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29
29화. 청령산(淸靈散)
“별일 아닌 걸요.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어서 이 장로님의 상황을 좀 보지요.”
마영은 한립의 대답을 듣고서야 서둘러 이 장로가 있는 침실로 안내했다. 려비우는 한립의 말을 듣고 입 꼬리를 실룩거릴 뿐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다만 모두가 침실을 향해 등을 돌리는 순간, 한립을 향해서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는 바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본래의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한립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는 다시는 려비우 쪽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급히 이 씨 부인을 쫓아 이 장로가 누워있는 침상으로 다가섰다.
침상에 있는 장로의 얼굴을 보자 한립은 너무 놀라 숨을 들이켰다. 이제야 다른 의원들이 약방문도 처방하지 못한 이유를 알 듯 했다.
원래 선한 인상을 가진 이 장로는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얼굴과 목 그리고 두 손 두 발에 모두 엽전 크기의 화려한 색채의 반점들이 기이하게 나있었다.
이 장로의 입술이 파랗게 변하고 안색이 새까맣게 변한 것으로 보아, 온몸으로 독이 퍼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장로를 살리는 일은 정말 어려워 보였다.
* * *
한립은 미간을 모은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방금 맥을 잡아보고 혀와 동공을 살핀 결과 대략적인 진단을 내렸다. 이 장로는 전향사처럼 여러 가지가 섞인 독약에 중독된 것으로, 그 독을 하나하나 해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한립은 이런 문제를 자신에게 떠넘긴 의원들을 향해 한바탕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생각에 잠겨 환자의 상태를 고민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잠시 후, 조 장로가 참지 못하고 입을 떼었다.
“이 녀석아! 도대체 이 장로를 살릴 수 있는 것이야, 없는 것이야! 말 좀 해 보거라!”
“조 장로, 성급하게 굴지 말게. 한 대인이 지금 고민하고 있잖소? 참을성을 좀 기르시오.”
한립이 대답하기도 전에 상대를 조롱하는 마 문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 장로가 눈을 부릅뜨며 뭐라 말하려는 찰나, 한립이 가볍게 헛기침을 해 그의 말을 끊었다.
이 기침 소리는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주위를 끌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런 애늙은이 같은 행동은 남들 눈에 우스워 보이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주의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이 독은 혼합독으로 독성을 뿌리 뽑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저도 이 독을 해독할 수 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해독 과정이 매우 위험하여 해독 중에 이 장로님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치료를 할 것인지 결정해 주셔야 합니다.”
곤란하다는 어투로 이상의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한립으로서는 자신에게 맡기지 않는 편이 훨씬 좋았다. 정말 가망성이 희박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이 장로의 식솔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 누구도 바로 치료를 청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립을 제외하면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한참 후 이 장로의 본처 이 씨가 겨우 입을 떼었다.
“한 대인께서는 저희 부군이 깨어날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시오?”
“5할 입니다.”
조금도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치료를 시작해 주시지요. 만일 부군께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한 대인을 원망하진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겠지요.”
이 씨 부인이 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수씨, 더 고민을 좀 해보시죠. 이 의원의 나이가 이렇게 어려서 나는 마음이 놓이질 않습니다!”
조 장로가 급히 이 씨 부인의 충동적 결정을 막아보려 했다.
“이미 충분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대인께서 나서주시지 않으신다면, 부군은 오늘 밤도 넘기지 못하실 겁니다. 아직 가능성이 있다지 않으십니까.”
이 씨가 고개를 내리깔고 슬피 읊조렸다.
“그건…….”
조 장로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씨 부인의 결정에 반대하고 나서지 않았다. 한립은 바로 자신이 가지고 온 보따리에서 자기로 된 푸른 병을 꺼내 붉은 환약 한 알을 집어 들었다.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십시오. 이 약을 풀어 이 장로께 복용시켜야 합니다.”
“제가 가죠.”
한립의 말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줄곧 눈을 붉히며 옆에 서있던 소녀가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려비우가 멍하게 있다가 바로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잠시 후 장수아가 들어왔지만 두 손은 텅 비어있었다. 대신 그 뒤를 바짝 쫓아오는 려비우가 조심스럽게 하얀 사발 하나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미소를 띠었는데, 좋은 구경을 한다는 기색들이었다. 이에 장수아는 얼굴이 붉어지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덕분에 방 안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고, 사람들의 마음도 조금 편해졌다. 려비우는 가지고 온 사발을 이 씨에게 얌전히 넘겼다.
“의원님 한 그릇이면 될까요?”
이 씨 부인이 고개를 돌려 한립의 의견을 구했다.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발을 건네받아 물속에 환약을 넣었는데, 물이 전부 붉은 색으로 변해버렸다.
“이 장로님께 드리세요. 부인께서 더 잘하실 테니 맡기겠습니다.”
한립이 다시 사발을 이 씨 부인에게 넘겼다. 한립의 모든 이야기가 부군의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고 여기고 있었으니 듣지 않을 리 만무했다.
“이건 대체 무슨 약인 게야.”
이 씨 부인이 사발에 담긴 붉은 약물을 이 장로의 입으로 조금씩 흘려 넣는 것을 보며, 조 장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제가 직접 제조한 해독약입니다. 효과가 있기를 바라야죠.”
