인 빛의 장막이 퍼져나가며 놀랍게도 검붉은 기운을 밀어내고 그것을 떠받치는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 순간 자신만만하던 황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쩐지 이런 곳으로 숨었다 했더니 진법을 설치해 두었구나!”
그는 자신의 근거지에 이런 짓을 해놓은 것에 열이 받은 듯했다.
“흥, 급조한 진법이 얼마나 대단할 수 있겠느냐! 진법과 그 안에 든 놈들을 통째로 깨부숴버리면 그만인 것을! 아무도 황성을 살아나가지 못하게 하겠다.”
황제가 마음을 굳히고 더욱 수결에 매진해 비술을 발동했다. 그러자 점점 밀려나던 검붉은 기운이 광채를 발산하며 진법의 기운을 버텼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손끝으로 긋자 방금 분출된 기운과 비슷한 기운이 샘솟아 검붉은 막과 융화되었다. 그리고 붉은 기운이 더욱 선명해지며 이젠 피비린내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유쾌한 표정으로 열손가락을 튕겨 각양각색의 법결을 날려 보냈다.
그것을 받아들인 피의 장막이 요동을 치더니 죽림을 감싸고 압력을 높여 좁아지려 하고 있었다. 빛의 장막은 간신히 버티고는 있었지만 언제든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이제야 황제도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한립 일행을 죽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월국 황제 자리를 버리고 잠시 몸을 숨겨야겠구나.”
황제는 조금 유감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가 허공에서 한가로이 앞으로 일을 계획할 때 죽림 안에 있는 한립 일행은 불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들은 한립의 전음만 믿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작은 대나무 숲에 갇히게 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죽림에 방어 진법이 마련되어 있기는 했으나 그마저 핏빛 기운에 밀려 당장이라도 깨져나갈 기세이니 어찌 답답하고 화나지 않겠는가! 송몽이 불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이리로 도망 온 거야?”
“예. 문제 있습니까?”
한립은 고개를 들어 위쪽의 상황을 살피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충 답했다. 그 말에 송몽은 물론이고 종위랑이나 반려를 잃은 사내까지 모두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진교천 만은 멀쩡한 표정의 한립을 보고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다른 대책이 있으면 빨리 말해요. 다들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당신 같은 사람이 이런 보호 진법만 믿고 여기로 왔을 리 없으니까!”
진교천의 싸늘한 말에 멍해진 나머지 셋이 자기도 모르게 한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한립이라면 무슨 수가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 말에 한립은 고개를 내려 모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안심하십쇼. 다 생각해둔 바가 있어 모두를 불러 모은 것이니까요.”
차분히 저물대에 손을 가져가자 푸르스름한 보라색 깃발이 한립의 손에 들려 있었는데 조밀한 주술과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진 것이 범상치가 않았다.
“진법 법기?”
종위랑이 놀라 외쳤다.
진법 원반이나 진법 깃발 등의 진법용 법기는 월국에서는 찾아보기 아주 힘든 물건이었다.
“역시 사저의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한립은 그녀를 칭찬했다. 그들이 뚫어져라 보는 동안 한립의 손이 깃발을 스치자 깃발이 갑자기 수배로 커지며 푸른색과 자색이 섞인 기묘한 광채를 발산했다.
한립이 깃발을 평행으로 잡고 주술을 외우더니 마지막으로 퍼져나갈 것을 명했고 어느 방향을 향해 쏘아져 나간 깃발은 곧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이어 저물대에서 동일한 깃발이 세 번 더 나왔고 각 방향을 향해 사라져 갔다. 작업을 마친 한립이 살구 빛의 진법 원반을 쥔 채 차분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광채도 없던 원반이 한립이 신중한 표정으로 들어 올리자 갑자기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굵은 빛기둥이 수직으로 분출되어 그들을 보호해 주는 보호막으로 쏘아져 나갔다.
동시에 사방에서 금색, 청색, 홍색, 남색 등의 네 가지의 빛기둥이 날아와 한 지점에서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점차 빛을 잃어가던 보호막이 다섯 종류의 빛의 유입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파도가 치는 듯한 기류의 흐름이 점차 크고 빨라졌고 흐름이 복잡해질수록 귓가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소리가 사람의 혼을 빼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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