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자백
한립은 그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푸른 기운을 거둬들였다.
‘딩’
뒤이어 그의 손가락이 종을 튀기자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기회를 보아 달아나려던 곡혼의 몸이 바닥을 구른 것은 당연했다.
“본명법기(本命法器)! 이 몸을 구속하는 법기로구나!”
곡혼의 몸에 들어있는 자가 두려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안다니 다행이구나. 괜히 고생하고 싶지 않다면 네 내력을 대거라. 수도자는 범인의 몸을 빼앗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그 몸에 들어갔는지 아주 궁금하구나.”
한립의 표정은 평온해서 벗과 담소를 나누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곡혼은 그의 말에 속으로 냉전을 벌이고 있었다. 다른 이의 몸을 차지한 수사는 수도계에서도 혐오의 대상으로 바로 살해해 버리거나 좋지 못한 얼굴로 대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더욱이 한립의 기묘한 평정이 오히려 그를 더 불안하게 했다.
“수사께선 화를 푸십시오. 저도 이전엔 축기기 수사였으나 원수와 전투 중 몸을 잃어 어쩔 수없이 이 몸에 깃든 것입니다.”
“그랬더냐?”
그는 한립의 물음엔 하나도 답하지 않으면서 변명만 늘어놓았다. 사실 상대도 축기기 수사였다는 말은 좀 의외였다.
그러나 한립의 속내를 알 수 없는 곡혼은 그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더 오싹해져 서둘러 말을 이었다.
“비록 지금 수행이 연기기 저계에 불과하나 법기와 영석이 좀 있습니다. 이 일을 추궁하지 않으신다면 모두 드리지요.”
곡혼은 조심스레 말을 맺었다. 그 유혹에 오히려 얼굴이 어두워진 한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칠대선파의 수사인가?”
“칠대선파…… 아, 예! 전 영수산 수사이온데 혹시 칠대선파의 수사이십니까?”
아주 평범하게 말한다고 노력은 하고 있으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한립의 의혹이 더 깊어졌지만 가볍게 웃으며 온화하게 물었다.
“영수산 수사였구만, 그럼 귀산의 함운지 소저를 아느냐?”
“함운지……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가 줄곧 폐관수련을 해서 배분이 낮은 제자들은 잘 알지를 못합니다.”
곡혼은 처음엔 조금 당황하더니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모른다? 그럼 알고 지내던 이들의 이름을 대 보거라. 내 영수산 수사들과는 왕래가 잦으니 아는 이름이 하나는 나오겠지.”
“그것이…….”
이제 완전히 평정을 잃은 곡혼은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 누가 보아도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립의 얼굴이 단번에 굳으며 음울한 한기를 뿜어냈다.
“날 실망시키는구나. 굳이 벌주를 마셔야겠다면 원하는 대로 해줘야겠지.”
한립의 몸이 흐릿해 지는 듯싶더니 순식간에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곡혼은 제자리에서 꼼짝 없이 서 있었는데 가슴에는 정신부가 붙어있었다. 대응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당한 것이었다. 곡혼이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좋게 이야기로 풀어보면…….”
정신부를 범인에게 붙이면 온몸이 굳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도자의 영력이 몸에 깃들어 있으나 말과 표정에는 변화를 받지 않았다.
한립은 그를 상대해 주지 않고 저물대에서 먹처럼 새까만 사발을 꺼냈다.
이 음산한 물건이 저물대를 빠져 나오자 주변 공기가 차가워진 기분이었다. 게다가 안에서 처량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며 검은 기운이 어리니 정말 귀기(鬼氣)가 철철 넘쳐흘렀다. 그가 얼마 전 갖게 된 취혼발(聚魂鉢)이었다.
법기를 들고 음산한 눈빛을 보낸 한립이 곡혼에게 다가갔다.
그가 사발의 이상한 기운을 보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표정이 급변했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뗄 수밖에 없었다.
“뭘 어쩌려는 겁니까? 설마 연혼술(煉魂術)이라도 쓰려는 것은 아니지요?”
취혼발을 이용한 악명 높은 법술들이야 수도자라면 누구나 두려워하고 피할 법했다. 심지어 수도자끼리 서로를 저주하고 욕할 때 취혼발이 등장하는 경우도 상당했다.
