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26
26화. 곡혼
문 대인은 오랫동안 속세와 떨어져 있었던 한립을 생각해 자신의 숨겨진 거처에 한립을 위해 두 종류의 거짓 신분을 준비해 놓았다.
그의 신분을 증명할 물품과 자신이 친필로 남긴 증명서를 함께 두었으니, 한립에게 알맞은 것을 고르라고 되어 있었다.
동시에 자신의 심복, 경계해야 할 인물들, 원수들의 명단 그리고 주의 사항들까지 세세하게 적어 놓았다.
마지막으로 철노와 운시조(云翅鳥)를 통제하고 부를 수 있는 방법을 덧붙였다.
서신에서 철노가 이미 혼백이 없는 시체라는 사실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었다.
그저 걸어 다니는 육체에 불과하고, 본래의 혼백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러니 한립이 그를 부리는 것에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항상 금전적인 부분에 민감했던 한립에게 문 대인의 거래는 매우 흥미로웠다. 다만 문 대인의 딸을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이제 막 이성에 눈을 떴기 때문에, 보지도 못한 여인과 혼사를 치루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가 앞으로 만나게 될 적수들은 절대 만만한 인물들이 아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다.
* * *
그는 수차례나 석실을 돈 후에야 겨우 걸음을 멈추었다.
“일단 해독제를 먹고 나서 고민해보자.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아.”
한립의 결심히 끝나자 석실 밖에 있는 거한이 눈에 띄었다. 서신 속에는 인혼종(引魂鐘)이라 불리는 법기(法器)를 통해 거한을 조정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인홍종은 황동으로 만든 것으로, 매우 정교하며 한 손으로 들기에 딱 좋은 크기였다. 벽면에 흐릿하게 핏자국이 있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점은 없어 보였다.
한립은 석실을 나서서 신중하게 거한에게 다가가 걸음을 멈추었다. 만일에 대비해 더 이상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거한은 한립에게 등을 돌린 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댕!’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거한의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종소리에 반응하는 듯 했다. 한립은 기쁜 마음에 연달아 종을 울렸다.
‘댕! 댕! …….’
종소리가 연이어 들릴수록 거한의 몸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육중한 몸이 바닥에 부딪히자 먼지가 피어올랐다.
한립은 날듯이 몸을 던져 거한에게 다가가 삿갓을 벗겨버렸다. 그 아래에 들어난 추한 얼굴은 한립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떨리는 마음을 제쳐두고 급히 자신의 손목을 비수로 그었다. 그리고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거한의 얼굴에 뿌려댔다.
거한의 얼굴이 피범벅이 돼서야 손목의 상처를 지혈하고 동여맸다. 한립은 한쪽에서 거한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흠뻑 적셔 놓은 피가 거한의 얼굴로 스며들더니 한 방울의 피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피가 모두 흡수될 때쯤 거한도 두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생기나 감정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거한이 고개를 들어 한립과 눈이 마주치자 동요했다. 하지만 곧 안정을 되찾고 낮은 목소리로 거한에게 명을 내렸다.
“저 석실의 문을 부수거라.”
거한이 성큼성큼 석실 앞으로 다가섰다. 두 주먹을 높이 들어 올려, 마치 철퇴처럼 석실의 문을 찍으려고 했다. 네다섯 번 주먹을 휘두르자 돌문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는 바로 한립에게 돌아서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줄곧 일희일비하는 것을 꺼려 왔던 한립도 입이 귀에 걸렸다.
이처럼 강한 수하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면 걱정할 것도 없었다. 처음과는 달리 보면 볼수록 만족스러웠다. 원래는 추하기 그지없다 여긴 얼굴도 자세히 뜯어보니, 눈에 익었고 보면 볼수록 낯익었다.
‘낯이 익은…….’
한립은 이런 감정에 깜짝 놀랐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런 추한 얼굴이 어찌 이리 친숙한지 알 수 없었다. 한립은 거한의 눈, 코, 입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거한의 탱탱 부은 얼굴에서 본래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 모두를 조합하자 한립에게 아주 익숙한 사람이 떠올랐다.
“장형…… 정말 장형인 거예요?”
한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겨우 두 손을 뻗어 거한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이 거한의 얼굴이 몇 년 전 실종된 한립의 벗 ‘장석철’의 얼굴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문 대인과의 관계를 따져 볼 때 이 거한과 장석철은 연관되어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말 눈앞의 거한이 장석철의 육체고, 그의 혼백은 일찍이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
* * *
한립은 영혼 없는 장석철의 눈을 바라면서 그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 문 대인과 임자동의 짓일 것이다.
당초 상갑공(象甲功)을 수련하던 장석철을, 칠현문의 이목을 속여 도망간 것으로 꾸며, 장석철의 혼을 없애고 조종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그의 모습은 상갑공을 성공했을 때 나타난다는 모습과 거의 유사했다.
한립의 예상은 정확했다. 당시 문 대인은 장석철을 보고 갑자기 기이한 발상을 한 것이다. 그가 가진 상갑공과 임자동에게 얻은 연시술(煉尸術)을 융합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강호를 평정할 만큼 강한 꼭두각시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단지 시간이 많지 않아 겨우 한 명만 만들어 냈을 뿐이었다. 산 아래의 어떤 곳에 숨겨두다가, 지난번에 문파로 돌아오면서 데리고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임자동은 이런 볼품없는 꼭두각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꼭두각시를 만드는 문 대인을 비웃기까지 했는데, 그가 만든 고급 철갑시(鐵甲尸)에 비해 위력이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한립은 거한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깨져나간 석문을 바라보며 다시 넋을 놓았다.
이 순간 그는 마음이 서늘해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장석철의 처량한 운명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냉담하고 무정한 마음에 불안해 진 것이었다.
