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73
173화. 의외의 만남
“이후의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 곡혼이 있는 곳을 알려 주거라. 사정이 그렇다면 널 탓할 수 없겠지. 다만 인혼종은 다시 내게 돌려 주거라.”
한립이 차분히 분부했다.
“이틀 전 수하에게 보고 받기로 곡혼 대인은 지금…….”
그가 가원성 백리 밖의 어느 지점을 공손히 설명하고는 품에서 인혼종 법기를 꺼내 두 손으로 진상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법기를 받아 살피니 이전과 마찬가지로 멀쩡한 상태였다.
“곡혼 외에도 오색문에 관해 물을 것이 있으니 솔직히 답하거라.”
그 표정에 긴장한 손 방주가 연달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재 오색문 문주는 어떤 이더냐. 가족사항은 어떻게 되고 또한 최근 이부에 새로 들어온 외부인은 어떻게 되지?”
한립의 물음을 주의 깊게 들은 손이구가 바로 답했다.
“오색문 문주가 어떤 자인지는 소인도 멀리서만 보아 알지를 못합니다. 다만 그자가 무공이 심후하고 2남1녀를 두었으며 모두 혼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오색문 옛 총타 부지에 머무르고 있고 둘째 아들이 문주와 함께 이부에 거주하는데 듣기로…….”
손이구가 줄줄 정보를 늘어놓는 것이 평소에도 오색문을 살펴보았던 것이 분명했다. 한립은 보고를 들으며 무의식중에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귀로 들리는 정보를 소화하는 느낌이었다.
한립이 말이 없자 손이구가 조심스레 먼저 물어왔다.
“혹시 문부의 일 때문에 오색문을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쓸데없는 것을 알고자 하면 명을 재촉하는 법이다. 기억을 통째로 잃은 채 살고 싶다면 마음대로 추측해 보거라.”
서늘한 경고에 손이구의 안색이 급변해 연신 사죄했다. 위세를 부려야 할 때는 원래 사정을 봐주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얼굴에 식은땀이 맺힌 손이구의 모습에 한립의 얼굴이 풀어지더니 말했다.
“됐고 앞으로 손 방주 노릇이나 잘하고 지내거라. 앞으로 별다른 일이 없다면 다시 널 찾을 일은 없을 게다. 다만 오늘 떠나면 또 언제 찾아올 수 있을지 모르니 이것을 잘 보관해라.
만일 자식을 남긴다면 물려주어 나중에 날 알아볼 수 있게 하고. 그러면 내 그 아이도 일생 부귀를 누리며 살게 해주마.”
한립은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하얀 부적 종이를 꺼내 반절로 찢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손이구에게 주고 다른 한 쪽을 자신이 거두었다.
갑작스런 이야기에 놀라던 손이구가 희색이 만연해 바로 한립 앞에 엎드렸다. 아주 감동한 모습이었다.
“공자님의 큰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손 씨 가문은 대대로 공자님을 잘 모실 것이고 약속을 어긴다면 멸문지화를 당할 것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공손히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맹세를 다하자 한립은 조금 멍해졌다. 그러나 잠시 생각을 정리한 한립은 깨달았다.
범인 세계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자신의 대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수도자인 한립이 손 씨 가문이 대대로 번영할 수 있도록 약속했으니 손이구로서는 진심으로 한립을 모실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이해하자 한립도 기분이 괜찮았다. 손이구가 이후 전력을 다해 자신의 일을 처리한다 생각하니 좋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 진심을 다해 내게 충성을 다하겠다니 나도 널 홀대할 수야 없지. 단약 두 병이니 받아가거라. 하나는 각종 외상을 치료하는 것으로 숨만 붙어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목숨을 살려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에게 주었던 해독 단약으로 천하의 백 가지 독으로부터 널 지켜줄 것이다.”
한립이 손바닥을 뒤집자 정교한 자기 병 두 개가 나타났고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이구에게 던져 주었다. 손이구야 황송하게 그것들을 받고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바로 확인했다.
이후 그에게 몇 마디 당부를 남긴 한립은 손 방주의 배웅을 받으며 사평방 총타를 벗어났다.
