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20
20화. 덫 속의 덫
탕!
한립의 단검과 은색의 장심이 맞부딪치자 불꽃이 튀었다. 단검은 문 대인의 손에 상처를 내지도 못한 채 높게 치솟았다.
문 대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바닥을 뒤집어 한립이 아직 거둬들이지 못한 단검의 날을 가볍게 튕겨 냈다.
그러자 한립은 호랑이에게 손을 물린 듯, 심한 통증을 느껴 단검을 놓치고야 말았다. ‘쉭’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날아올라 한 쪽 벽 깊숙이 박혀 버렸다.
그러자 다른 한 손이 은백색 갈고리처럼 한립의 견갑골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립의 행동을 마비시켜 포획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립은 어깨부터 흐릿해지더니 온몸이 연기처럼 변해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문 대인은 한립의 귀신같은 보법에 어이가 없었지만, 바로 기세를 몰아 두 손을 이용해 두꺼운 은색 장벽을 만들어 한립을 에워쌌다. 절대 한립을 놓아 줄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이 연기는 정말 괴이해서 그의 은색 장막을 빠져나갔다. 아래로 스며들 듯 사라진 안개는 방의 좌측 벽에 가서야 서서히 맑아지며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 * *
한립을 바라보는 문 대인에게 거만한 기색은 사라지고 없었다. 한립 역시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쉼 없이 가쁘게 숨을 들이 쉬었고 안색도 창백해져 있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나왔지만 두 뺨은 달아올랐다.
한립은 최대한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풀려고 노력했다. 체력을 회복해야만 다음 격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왼쪽 손은 완전히 마비되어 감각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오른손만 사용해 상대를 막아내야 했다.
바닥난 체력으로 라연보를 다시 사용하기는 어렵지만, 드디어 숨겨둔 한 수를 펼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벽에 꽂힌 단검으로 눈길이 갔지만 다시 가져올 수 없다. 결국에는 한숨을 쉬며 품속에서 다른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번 무기는 단검이라기보다는 비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았다.
보통의 비수들 보다 날이 두꺼웠지만 맑게 빛나는 칼날만은 예리하게 제련되어 있었다.
한립이 칼집을 던져 버리고 오른손으로 검을 들었다. 상대에게 곧 돌진할 기세였다.
문 대인은 한립을 보고 두 손을 등 뒤로 모았다. 그리고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립아, 네가 계속 내 손속을 피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다. 허나 다음에도 운이 좋을 거라 확신하느냐? 방금 보여준 보법은 대단하지만 분명 한계가 있겠지. 게다가 체력도 다 떨어졌을 테고, 얌전하게 항복을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 네게 중상을 입히지 않으려고 내 얼마나 조심하는지 보지 않았느냐. 이쯤에서 그만 항복하거라.”
문 대인의 표정이 휙휙 바뀌는 것을 보니 소름이 끼쳤다. 처음에는 자비로운 사부의 모습으로 또 어느 순간에는 냉혈한으로 변하더니, 이제는 간곡한 어투로 투항하라 달래고 있었다.
그러나 문 대인의 이런 태도가 오히려 한립의 자신감을 북돋아주었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이런 유치한 속임수로 자신을 달래보려 하겠는가.
한립이 순식간에 문 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문 대인의 이마에 적나라하게 힘줄이 돋았다. 자신의 권유를 이렇게 거절하다니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불길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리 분별을 못하는 놈이구나!”
그가 별안간 앞으로 성큼 앞으로 나갔다.
“지척천애(咫尺天涯)!”
문 대인의 몸이 하늘하늘하게 움직이더니 바로 한립 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축지법과 같은 놀라운 움직임이었다.
한립도 당황해 급히 뒤로 물러나며 간신히 문 대인의 걸음을 막아섰다. 문 대인은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립이 첫 번째 무기를 빼앗겼을 때와 똑같은 수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상대에게 일깨워 줄 필요는 없었다.
문 대인은 양 손을 이용해 각기 다른 쪽에서 한립을 공격해 들어갔다. 한립의 비수가 내뿜는 기운 따위는 무시했다.
마침내 은색 빛을 머금은 문 대인의 손이 한립의 비수를 강탈하려는 순간, 돌연 청량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의 주인은 어찌나 통쾌하게 웃는지 마치 자신이 쳐 놓은 덫에 걸린 짐승을 바라보는 듯했다.
문 대인이 섬뜩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세를 늦추었다.
“내 꾀에 넘어갔군요. 이 단검을 보십시오!”
문 대인의 시선이 단검으로 향하자 한립은 이상한 자세를 취했다. 상반신은 뒤로 젖혀져 있었고, 한 손에 든 단검은 허리춤에서 수평으로 돌고 있었다.
거기에 하반신은 궁보(弓步)를 취하고 있어 한립 자체가 팽팽하게 실을 당긴 활처럼 서있었다. 손에 든 단검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어떤 이상한 점도 찾을 수 없었다.
문 대인은 순간 놀랐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설마 이상한 자세와 거짓말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인가? 혼란한 틈을 타 무슨 꿍꿍이를 벌이려고? ’
돌연 한립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왔다. 온몸이 정말 날카로운 화살이라도 된 듯 그 기세가 날카롭고 빨랐다.
안색이 변한 문 대인은 급히 양 손을 모아 단검을 잡아채려 하였지만, 단검은 가볍게 빛나며 어른거리더니 십 수 개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문 대인은 단번에 진짜 단검을 알아보았다.
‘흥! 이런 겉치장만 요란한 수법이라니? 죽음을 자초하는 구나.’