듣자 하니 이런 술사들은 수사의 원신을 빼내어 전문적으로 고문할 수 있었다.
영혼에 가하는 고통은 아무리 의지가 강한 수사라 해도 버티지 못했고 원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고통도 커져서 수도자라면 누구나 이 이야기에 안색이 변했다.
이런 혼백 법기의 생김새를 직접 본 사람은 많지 않으나 음산한 귀기를 퍼뜨리며 100명 이상 수사의 혼백을 담을 수 있다는 취혼발의 생김새와 한립이 꺼내든 법기가 너무나 똑같았다.
이 기이한 법기의 출현과 한립의 경고가 맞물려 연혼술을 쓰려한다는 오해를 하게 만든 것이다. 혼백만 남은 이를 괴롭힐 수 있는 방법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술법이 바로 연혼술이었다.
한립은 곡혼의 말을 듣고는 표정은 그대로였으나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취혼발을 꺼낸 것은 이 이상한 기운으로 상대를 괴롭혀 혼내주려는 것뿐이었는데 상대가 이미 이상한 오해를 시작했으니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번만 다시 묻겠다. 정체가 뭐지? 왜 영수산 수사라 거짓말 한 거지?”
한립은 연혼술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고 바로 알고 싶은 바를 물었다. 정확한 대답이 없자 긍정이라고 여겼는지 곡혼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더는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한립은 바로 자기도 모르는 이상한 주술을 외워가며 취혼발을 그 자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이 사발의 음산한 기운은 축기기 수사인 한립도 놀라 손을 떨었을 정도이니 연기기로 떨어진 곡혼이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사발이 곡혼에게 다가가자 이미 온몸에 한기가 들며 원신이 꽁꽁 언 상태에서 수천 개의 은침으로 찌르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낀 그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조급해 할 것 없다. 법술이 완전히 펼쳐지면 지금보다 100배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야.”
유유자적한 한립의 말이 그의 귓가에 꽂혔다.
“100배!”
이 고통도 괴로운데 지금보다 고통이 심해지면 원신이 터져나갈지도 몰랐다. 그는 한립이 부리려는 술법이 전설 속의 연혼술이라고 확신했다.
한립이 수결을 맺기 시작하자 그가 다급하게 애원했다.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다 말할 테니 일단 법기를 거둬주세요.”
취혼발의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어 입이 다 얼어 말이 잘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영력이 보호하고 또 곡혼의 몸 자체가 튼튼해서 버틴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몸이 굳었을 것이다.
“진작 그럴 것이지. 그러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니냐.”
한립은 곧바로 취혼발을 회수해 저물대에 넣어버렸다. 그 음산한 기운은 한립도 소스라치게 해서 오래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곡혼은 혼백 법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길게 숨을 내쉬었다.
“법술로 확인할 수 있으니 거짓말로 넘어갈 생각은 버리거라. 바보 같이 무언가 숨기려는 꿍꿍이를 품었다간 혼백을 조각내 윤회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단호하고 차가운 말투였다. 방금 고통에서 벗어난 곡혼은 몸을 떨며 안색이 어두워졌다.
“저는…….”
“산수라고 한다면 이후에 하는 말은 듣지도 앉겠다.”
곡혼이 막 입을 떼려는데 한립이 상대의 말을 끊었다. 그 말에 곡혼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음을 고쳐먹지 못하고 산수라고 말해볼까 했던 것이다.
잠시 주저하던 곡혼이 말을 시작했다.
“선사가 의심하시는 것처럼 전 월국 수사가 아닙니다.”
‘월국 수사가 아니다? ’
첫 마디부터 그를 놀라게 했다.
“전 사실 천도국(天都國) 어령종(御靈宗) 수사로 월국을 유람하고 있었습니다.”
“어령종?”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며 칼날 같은 시선을 보냈다.
“그렇습니다. 몇 년 전 이곳에 왔다가 법력이 강한 고인을 만나 법체를 잃고 이 지경이 됐지요.”
법체를 잃은 일을 언급하면서는 유감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되새겨 보던 한립이 눈썹을 치켜떴다.
“육체를 잃은 것이 5~6년 전이라고?”
한립이 이렇게 물어오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한 곡혼은 그저 사실대로 답했다.
“그러합니다.”
“그럼 수년간 육체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돌아갈 마음을 먹지 않았다는 게로구나.”