언제 그를 써먹을 일이 있을지 모르니 인연을 이어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길을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이 어두워진 것이 이부에 갈 적기였다.
한립은 법기를 타고 날아올라 즉시 이부의 상공 위에 떠올랐다. 칠흑 같은 어둠을 틈타 손쉽게 이부로 떨어져 내린 한립은 바로 은닉술을 펼쳐 소리 없이 사라졌다.
형 왕부에서 써먹었던 대로 정신부(定神符)를 활용해 오색문 고수 중 하나를 제압했고 공신술(控神術)을 써 오색문 문주의 행방을 알아냈다.
다행히 오색문 문주는 조금 외진 곳에 있는 둘째 아들의 거처에서 담소를 나눈 중이라 했다.
상대에게 그곳의 위치를 자세히 캐물은 한립은 불덩이를 만들어 심문 대상을 재로 만들어버렸다. 그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화근을 남겨두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이후 여러 초소를 소리 없이 지나 규모가 제법 큰 거처에 도착했다.
한립이 조금 놀란 것은 그 거처의 굳게 닫힌 문 앞에 뜻밖에도 태양혈이 불룩 튀어나온 백의인 넷이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무공이 대단한 고수임에 분명했다.
한립은 오색문주의 신변 호위인 이들이 밖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안에 반드시 그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서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본 한립의 몸이 번쩍이더니 네 사람 앞에 나타났다. 백의인들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가볍게 그들을 쓰러뜨렸다.
바닥에 엎어진 이들은 모두 심장에 얼음송곳이 꽂혀 숨이 멎었고 시체에도 한기가 서렸다. 이어 모두를 재로 만들어 버린 한립이 당당하게 정문을 열고 거처로 진입했다.
이곳에 오는 동안 의식을 퍼뜨려 살폈으나 수도자의 기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아하니 오색문 문주의 명도 오늘로 끝일 듯 했다.
한립은 일단 방에 들어서면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을 죽일 계획이었다.
목격자를 남겨두었다 영수산 제자들의 추적을 받게 되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살기가 가득한 채로 방 안 들어선 그가 잠시 얼굴을 굳혔다.
방 안에 어린 부인이 두,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를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부드럽고 사랑스런 목소리에서 딸아이를 얼마나 아끼는지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런 장면은 의외였는지 살기로 가득 차있던 얼굴에서 부지불식간에 흉악한 기운이 사라졌고 진퇴양난에 빠진 난감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저 여인이 소문주의 부인이겠구나. 손이구는 어찌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빼먹은 것인가!’
한립이 전혀 기척을 감추지 않고 들어왔기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부인도 누군가 들어온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아이를 어르는 것을 멈추고 불쾌한 듯 말했다.
“영저가 깰 수 있으니 함부로 방에 들지 말라지 않았더냐.”
어린 부인은 말을 마치고 냉랭히 고개를 들었다. 분명 한립을 밖에 서있는 호위로 착각한 것이다. 부인이 고개를 들어 방에 들어온 이의 얼굴을 확인할 때 양쪽 모두가 크게 놀라고 말았다.
“당신은?”
“네가 어찌 이곳에?”
부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 마치 다른 사내와 정을 통하다 걸린 모습같았다. 한립 역시 얼굴색이 나빴다.
잠시 후 크게 숨을 내쉰 그가 차갑게 일갈했다.
“내가 문 사저라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이부 부인마님이라 불러드릴까요? 문옥주 사저!”
그녀는 놀랍게도 문 씨 집안 세 자매 중 첫째인 절세가인 문옥주였다. 이미 혼인을 한 몸이었으나 아름다움은 전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사내라면 누구나 혹할 만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문옥주는 한립의 질책을 듣더니 얼굴이 창백해져 몸을 떨었다. 품에 안은 딸아이를 데리고 거의 땅에 주저앉을 뻔했다.
“옥주! 누구랑 이야기를 하는 것이오?”
다른 방에 있던 이가 그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다가오며 물었는데 역시 낯익은 목소리였다. 방문이 열리고 백발의 노인과 청년이 들어왔다.
청년은 낮에 청가주루에서 얼굴을 본 자였고 노인은 머리카락과 수염이 새하얀 것이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자가 오색문 문주더냐.”
