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손 방주
행동거지가 기품 있는 청년이 다른 이들에 둘러싸여 2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서른 살 정도의 영준한 얼굴에 미소까지 띠고 있으니 누가 보아도 호감이 갈만한 사내였다.
그 청년이 바로 한립의 관심을 끈 걸음걸이의 주인공이었다.
청년은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2층을 훑었다. 그러나 평범한 용모의 한립을 별로 주시하지 않은 채 바로 3층으로 향했다. 그가 저들이 말하던 귀한 손님인 듯 했다.
그들이 올라가자마자 먹음직스럽고 풍성한 요리들을 점소이들이 날랐다. 이후 공자들은 하인들을 쫓아냈는데 자신들의 이야기를 못 듣게 하려는 듯 했다.
그 모습에 궁금해진 한립이 의식을 퍼뜨렸다.
“이 형이 아니었으면 엄청 애를 먹을 뻔 했습니다. 정말 우리 체면을 살려준 셈입니다! 자,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마른 청년이 감격스러워하며 말했다.
“별 말씀을요. 감히 오색문 영역에서 사람을 납치하려 하다니, 여러분을 구해드린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형이 없었으면 모두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든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찾아주십시오.”
다른 공자가 가슴을 탕탕 쳤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납치를 시도했던 이들의 정체가 심상치 않습니다. 가원성에서 지위가 있는 여러분들을 건들 정도라면 보통의 강호인은 아닐 듯 합니다.”
준수한 청년이 화제를 돌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분명 집 안에서 자고 있었는데 깨어나 보니 놀랍게도 딴 곳에 누워있지 뭡니까! 당시 놀랐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뜁니다. 다행히 저희 아버지와 형제들이 적시에 이부 어르신을 찾았기에 망정이지요.”
마른 사내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한립은 여기까지만 듣고서도 대충 돌아가는 흐름을 파악했다.
가원성에서 이름깨나 날린다는 공자들이 어느 날 강호의 어느 고수에게 납치를 당했고 그 부모가 지역의 실력자인 오색문을 찾아 도움을 청하자 그 집안 공자가 나서서 그들을 구출해 낸 것이다. 이번 자리는 그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한 만찬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위층의 소리에 집중하니 오색문에 관한 쓸 만한 정보도 가끔 언급되었다. 얼마 후 마른 청년이 안부를 묻는 말에는 한립의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 형 곧 이 문주님의 환갑이시니 연회가 열리겠습니다. 어르신께서 항상 활력이 넘치시고 전혀 노인 같지가 않으시니 복을 받으신 겝니다. 저도 연회에 꼭 참석해 축하주를 올릴 것입니다.”
“하하! 아버지께서야 내력이 심후하시니 일반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시지요. 모두가 와주신다면 제가 나와 극진히 맞이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직접 연회를 주관하신다 하십니다.”
소문주가 미소를 머금고 분위기를 띄웠다. 여기까지 들은 한립은 의식을 거두어들였다. 오색문 문주가 이부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직접 움직일 일만 남았다.
그는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은 후 은전을 던져두었다.
“남는 것은 가지시오.”
점소이에게 말을 남기고는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의 등 뒤에서 은전을 발견한 점소이가 연신 감사를 표했다.
주루를 벗어난 한립은 이부 방향을 몇 번 살피고는 냉소를 띠며 그곳을 떠났다.
밤이 깊으면 다시 와 주변에 축기기 수사가 없는지 확인한 후 약속대로 오색문 문주를 처리할 작정이었다.
지금은 날이 아직 밝았으니 시간을 아껴 먼저 다른 일을 보려는 것이다. 오고 가는 사람들 속으로 한립이 종적을 감추었다.
* * *
오늘 날 사평방은 가원성에서 꽤나 이름을 날렸다. 대형 세력에는 끼지 못해도 중등 방파 중에서는 제일가는 세력으로 방주는 십여 년 전 갑자기 두각을 나타낸 손이구였다.
당연히 신분이 달라졌으니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를 이가 없었고 방원들은 그를 손 방주라 높여 불렀다.
사평방의 총타는 더 부유한 골목으로 이전한 지 오래였다.