원래 그는 벗이 이런 참담한 지경에 이른 것을 알았다면,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문 대인과 임자동의 이름을 증오에 차 외치기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슬픈 마음은 들었지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지는 않았다. 마치 이런 곤경에 처한 사람이 자신의 절친한 벗인 아니라, 자신과 아무런 친분도 없는 사람 같았다.
‘눈앞에 있는 것은 장석철의 육체일 뿐이라서? 아니면 내가 냉혈한이 되어가는 걸까? ’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에 한립은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복잡한 심정으로 거한을 보았지만 그를 어찌 불러야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한립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장형, 이미 세상을 떠난 거겠지. 혼백이 떠난 육체가 무슨 소용이겠어. 사형이 남기고 간 육체는 사제가 좀 빌려 쓸게. 꼭 신중하게 사용할 테니 부디 하늘에서도 날 책망하진 말아줘.”
하늘에 기도를 올리듯 혹은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중얼거리기를 끝낸 한립이 거한에게 명령했다.
“너는 장형이 남겨준 육체이고 이미 혼백을 잃었으니 앞으로는 곡혼(曲魂)이라고 부르마. 이후에 날 도와서 힘을 좀 써줘.”
한립의 말을 듣고도 거한은 반응이 없었다. 단지 순종적인 표정만이 보일 뿐이었다.
“나도 참 의식도 없는 육체에게 이런 말을 다 하고, 바보 같군!”
한립이 자조적으로 말하고는 석실로 향했다.
“곡혼, 따라 오거라.”
가라앉아 있던 마음은 이미 한결 나아졌다. 정말 그의 생각대로 차갑고 이성적으로 변해서,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은 사실인 듯 했다.
이런 변화가 곧 선인의 길을 걷게 될 한립에게 화가 될지 복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 후, 한립은 뒤처리를 하느라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일단 문 대인의 시체를 커다란 나무 아래 묻고, 석실 내에 남아있는 쓸모없는 물품들은 모두 태워버렸다.
심지어 곡혼에게 명령해 석실 자체를 완전히 깨부수어버려서, 겉으로 보아서는 도저히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한참이 지나자 태양이 점차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한립은 석실 앞에서 무언가 빠뜨린 것은 없는지 살폈다.
“곡혼, 가자! 내일도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아. 네가 의식이 없어서 아쉽다. 말이라도 할 수 있으면 이런 저런 상의도 하고 좋았을 텐데.”
석양의 붉은 빛이 한립을 비추면서 그의 뒤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곡혼이라 이름붙인 거한에게 시시콜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지금의 한립은 전혀 차갑거나 무정한 모습을 찾을 볼 수 없는 보통의 남자 아이 같았다.
곡혼을 잘 숨겨두고 한립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 마치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사람처럼 방 안의 가구들을 쓸어보고 살펴보면서 중얼거렸다.
“오늘 하루는 너무 길었어. 방을 나서기 전 보다 십년은 지나가 버린 것 같아.”
그는 곧바로 침상 위에 고꾸라져서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래도 살아 돌아오니 너무 좋구나.’
* * *
한립이 문 대인이 생전에 항상 기대던 의자에 앉아 ‘장생경(長生經)’이라 적힌 책을 읽고 있었다. 장춘공의 구결인 이 책은 어찌나 흥미진진한지 빠져 들 것만 같았다.
문 대인이 매일 이 책을 읽으면서도 질려 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제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문 대인은 자신이 법력을 익힐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 했다. 임자동이 말한 영근이 필요하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묵묵히 홀로 구결을 깨치려 노력해 온 것이다.
이 비책은 다른 물건들을 숨겨 놓은 곳에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서책 상에는 한결이 이미 깨우친 6성의 구결 외에도 아직 익히지 못한 나머지 두 성의 공법(功法)이 모두 담겨 있었다.
한립의 마음이 요동쳤다. 자신이 수련하고 있던 것이 놀랍게도 비를 내리게 하고, 바람을 불러내는 법력이란 것을 알게 된 후 더욱 이 공법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
‘누가 영생을 누리는 신선(神仙)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 * *
창문을 타고 따사로운 햇살이 한립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편안히 기대 앉아 책을 보고 있었는데 매우 나른해 보였다. 한립이 고개를 살짝 들어 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너무 눈이 부셨다. 그가 펼쳐진 책을 들어 얼굴을 가리니, 빛나던 햇빛도 가려졌다. 눈앞이 어두워지니 이리 편할 수가 없었다. 순간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들어 제칠성의 구결을 묵묵히 외워보았다.
그가 계속해서 영약들을 복용해 왔기에 최근 들어 장춘공의 한계를 또 뛰어 넘으려고 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6성과 7성 사이의 경계에 도달 할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더 빨리 성취를 이루어 그에 따른 효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 대인이 자신의 몸을 빼앗으려던 날로부터 이제 반년이나 지나갔다.
그 일이 있고 겨우 이틀 뒤부터 한립은 문 대인의 죽음을 덮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히 문 대인의 필체를 위조해서 고향으로 돌아가 친지들을 살피고 오겠다는 가짜 서신을 만들었고 그것을 문 대인의 명의로 문파의 순찰 장로에게 건네주었다.
그 서신에는 문 대인의 말투를 빌어, 한립이 문 대인의 모든 의술을 이어 받았고 이미 배움을 마쳤으니, 다른 사람들을 진맥하고 부상을 치료하는 데 문제가 없음을 밝혔다.
또한 문 대인이 고향을 다녀오는 여정이 길어,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지 알 수 없으니, 몇몇 문주들에게 한립이 잠시 동안 의원의 직책을 맡아, 문 대인이 돌아 올 때까지 수행하게 하도록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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