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223
223화. 홍황고보
한립이 모자란 실력으로 이론상에서 석 선자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자신의 결점을 명확히 아는 그는 진법을 파악하는 데에선 그녀와 논쟁을 벌이지 않다가 그 정보를 토대로 적절히 신여음의 수법을 써서 선 선자의 얼굴에 감동이 어리게 만들곤 했다.
이렇게 둘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 생겨났다. 여수사가 진법을 연구해 약점을 찾아내면 한립이 결계를 깨는 식이었다. 그 결과 진법 해체에도 큰 성과가 있었다.
금청 등 다른 이들이야 진법에 관해서는 전혀 끼어들지 못했으니 그저 석실에 앉아 운기행공을 하며 두 사람의 작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3개월이 흐른 어느 날 한립과 석접은 다른 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동안의 작업으로 거대한 진이 드디어 거의 깨졌고 마지막 한 층만 남은 것이다.
이 금제만 해결하면 드디어 기이한 돌기둥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보호막은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면적이 거의 절반으로 줄었고 노란 빛이 아닌 적홍색을 띠어서 조금만 다가가면 화염의 뜨거운 기운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기이한 것은 보호막을 넘실거리던 일곱 색의 빛이 사실은 날개 달린 곤충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상공을 유유히 넘나들며 쉼 없이 불꽃을 내뿜고 있었다.
금청이 조금 놀라 물었다.
“저건 무슨 요물일까요?”
다른 이들은 모두 어리둥절해하자 석접이 나서서 설명해주었다.
“불 계통의 요괴인 시악(翅惡)이에요. 정말 보기 드문 종으로 특수한 환경에서나 나타나고 수명이 극히 짧아 몇 시간 만에 소멸되고는 하지요.
태어날 때부터 분출할 수 있는 요괴의 불꽃은 우리 수사들이 단전에서 끌어내는 불만큼 위력이 강한데다 범인들의 혼백이나 수사들의 원신을 잡아먹길 좋아해서 상대하기 어려운 요괴죠.
마지막 남은 결계가 이곳을 뜨겁게 만들어 저 불의 요괴들의 수명을 늘려주고 있는 것 같아요. 아마 아무 것도 모르고 강제로 진법을 부수려는 자는 저 요괴들에게 큰 코를 다치게 되겠죠.”
금청 등은 원신을 잡아먹는다는 말에 안색이 변했다.
‘시악? ’
지금까지 거의 말이 없던 간 선사가 입을 뗐다.
“아마 두 선사가 이것을 해결할 방법이 있으니 우리를 부른 것일 테지요.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시면 따르겠소.”
다른 이들의 시선도 여인과 한립에게로 모여들었다. 한립은 미소를 지을 뿐 말이 없자 석접이 방긋 웃으며 답했다.
“저와 한 선배님도 처음엔 머리가 좀 아팠으나 며칠을 상의한 끝에 적당한 방책을 강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할 듯 하네요.”
그녀의 얼굴은 평범했으나 목소리는 맑고 아름다웠다.
호월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석 선자, 말씀하시죠. 한 선사와 결정한 것이라니 무엇이든 따라야지요.”
“이 난관을 지나려면 상극인 물의 속성 법기들이 필요해요. 저와 한 선배님이 미리 준비를 해두었으니 정해진 위치에서 법기들을 들고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한 선배님이 마지막 결계를 제거하면 그 안을 빠져 나온 시악을 한 번에 제거하는 거죠.”
한립이 차분한 말투로 보충했다.
“모두 절대 법보를 이용해 요괴에 대항해선 안 됩니다. 태생이 불의 속성인 시악의 요화는 평소엔 접하기 힘든 위력을 지니고 있으니 당연히 가까이 오게 두어서도 안 될 것이고요.”
한립의 신중한 표정을 보고는 호월 등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어렸다.
이후 한립이 자와, 저울 그리고 작살을 꺼내 각각 금청, 곡혼, 간 선사에게 나누어 주었고 석접이 남색 수건을 꺼내 호월에게 건넸다.
이제 호월의 지시에 따라 모두가 적절한 위치에 서자 그녀도 서둘러 물러나더니 단검 법기를 꺼내고 한립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가 차분히 사방을 살펴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열댓 개의 남색 진법 법기들을 저물대에서 꺼냈다. 모두 물의 속성을 띠는 깃발과 원반 등으로 그의 주위를 선회했다.
