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순식간에 처리하다
원무국에 들어온 한립은 바로 법기를 조종해 금마성(金馬城)으로 날아갔다.
사나흘 후 겨우 금마성 서쪽의 낯익은 구릉들이 눈에 들어왔다.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돈 그는 제운소의 거처가 있던 곳을 찾아 서서히 낙하했다.
그러나 신풍주에서 훑어본 그는 가슴이 서늘했다. 일고여덟 채 되던 집들과 볼 품 없는 대나무 등이 붕괴되고 쓰러져 완전히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제운소가 설치해 놓은 방어진법이 누군가에 의해 뚫린 것이다. 어두워진 얼굴로 한립이 폐허가 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록 이미 오래 전에 엉망이 된 것 같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각 거처로 들어가 샅샅이 수색하던 그는 이미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 시체 한 구를 찾아냈다.
코를 막고 시체를 살피던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죽은 자는 제운소가 아니라 그 충성스럽던 다관의 주인이었다.
일단 다른 시체가 없자 한립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수색을 끝내자 그의 의식에 무언가 걸렸다. 그는 다시 신풍주를 꺼내 고개를 들어 남쪽 상공을 바라보았다.
남쪽 상공에선 수많은 구릉을 지나 남색 빛줄기 두 개가 이곳을 향해 쏘아져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한립과 멀지 않은 곳에 내려선 빛줄기는 노인과 청년이었다.
노인은 아주 평범한 외모로 눈이 가늘고 길었으며 수염을 기른 축기기 수사였고, 청년은 스무 살 정도의 잘생긴 연기기 수사로 한립을 노려보고 있었다.
거리낌 없는 얼굴로 두 명을 바라보는 한립이었으나 그들이 제운소의 거처를 엉망으로 만든 이들과 분명 연관이 있으리라 판단했다.
한립이 입을 열지 않자 청년이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
“누구십니까? 제운소 녀석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냉랭한 눈빛으로 청년을 본 한립은 그를 무시하곤 노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경지로 보아 노인이 일을 주관하는 자일 것이 분명했다.
청년은 한립의 냉대에 급격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상대가 축기기 수사라 하나 자신의 가문의 명성을 생각할 때 원무국 내에서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 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미 제운소에게 악감정이 있던 그는 참지 못하고 바로 법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노인이 재빨리 팔을 뻗어 앞을 막았다.
“저 자의 정체도 모르는데 기다리거라.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이자꾸나.”
노인의 음색은 침착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한립 뒤의 곡혼에게서 닿아있었다. 살아있는 기운은 전혀 없으면서도 법력의 파동이 느껴지는 것이 꺼림칙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립의 눈이 가늘어졌다.
노인은 자신과 같은 축기 중기의 한립과 이유 없이 척을 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한립이 입을 열었다.
“여길 이리 만든 게 당신인가요?”
“수사는 제운소와 어떤 관계입니까? 혹시 제씨 집안사람인지요?”
노인은 한립의 말에 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으로 말을 이었다. 미간을 슬며시 모은 한립이 전략을 바꾸었다.
“서로 그냥은 대답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서로 한가지씩을 묻고 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시간 낭비를 막기 위해서요.”
노인은 잠시 눈을 굴리더니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내가 제안한 것이니 알고 싶은 바를 먼저 물으시지요.”
“당신은 제가 사람입니까?”
“아니오.”
노인의 물음에 한립이 주저 없이 답했다. 그 경쾌한 답에 노인과 청년의 얼굴에 의혹이 서렸다.
“제운소는 죽었습니까?”
“살아 있소.”
이번 물음은 한립이 던졌고 노인이 잠시 고민하더니 나지막하게 답했다. 살아 있다는 말에 일단 한 시름 놓았다.
“당신은 제운소와 무슨 관계입니까?”
“거래를 하는 관계요.”
진지한 얼굴로 묻는 노인에게 한립이 냉정히 답했다.
“거래?”