방원들도 더 이상 작은 부두가에서 고생하며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더 알찬 구역을 차지했다. 심지어는 전당포나 주루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사평방에 들어오는 돈이 많아질수록 손 방주의 생활도 윤택해졌다.
한 달 전엔 아홉 째 첩을 맞았는데 가원성에서 유명한 기생이었다.
그녀는 확실히 사내를 구슬리는 재주가 있어 이미 불혹에 이른 손 방주를 유혹해 총애를 받고 있었다. 손 방주의 머릿속에 다른 처첩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런 연유로 아직 날도 저물지 않았는데도 손방주는 후원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요염한 자태만 생각해도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것이 아주 더 빨리 걷고 싶었다.
그러나 막 여인의 거처에 들어간 손방주는 잠시 넋을 잃었다. 한 젊은 사내가 앉아서는 지루했단 목소리로 그를 반겨주었던 것이다.
“손이구 네가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사평방을 이렇게 잘 꾸려나가다니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었어.”
이름을 부르며 손이구를 하대하는 청년은 물론 사평방 총타에 잠입한 한립이었다. 손이구는 한립을 보자마자 자신을 이 자리에 있게 해준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어쨌든 정안단(定顔丹)을 복용한 그는 용모가 전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깜짝 놀란 그의 가슴이 요동을 쳤다. 그는 곧바로 공손한 표정을 띠며 예를 올렸다.
“공자님께서 오셨군요. 소인 손이구 인사를 올립니다!”
방주의 직책을 맡으면서 이렇게 자세를 낮추어 예를 올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어제 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손이구의 태도가 조금 의외였으나 한립은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미 방주 자리에 올랐으니 앞으론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다. 내 이번에 온 것은 너와 사평방이 어떤지 살피기 위함이니 곧 바로 다시 떠날 것이다.”
이 말에 손이구는 크게 안심했다. 그는 몇 년 만에 나타난 한립이 자기 자리를 다시 빼앗아 갈까 은근히 두려웠던 것이다.
사평방의 방주로 지내며 수도자에 대해서도 조금 들은 바가 있었으니 그들이 결코 대항하지 못할 상대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정말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자신을 꼭두각시처럼 이리 가라 저리 가라하며 부려먹을 줄 알았건만 오랜 세월 풀어주었다가 완전히 잊었다 여길 무렵 다시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가원성을 찾은 진짜 목적을 알지 못하는 그로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음?”
한립이 손이구의 두 눈을 바라보다 돌연 놀라 손짓했다.
“이리 와 손목을 내밀어 보거라.”
손이구는 잠시 놀랐으나 주저하면서도 고분고분히 손목을 내밀었다. 한립이 상대의 손목을 쥐고 소량의 영력을 흘려보내 전신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를 놓아준 한립은 손이구가 대경실색할 만한 말을 했다.
“만성중독으로 길어야 한 달 살겠구나.”
“중독이요? 말도 안 됩니다. 평소에 얼마나 조심하며 먹고 마시는데요. 담당하는 이도 따로 두었습니다.”
놀란 손이구는 불안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에게 설명할 마음이 없는 한립은 손가락을 들어 푸른빛을 손이구 몸 안으로 쏘아 보냈다.
“공자님, 이건…….”
감히 피하지 못하고 받아들인 손이구가 서둘러 물어왔다.
“진령결(眞靈決)이란 것이다. 체내의 독소를 드러나게 해주니 직접 거울 앞에 서서 살펴 보거라.”
의자에 앉은 한립의 말투는 담백했다. 그 말에 심장이 미친 듯 뛰던 손이구는 작은 거울을 찾아 자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거울을 보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온 얼굴이 새까만 것이 누가 봐도 심하게 중독된 상태였다.
겁에 질린 손이구가 한립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살려 주십쇼! 소인 항상 공자님께 충성을 다해왔습니다!”
사실 수도자가 이렇게 공을 들여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마음에 안 들면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는 존재에게 왜 이리 공을 들인단 말인가?
“걱정 말거라, 중독이 은밀히 진행되긴 했으나 그리 강한 독은 아니니 며칠 내로 죽거나 하진 않을 게야. 그리 호들갑 떨지 말거라.”