파파파팟.
한립의 열 손가락이 움직이자 진법 법기들이 곳곳으로 날아가 떨어져 내렸다. 깃발들은 땅 속 깊숙이 꽂히고 원반들은 그 위에 떠서 삼엄한 기운의 진법을 형성했다.
진법 법기들이 적절하게 배치된 것을 본 한립이 숨을 내쉬고는 바로 술법을 펼치려는데 돌연 누군가 쾌속으로 날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후, 남색 빛줄기가 하늘을 가르며 순식간의 그들 머리 위에 도착했고 빛이 사라지자 허공에 쌍검을 등에 맨 괴인이 등장했다.
한립을 포함한 나머지 수사들은 그 자의 모습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괴인은 마른 몸에 하얀 백발을 어깨까지 기르고 허리춤엔 기괴한 바구니를 달고 있었다. 거기다 얼굴 가득 붉은 반점이 나있었으며 모난 두 눈에 흉악한 기세가 가득했다.
법력의 파동으로 보아 결단기 중기의 수사인 듯 했다.
괴인은 이렇게 많은 결단기 수사들이 모여 있는 것에 조금 멈칫했지만 마지막 남은 붉은 결계와 한립이 치려는 진법을 보고는 안색이 돌변했다.
“모두 죽고 싶은 게냐! 감히 본 도주가 없는 틈에 몰래 도적질을 하려 해? 어서 다들 이 섬에서 꺼지거라!”
“도주?”
“도적질?”
호월과 금청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한립 등도 일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여긴 주인 없는 버려진 섬이 아닌가!’
일단 호월이 미간을 좁히며 담담하게 물었다.
“선사가 이 섬의 도주란 말입니까?”
“어르신이 이 섬에 머문 지 벌써 수백 년이니 당연히 이 섬의 주인이지.”
호월이 다시 물었다.
“저와 금형이 지난번에 왔을 때는 선사를 보지 못하였는데 말입니다.”
노인이 두 눈을 번뜩이며 노해서 소리쳤다.
“뭐라? 이전에도 왔었단 말이냐! 흥, 그때도 본 도주가 출타한 틈을 타 일을 벌이려 했구나.”
호월은 냉소했다.
“그렇다면 이 섬엔 선사 홀로 지내며 스스로 도주라 칭한다는 말이로군요.”
“허! 쓸데없는 말 지껄일 것 없다. 어차피 함부로 금제를 훼손했으니 죽을죄다. 꺼지기 싫다면 나도 보내주지 않겠다.”
괴인의 눈에서 기이한 노란 빛이 번뜩이더니 허리춤에 있는 바구니를 던졌다. 동시에 대나무 바구니가 음산한 하얀 기운으로 변하더니 호월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호월은 상대가 먼저 손을 쓰자 열을 받아 바로 소맷자락을 흔들며 두 줄기 붉은 빛을 쏘아 보냈다.
펑!
하얀 기운이 지리멸렬하게 흩어져버렸다. 호월은 그 모습에 안심해 소리쳤다.
“겨우 이 정도 실력으로 입만 살았구나!”
‘끼익’ ‘끼익’…….
그런데 괴인이 아무 대답도 없이 돌연 웃음을 짓자 호월도 가슴이 서늘해 졌다.
“이게 무슨? 내 비도가!”
두 개의 비도가 괴인의 하얀 기운 속에서 힘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어 다시 반짝거리기 시작한 하얀 기운이 급속도로 뭉쳐져 원래의 바구니 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도 역시 바구니 안에 담겨 하얀 기운에 휘감겨 있으니 다시 빼내 올 수가 없었다.
단숨에 법보를 빼앗긴 호월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고 한립 등 다른 선사들도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괴인은 그들이 생각할 틈을 주기 않았다. 그가 비웃으며 팔을 펼치자 회색 검 두 개가 호월을 가르려 날아간 것이다.
그 옆에 서 있던 금청이 곧바로 손가락을 튕겨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인장을 날려 보냈다. 곧 인장이 급격히 크기를 키웠고 날아오던 회색 검을 으스러뜨리려 했다.
‘채채챙’
세 개의 법보들이 눈부신 빛을 내며 엉켰다.
그때 간 선사가 한립과 곡혼을 힐끔 보더니 말없이 손을 뻗어 검은색과 흰색이 뒤섞인 작살을 괴인에게 날렸다.