“그럼 제운소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건 알려 줄 수 없소!”
한립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별 것 아닌 듯 툭 던져보았지만 거절 당했다.
“그럼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제운소를 공격한 것입니까?”
“우리 부가 사람을 죽였는데 당연하지 않소!”
옆에 있던 청년이 끼어들었다. 노인은 그런 모습이 탐탁지 않은 듯 했으나 바로 무어라 나무라지는 않았다.
‘부가? ’
한립은 신여음을 구해주고 죽인 연기기 수사들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살의가 생겼다.
“그랬군요. 그런데 제씨 가문에서 대단한 고수라도 파견하면 어쩌려고 겨우 두 사람이 남아있단 말입니까?”
“제가가 겨우 사생아 때문에 우리 부가와 척을 질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 둘이면 충분하고도 남음이지요.”
청년은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며 손쉽게 한립이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그러니 정말 둘 뿐이란 것이구나.”
한립의 표정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무슨 뜻이오!”
청년이 화가나 무언가 따지려는데 노인이 무언가 이상한 것을 감지하고 말리려 했다.
그러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한립의 손에서 검은 빛이 청년을 향해 날아갔고 저물대를 스치는 손을 따라 열댓 개의 하얀 빛이 날아올라 순식간에 꼭두각시 요수와 꼭두각시 병사들로 변했다.
꼭두각시들은 몸을 드러내자마자 일제히 빛기둥과 빛 화살을 내뿜었다.
노인이 놀랐는지 바로 청년 앞에 나타나 동전 모양의 법기를 꺼냈다. 곧이어 동전이 탁자만큼 거대해 져 두 사람 앞을 막아섰다.
동시에 다채로운 빛기둥과 빛 화살이 당도해 동전 법기를 때리니 그 강력한 힘에 노인이 뒤로 밀려나갔다.
이때 뒤에서 청년의 비명이 들려 노인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던 그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더니 의식을 잃었다.
노인의 목 없는 시체가 막 바닥으로 쓰러지는 순간 허공에 한립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의 손가락에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투명한 실 형태의 법기가 감아져 있었다.
방금 오룡탈과 꼭두각시들로 노인의 시선을 끈 그는 바로 라연보를 시전해 순식간에 이십 여장을 이동했고 그들의 등 뒤에서 가느다란 실을 이용해 목을 잘라 버린 것이다.
이런 방식은 그에겐 너무 쉽고 간단했다.
어차피 저계 방어막은 최상급 법기를 막아내지 못하고 고계 방어막은 법력 소모가 극심하니 축기기 수사들은 결투를 하며 대부분 방어 법기를 이용해 몸의 앞쪽만을 막는 경우가 많았다. 전신 보호가 불필요하다 판단한 것이다.
이런 점이 한립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접경지대에서 마도인 수사들을 사냥할 때도 대다수가 이런 식으로 부지불식간에 목이 떨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수법은 흑살 교주의 살인 수법과 비슷했다. 남들의 이목을 속여 순식간에 상대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수법은 상대가 땅에 서 있을 때나 통하는 방법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느 축기기 수사도 한립의 상대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는 머리 없는 시체의 몸에서 저물대를 찾아내 확인하고는 조금 실망했다.
비록 최상급 법기가 두세 개 보이긴 했으나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고 그나마 동전 형태의 법기가 방어 법기로 쓸 만했다.
그가 작게 변해 떨어진 법기를 부르니 바로 그의 손으로 동전이 날아들었다. 잠시 기분 좋게 전리품을 감상한 그가 불덩이를 방출해 시체들을 재로 만들었다.
그리고 곡혼을 데리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방향을 정해 날아올랐다.
이제 신여음의 거처로 향하는 그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아무 일이 없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세 시진이 지나 신여음의 거처가 있던 이름 모를 작은 산에 당도했다. 옛날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멀쩡한 풍경을 보니 크게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한립은 무턱대고 하강하지 않고 산허리쯤에서 전음부를 꺼내 날려 보냈다.