두 눈을 크게 뜨고 진짜 단검을 확인하자 엄청난 속도로 합장한 손을 뻗어나갔다. 이 초식으로 저 검만 부숴버린다면 한립을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두 사람이 충돌하려는 찰나 한립은 손목을 비틀어 칼날의 각도를 살짝 바꾸었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문 대인의 눈에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눈이 부시다고 느낀 순간, 엄청난 광채가 쏟아져 들어왔다. 빛줄기들은 그의 눈을 꿰뚫고 있는 듯 강렬했다.
‘안 돼!’
문 대인이 속으로 뭐라 외치던지 이미 늦어 버렸다. 백광은 그의 안구에 들어가 그의 모든 반응을 닫아 버렸다.
순간 문 대인의 두 눈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안구 전체가 시큰시큰 거렸다. 억지로 눈을 뜨려 하자 끝임 없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크윽, 눈이 안 보여. 이 녀석 대체 어떤 술수를 쓴 거야. 윽!’
하얀 가루라도 덮어 쓴 듯 사물을 구별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물체의 윤곽마저 흐릿해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는 방심해 상대의 덫에 걸려든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뒤로 물러서며, 양손을 앞으로 뻗어 벽공장(劈空掌)을 펼쳤다. 이렇게 하면 최소한 상반신의 치명적인 급소를 막을 수 있고 어느 정도 시간도 끌 수 있을 터였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눈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 전까지 먼저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경거망동해서 저 교활한 꼬마의 수법에 걸려들 수는 없어. 조금만 기다리자.’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한립을 경시하던 마음도 종적을 감추었다.
비록 상대의 움직임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직 멀쩡한 두 귀가 남아있었다. 흐릿하게나마 예리한 파공성의 울림이 느껴졌다.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한기로 보아 정면에서 습격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번 공격에는 전혀 당황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기쁘기까지 했다.
만약 소리 소문 없이 숨어 있다가 기습이라도 했으면 골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렇게 대놓고 공격을 해오면 그가 어찌 모르겠는가. 소리만으로도 상대방의 기척을 읽어내는 것에는 이미 숙달 된지 오래였다. 단검이 날아드는 소리는 물론이고, 바늘을 쏘아 보낸다고 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문 대인은 한립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오히려 벽공장을 느리게 펼쳤다. 그러자 작은 틈이 생겼고 이 틈을 통해 그의 허점을 노렸다.
문 대인이 파놓은 작은 틈 속으로 검이 날아들자 검의 날을 단단히 붙잡았다. 한립은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단검을 가져가려고 했지만 검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리 힘을 써도 움직이지 않았다.
문 대인은 자신이 갖고 있는 최대한의 힘을 실어 단검을 끌어당겼다. 단검과 함께 한립까지 끌어올 요량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단검이 너무 가벼워졌다.
‘크윽, 이게 무슨 일이지.’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공기가 폭발적으로 갈라져 날카롭고 얇은 물체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목에 닿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통증이 느껴지는 듯 했다. 문 대인은 반사적으로 회피했다. 다년간 수행으로 쌓여진 반응이었다. 단지 목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꼈을 뿐인데, 그 날카로운 물체는 이미 그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가 상처를 남겼다. 목에서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대보니 축축하면서 끈적거리는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 대인은 급히 출혈이 있는 부근에 점혈을 했다. 그러자 점차 피가 멈췄고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한립을 바라보았다. 시력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립은 상대가 자신의 습격을 또 피해내자 불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또 다른 작은 검을 들고 있었는데 너무 작아서 마치 송곳처럼 보였다.
칼날에 아직도 혈흔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바로 이것이 문 대인을 위협했던 그 무기인 것이 분명했다.
문 대인의 안색은 어둡고 차가워졌지만 눈에서는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네 놈이 기필코 내 명줄을 끊어놓겠다? ’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한립에게서 뺏은 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알고 보니 이 검은, 속이 텅 비어있었다. 비어있는 공간에 다른 검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 * *
한립은 이 방에 들어설 때부터 문을 열어두기를 고집했었다. 바로 그 때부터 이미 태양광의 반사를 이용하려는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저렇게 어린 것이 어떻게……. 강호에서도 잔뼈가 굵은 나를 이렇게 허무하게 함정에 빠트리다니. 정말 주도면밀하군.’
‘설마 한립이 신동인걸까? ’
그는 지금 벌어진 일들의 전후관계를 자세히 따져보았다. 전신에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듯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섬뜩했다.
그는 한립을 신중하게 살피며, 예전처럼 먼저 손쓸 생각은 접었다. 한립 역시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저 문 대인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다시 공격해 들어올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지나고 한립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 제가 투항을 하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갑작스런 제안에 문 대인의 두 눈이 커졌다. 한립은 말을 마친 후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발밑으로 던져버렸다.
“투항?”
문 대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한립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헷갈렸다.
“또 무슨 꿍꿍이인 게냐? 투항을 하려 했으면 처음부터 할 것이지! 지금에서야 이러는 것이냐?”
표독스런 반문에도 한립은 슬쩍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마치 상대의 추궁을 묵인하는 것과 같았다.
잠시 후 문 대인은 갑자기 몸을 굽혀 웃어대기 시작했다. 포복절도하는 모양새가 사뭇 즐거워 보였고 두 눈에는 눈물까지 맺히려 하고 있었다.
“하하! 하! 하하! 정말 웃기는 일이야. 내 이리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다니. 정말 너와 대결이라도 하는 중이라고 여겼다.”
문 대인은 계속 웃느라 의미가 부정확한 말들을 내뱉었다. 한립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창밖을 살피더니 역시 웃음을 지었다.
“어르신, 시간을 너무 지체하고 있다는 생각 안 하십니까? 이제 결론을 맺을 때가 되었습니다.”
웃음소리가 멈추었다. 허리를 펴고 바르게 선, 문 대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 결론을 낼 때가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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