한립은 몰래 탄식했다. 이제 모두 나섰으니 자신과 곡혼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눈앞의 괴인을 제압하고 다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듯 했다.
마음을 정한 그가 곡혼과 혼원발 그리고 녹황검을 꺼내 뛰어들었다.
이 모습에도 괴인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그의 입이 멀어지며 새까만 구슬이 모두의 법기를 향해 튀어나갔다.
콰콰쾅!
거대한 충돌음이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구슬은 간 선사 등의 법보와 닿은 후 자동으로 터져나가며 검은 빛을 내뿜었다. 그 폭발에 휘말린 법보들이 영성을 많이 상실하고 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간 선사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수결을 맺어 당장 작살 법보를 회수하려 했다.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잃은 위력을 되찾으려면 최소한 수년을 원신에 두고 요양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괴인의 웃음소리와 함께 대나무 바구니가 또 번쩍이더니 거대한 하얀 빛을 분출해 여러 법보들을 또 가두어 버린 것이다.
간 선사가 그 광경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표정이 달라졌다.
“고보(古寶)! 홍황고보(洪荒古寶)를 쓰는 놈이구나!”
그 말에 한립도 멈칫했다.
홍황고보란 사실 고대 수사들이 제련한 법보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고보들은 기능은 단순했으나 위력이 엄청나서 그들이 쓰는 법보와는 상대가 안 되었다.
게다가 고대의 법보 제련은 재료 자체가 현재와는 달라서 체내에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일반 법보와 홍황고보를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차이였다.
사실 이전에 여섯 전각 장로들이 영리수를 잡으며 사용한 간천과(干天戈)라는 한 쌍의 창도 홍황고보의 하나였다.
한립은 고보란 이야기에 조금 놀라긴 했으나 수많은 수사들 앞에서 자신의 숨겨둔 필살기들을 아직 꺼내 보일 생각이 없었다.
언제나 남겨둔 수가 많아야 위기에서 벗어날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상대가 아무리 고보를 지니고 있어도 이렇게 많은 결단기 수사들의 합공을 압도할 정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저 보통의 결단기 수사 수준으로 싸워도 승산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한립은 전력을 다해 녹황검이 하얀 기운과 싸우게 한 후 다른 이들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기다리다 보면 누군가 먼저 나설 것이다.
역시 대나무 바구니가 고보라는 말을 듣더니 호월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어쨌든 상대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으니 우리 쪽에서도 협공해 그를 죽이고 보물을 차지해도 그리 천인공노할 짓은 아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간 수사가 수결을 맺더니 저물대에서 세 줄기의 검은 빛이 치솟았다. 그것들은 놀랍게도 일 장은 될 법한 거대한 검은 깃발이었고 흉흉한 기세가 남달랐다.
이어 입이 벌어지며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깃발에 흡수되니 귀곡성이 흘러나와 주변 수사들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동시에 호월도 비도 법기를 포기하고는 양 손을 비벼 일련의 푸른 뇌화(雷火)를 뿜어냈다.
금청 역시 눈썹을 꿈틀하더니 법결을 맺었고 그의 법보인 거대한 인장이 용이 포효하는 소리를 내며 몇 배로 몸집을 키웠다. 자연히 대치하던 괴인의 회색 비검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세 선사들이 엄청난 신위를 선보인 것이다. 한립은 이제 괴인이 혼쭐날 것이라 여겨 몰래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괴인이 이런 엄청난 공격에도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졌을 뿐 여전히 그들을 비웃고 있었다.
그가 걸치고 있던 반팔 가죽옷을 벗으니 상반신이 드러났다. 그 모습에 한립은 거의 놀라 혀를 깨물 뻔 했다.
괴인의 마른 가슴에 좌우로 주먹만 한 해골들이 달라붙어 있었는데 길게 머리를 기른 검은 해골들이 꿈틀거리며 마치 살아있는 듯 했다.
그 순간 푸른 뇌화와 세 개의 검은 빗발이 괴인의 코앞에 당도해 있었고 괴인은 두 손가락을 휘저으며 기괴한 주술을 욀 뿐이었다.
‘키아아악!’
두 해골이 동시에 낮은 괴성을 지르며 앞다투어 괴인의 두 손가락을 하나씩 물어뜯고는 흥분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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