차가운 눈빛으로 노인을 쳐다본 한립이 문옥주를 향해 거침없이 물었다.
지금 문옥주가 그 말에 대답할 정신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아이를 꼭 안고는 한립을 노려보며 죽어도 대답하지 않을 기세였다.
“누군데 부인에게 이러는 것이오?”
청년이 갑자기 나타난 한립을 보고 놀랐으나 그가 문옥주에게 말하는 것을 보고 화가나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오색문 문주가 말리며 극히 차분한 태도로 먼저 입을 열었다.
“다 커서도 이리 충동적이어서야! 소리 없이 여기까지 숨어 든 것을 보면 보통 인물이 아니다.”
그가 치밀한 심계에 같은 축기기 수사였다면 한립을 긴장하게 할 수 있었겠지만 그저 범인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여기까지 오셨다면 분명 무명 잡졸은 아니실 테지요. 옥주를 아시는 분이라면 남이라 할 수 없으니 안으로 들어와 앉으시지요.”
오색문 문주가 돌연 호방하게 웃더니 예의를 갖추었다. 옆에서 이를 보는 청년은 얼이 빠져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립만은 냉랭히 입 꼬리를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문 사부 밑에서 몇 해를 배웠느니 당신의 며느리가 제 사저가 됩니다. 당연히 남이라 할 수는 없지요. 허나 그리 따지기 전에 난 문부가 멸문을 당한 일부터 논하고 싶은데요?”
“문부의 잔당!”
청년의 목소리에 오색문 문주도 얼굴이 어두워지며 순식간에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의 내공이 상당한 듯 했다.
“문부의 잔당이라면 좋게 보내 줄 수 없지. 목숨을 내놓고 가거라.”
오색문 문주가 소리쳤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딛자 석회암으로 된 바닥이 깊이 패이며 상대의 심후한 내공을 보여주었다.
청년도 이를 보고는 역시 기세를 끌어올려 아비를 도우려 했다. 오색문 부자의 행동을 본 한립은 두말 할 것 없이 주먹만 한 불꽃을 만들어 허공에 띄웠다.
한 걸음 한 걸음 한립을 압박해 들어오던 부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수도자!”
그의 메마른 얼굴엔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다른 쪽에 있던 청년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흥!”
한립은 그들과 떠들고 싶은 마음이 없어 바로 둘을 죽이려 했다. 그런데 아이를 안고 꼼짝 않던 문옥주의 안색이 변해 한립 앞을 막아섰다.
“안 돼요! 아이의 아버지를 죽게 할 순 없어요! 만약 그를 죽일 거라면 우리 모녀를 먼저 죽이고 가세요.”
문옥주가 이리 나오자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손에 든 화염의 크기를 더욱 키웠다. 그 열기에 타 들어갈 것 같으면서도 그녀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선사님, 무언가 착오가 있으신 듯 합니다! 저희 오색문은…….”
청년은 문옥주가 목숨을 걸고 그 앞을 막아서자 크게 감동한 것 같았다.
그래도 화가 난 한립이 딸아이와 그녀를 죽일까 두려워 서둘러 자신의 배경을 내세워 상황을 해결하려 했다.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한립이 차갑게 일갈했다.
“닥치거라! 너희 부자가 나설 곳이 아니다. 너희 배후에 영수산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한 마디만 더 했다간 전부를 몰살시키겠다.”
청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지만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다급히 아비를 바라보았다. 한립이 문옥주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저들을 죽여선 안 될 이유를 하나만 대 보거라. 난 봉무가 친히 부탁해 문부의 복수를 위해 찾은 것이다.”
“봉무가 아직 살아있단 말인가요? 이럴 수가, 항상 그 아이를 생각했어요. 봉무가 그 해 강에 투신한 줄로만 알고…….”
그녀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봉무 뿐 아니라 채환 그리고 넷째 사모님도 잘 살아있다. 내 너에게 실망이 크니 저들을 죽이면 안 될 이유를 들어 날 설득해 보거라.”
한립이 손을 저으니 하늘에 떠 있던 거대한 화염이 종적을 감추었고 방안은 적막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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