“당연히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수사께서 마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무슨 뜻이더냐? 비록 마도에 대해 들은 바가 없지는 않지만 자세히 설명해 보거라.”
“마도는 약육강식의 세계입니다. 강자가 권력과 이익을 독점하기에 실력이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곳이란 뜻이지요. 원래 전 어령종에서 지위가 낮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반려와 하인 겸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이제 수행이 이렇게 떨어져 돌아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십중팔구 동문 사형제들에게 죽을 것이 뻔합니다.”
자조적으로 말하는 곡혼을 보며 한립은 무어라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이의 몸에 깃들어 수행이 떨어졌지만 이곳에서 3, 40년만 수련하면 원래 법력을 되찾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당당하게 돌아갈 생각이 아니었다면 저라고 이 보잘것없는 곳에 숨어 살고 싶었겠습니까?”
“그럼 줄곧 가원성 부근에 머물며 다른 수사와는 접촉한 적이 없었단 말이냐?”
“한 번도 없습니다. 수사께서 제가 이 몸을 차지하고 처음 보는 월국 수사입니다.”
“처음부터 이리 말할 것이지 어째서 영수산 수사인 척 했지?”
“당신이 칠대선파 수사인 줄 알고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갈까 그런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이 모두 사실인가?”
우울한 곡혼의 답을 듣던 한립이 돌연 미소를 지었다. 말투는 평온했으나 곡혼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당연하지요! 혹시 무슨 이상하신 점이라도?”
그가 조심스레 물으며 불안해했다.
“이런 말이 있지. 다른 사람을 속이려면 진실 속에 거짓을 섞어야 한다고. 그래, 네가 한 말 중에 진실은 얼마나 되더냐?”
한립은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읊어주었다.
“하! 하! 의심도 많으십니다.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곡혼도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었으나 사실을 그대로 고했다가 돌아올 후환이 두려워 버티고 있었다.
“그럼 이번엔 내가 먼저 정보를 하나 주마. 이미 너희 마도육종이 월국을 침략했으니 너는 적의 세력이다. 무슨 비밀을 얻겠다 물어보는 것도 이제 지겨 우니 그냥 네 원신을 끌어내 죽여 시간낭비를 하지않을 참이다.”
평화롭기만 하던 한립의 얼굴이 순식간에 음산해졌다. 그러자 곡혼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벌써 월국을 침략했단 말입니까? 말도 안 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텐데…….”
그가 초조하게 말을 내뱉고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 졌다. 한립도 속으론 흠칫하고 놀랐다.
“그런 일까지 미리 알고 있었다니 내가 정말 너를 얕잡아 봤구나. 그러나 네 이전 신분이 얼마나 높았든 지금은 겨우 연기기 수사에 불과하니 날 야박하다 원망하지 말거라.”
한립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굴에 살기를 드러냈다. 그가 손바닥을 뒤집자 취혼발이 다시 등장해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러나 이번에 곡혼은 오히려 다 포기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니 한립도 조금 불안해졌다. 취혼발이나 연혼술은 상대를 협박하기 위한 것이지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죽어도 말하지 않으면 곡혼의 몸과 함께 깨부술 수밖에 없었다.
고민에 빠질 무렵 곡혼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먼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숨기는 비밀이 있고 칠대선파의 생사존망에 관련된 중요한 정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을 털어 놓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결국엔 연혼술에 당해 죽게 되겠지요.”
한립은 상대의 말을 들으며 코를 긁적이더니 바로 취혼발을 치워버렸다.
“어떤 보증을 원하더냐? 들어보고 괜찮다 여겨지면 내 고려해 보겠다.”
상대의 말에 그리 혹하지 않은 척 하며 선심 쓰는 듯 물었다.
“일반적인 맹세는 믿을 수 없습니다. 연혼술을 익히는 이들은 혼백 법기를 걸고 하는 맹세를 가장 두려워한다더군요. 맹세를 어기면 대부분 연혼술의 반작용으로 죽어 그 결과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고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정보를 얻은후에도 나를 죽이지 않겠다 혼백 법기에 맹세해 주십쇼.”
곡혼은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조건을 제시했다.
“그래, 그렇게 하지!”
지체 없이 상대의 조건을 수락한 한립은 속으로 냉소를 짓고 있었다. 이어 취혼발을 꺼내서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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