“다방면에서 뛰어나신 분이니 소인의 독을 좀 해독해 주십쇼. 손이구가 평생 공자님을 견마지로로 모실 것입니다. 믿을 수 없으시다면 제가 맹세를…….”
신분은 높아졌으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더욱 커진 것 같았다. 한립이 조건을 제시하기도 전에 벌써 구구절절 애원을 시작했다.
‘견마지로는 무슨, 줄곧 내가 널 도와주기만 했는데.’
“해독용 단약이니 조금 있다 복용하거라. 다시 독에 노출되지만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천천히 고개를 저은 한립이 남색의 단약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단약을 받은 손이구는 크게 기뻐하며 재빨리 그것을 잘 챙겨 넣었다.
“한, 두 번 만에 그리 깊게 중독 될 수 없는 독이니 수개월은 걸렸을 게다. 독을 쓴 이를 찾는 것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겠지, 손 방주?”
돌연 웃음을 흘린 한립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저를 놀리시는 군요. 그러나 확실히 의심이 가는 이들이 이미 있습니다.”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인 손이구가 역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범인의 일에 수도자가 깊이 간여하긴 그러니 알아서 처리하고. 이번에 찾은 것은 곡혼을 데려가기 위해서다. 나도 어느 정도 수행을 쌓았으니 누가 무어라 할 이도 없을 테니 말이야. 무슨 이견이 있더냐?”
“곡혼을 데려가신다고요? 그러나 공자님 곡혼 대인은 벌써 사평방을 떠난 지 오래 입니다.”
손이구는 올 것이 왔구나 싶으면서도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이냐? 잃어버리기라도 했다는 것이야?”
한립의 얼굴이 가라앉자 방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손이구의 가슴은 더욱 서늘해졌다.
“제발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소인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곡혼 대인이 스스로 달아난 것입니다! 게다가 성 밖으로 나가 인근의 산 속을 배회하셔서 제가 사람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는 한립이 화가 폭발하기라도 할까 얼른 설명했다.
“스스로 달아나다니 무슨 말이지?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정말 네 말대로라면 너를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의아한 얼굴의 한립이었다. 어쨌든 곡혼의 위치를 손이구가 파악하고 있다면 문제없었다. 그러나 걸어 다니는 육체에 불과한 곡혼이 스스로 달아났다는 것은 쉽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립이 분노를 토해내지 않자 겨우 한시름을 놓은 그가 재빨리 아는 것을 털어놓았다.
“공자님께서 곡혼 대인을 내어주신 뒤로 항상 분부하신 것을 지켜왔습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남의 눈에 띄게도 만들지 않았지요. 그런데 곡혼 대인이 6년 전 이상해 졌습니다.
당시 방파가 세력을 확장 중이라 상당한 실력의 다른 방파와 붙게 되었는데 곡혼 대인의 도움으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곡혼 대인을 모시던 하인이 달려와 놀랍게도 대인이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한 제가 인혼종(引魂鐘)을 들고 달려갔으나…….”
“어찌 인혼종을 가진 너를 습격이라도 했다는 것이냐.”
곡혼이 말을 했다는 부분에서 이미 놀라버린 한립은 어서 이야기를 맺도록 재촉했다. 이에 함께 놀란 손이구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습격을 한 것은 아니고 소인이 곡혼 대인의 거처에 다가가자 마치 알기라도 한 것처럼 담을 넘어 달아나 버렸습니다. 당연히 날듯이 뛰어가는 곡혼 대인을 따라 잡을 수 없었지요.”
말을 하면서도 정말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뛰어갔다?”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지 여러 해인데 또 완전히 떠나지 않고 부근을 배회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제가 여러 번 방파의 고수를 대동해 잡아오려 했으나 일단 근처에 다가가기만 하면 달아나 저와는 아예 마주치려 하질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상대가 안 되니 방파 고수 두 명이 다치기까지 했었지요.”
손이구도 답답하다는 듯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거야 당연히 네 인혼종 때문이지. 곡혼이 어쩌다 통제를 잃었는지 모르겠으나 당초 내가 걸어놓은 금제가 남아있을 테니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아, 그랬군요!”
손 방주의 오랜 의문이 풀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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