전음부가 한 줄기 불빛으로 변해 사라지더니 갑자기 짙은 안개가 치솟아 한 순간에 한립을 가두었다.
한립은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 지더니 빽빽한 거목들에 둘러싸이자 조금 긴장이 되었으나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신여음에게 전갈이 가면 결계를 개방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빽빽한 거목들이 사라지더니 사람이 지나갈 만한 통로가 만들어졌다.
한립은 거침없이 신풍주를 움직여 안으로 들어섰다. 통로는 무척 길어서 여서 일곱 장을 가서야 겨우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선배님 함께 오신 분은 누구신지요. 이곳에 함부로 낯선 사람을 들일 수는 없습니다.”
한립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해명했다.
“오해입니다, 신 소저. 내 뒤에 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제련된 강시에 불과하니 의식을 퍼뜨려 확인해 보십시오.”
그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상대가 곡혼을 확인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다시 신여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오해하였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조금 미안한 듯한 여인의 말투에 한립은 미소를 짓고는 신풍주를 재촉해 통로를 빠져나왔다.
그의 눈앞이 밝아지며 이전에 보았던 대나무 집들이 보였다. 대나무 집 앞엔 두 명의 여인이 서있었는데 신여음과 그녀의 하녀였다.
다만 둘 다 하얀 상복을 입고 신여음은 시집간 부인처럼 머리를 올리고 있었다.
“미망인 신 씨가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신여음이 한립을 향해 예를 올렸다. 지금 그녀의 얼굴은 병색이 완연한데다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그리 예를 갖추실 것 없습니다.”
한립은 일단 의문을 감추고 인사를 받았다. 이때 신여음 곁의 어린 하녀도 한립에게 예를 올리니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신여음은 바로 조금 큰 방을 골라 안내했다. 그러나 방에 들어가자마자 펼쳐진 모습에 한립은 얼이 빠졌다.
나무 탁상 위에 흑색의 위패가 높여져 있었고 거기에 부군 제운소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위패 앞에는 향이 타 들어가며 은은히 향내를 풍겼다.
이제야 제운소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제운소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한립은 새로운 향을 꺼내 불을 붙이고는 위패 앞의 향로에 꽂아 넣었다.
“어찌된 것입니까.”
“이야기 하자면 기니 다른 방으로 가서 말씀 나누시지요.”
그녀는 눈을 붉히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신여음의 당차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한립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방을 옮겨 자리에 앉자 하녀가 차를 내왔다.
한립은 바로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겨우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제 수사가 이리 가다니. 허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신 소저와 제 수사는 언제 부부의 연을 맺은 것 입니까? 미리 알았다면 축하 선물을 보냈을 텐데 말입니다.”
신여음이 입을 떼기도 전에 하녀가 먼저 의문을 풀어주었다.
“선배님, 아가씨는 제 공자님이 돌아가신 후에 그분의 처가 되어 평생을 수절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녀의 말에 놀란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신여음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신여음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매의 말이 맞습니다. 전 제 공자님의 처가 되기로 스스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것이…….”
“제 공자님은 몇 번이나 제의 목숨을 구해주셨고 만일 그분이 살아계셨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의 연을 맺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입니다.”
한립이 무어라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신여음은 바로 제운소가 당한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들어보니 한립이 떠나고 얼마 지나기 않아서는 제운소와 신여음도 몸을 사리며 거처를 떠나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고 신여음이 진법을 연구하는데 꼭 필요한 재료가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출타를 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제운소 역시 신여음이 걱정되어 그녀를 찾으러 거처를 나왔다.
그들은 한립이 신여음을 구하며 멸한 수사들이 원무국에서 가장 큰 일족 중 하나인 부가의 제자들임을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직계제자들이 한 번에 실종되자 그들은 사람을 파견해 조사를 하고 있었고 두 달을 헤매던 조사단이 갑자기 튀어나온 제운소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 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