한립이 대충 설명했다. 이런 영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성가신 일에 휩싸일 것이 자명했으니 조심하는 것이 옳았다. 약을 다 먹이고 일정 시간이 지나자 이 장로 얼굴의 어두운 기색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몸의 반점들도 색이 연해지면서 크기가 줄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의술에 문외한인 사람들이 보아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치료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희색을 감출 수 없어 이전과는 다른 눈빛으로 한립을 지켜보았다. 비록 조 장로만은 아직도 얼굴을 피지 않은 채 콧방귀를 끼었지만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한립은 다른 방법을 써보기도 전에, 벌써 독성이 사라지고 있어 놀라웠다. 청령산이 그의 예상 밖으로 효과가 좋았던 것이다. 한립은 이 장로 체내의 독이 상상하던 것보다 대단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서 급격히 회복되고 있는 이 장로를 보자 한립은 조금 우울해 졌는데, 원인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자신이 해독제를 쓰면 위험이 따를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쉽고 빠르게 낫는단 말인가.
두 번째는 이 청령산이 이렇게 뛰어나다면 자신의 독에는 어째서 듣지 않는 것일까? 지금도 몸 안에 독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말이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침착하게 방 안의 사람들에게 약효가 자신의 생각보다 잘 듣고 있다고 설명해서 모두의 경탄을 자아냈다. 마 문주도 유쾌하고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 속에는 한립을 이미 자신의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급변했다.
“안 돼!”
장수아의 놀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색이 다시 안 좋아지시고 계세요.”
이 소리에 모두가 놀라 이 장로에게 다가갔다. 물론 조 장로가 빠져있을 리 없었다. 한립도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침상으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 씨 부인은 식솔들을 침상에서 비키게 한 뒤 한립이 진맥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그제야 한립이 침착하게 다가가 이 장로를 살폈다. 잠시 후, 한립은 확신했다. 이 장로는 상태가 나빠진 것이 아니라, 독성이 완전히 빠져나갈 수가 없어 그의 얼굴에 어두운 기운이 모였던 것이다.
한립이 슬쩍 고개를 돌려 장수아를 한 번 보았다. 별 것 아닌 일로 수선을 피운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른 사람들은 한립의 시선을 보지 못했지만, 줄곧 장수아를 지켜보던 려비우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자신이 마음에 둔 여인을 질책하는 한립에게 바로 눈을 부릅떠 경고했다.
한립은 려비우의 시선을 외면한 채 계속 이 장로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이 장로의 안색은 아직 완전히 밝아지지 않았고 몸에 난 반점들도 콩알만 하게 작아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한립이 상황을 지켜보니 미리 준비해두었던 방법을 써야 할 듯 했다.
“맑은 물이 가득 담긴 대야를 하나 준비해주십시오.”
한립이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이번에도 장수아가 나서기 전에 마영이 재빨리 대답을 하고는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곧이어 한립이 천 장로와 마 문주를 향해 정중하게 물었다.
“아무래도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할 듯합니다. 내력을 이용해 이 장로님의 독을 특정한 혈 자리로 밀어내 주시면 제가 침술로 독을 풀어내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괜찮으시겠는지요.”
마 문주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으나, 입으로는 한립의 제안에 동의했다. 천 장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어째서 저 둘인가, 난 안 된단 말이냐?”
조 장로는 한립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불편한 기색으로 물었다. 한립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 고집불통에게 아무래도 설명을 해줘야겠구나.’
“조 장로께서 익히신 혼원장(混圓掌)은 외문의 무술이 주를 이루지 않는지요. 아무래도 내력의 정순함으로 보아 마 문주와 천 장로께서 도와주시는 게 적합할 듯 합니다.”
한립이 서두르지 않고 온화한 음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 그거야…….”
조 장로는 한립의 완곡한 거절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한립은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을 향해 명령조로 지시했다.
“마 문주님과 천 장로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가주십시오. 치료 중에는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니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럼 부군을 부탁드립니다.”
한립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멍해졌으나 이 씨 부인은 공손히 예를 올리며 가장 먼저 방을 나섰다. 이 씨 부인이 먼저 이리 행동을 하니 다른 사람이야 원치 않아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립은 마영이 대야 가득 맑은 물을 떠오자, 그도 내보내고 방문을 단단히 잠가버렸다. 치료가 시작된 지 한 식경이 지났는데도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줄곧 소식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던 이 씨 부인조차 조금씩 좌불안석하는 기미가 보였다. 성질이 불같은 조 장로는 이미 마당을 몇 바퀴나 돌고 있었다.
‘삐걱’
사람들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 날 때쯤 침실의 문이 열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곳을 향해 있었다. 한립은 피곤한 기색으로 방을 나서면서 그 어두운 눈빛들을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치료는 잘 되었습니다. 이 장로님 몸에 남아 있던 독을 모두 몰아내었으니, 오늘 밤만 푹 쉬시면 내일은 깨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
자신 있는 목소리였다. 사실 한립도 독을 뽑아내는 시술이 이렇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순조롭게 진행 될 줄은 몰랐다.
이 씨 부인과 식솔들은 한립의 말을 듣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성격이 급한 이들은 벌써 이 장로를 보러 방에 들어가려 했지만 한립이 손을 뻗어 그들을 제지했다.
“현재 이 장로님은 매우 허약해진 상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에 들어 시끄럽게 하는 것은 안 될 말이지요. 게다가 마 문주님과 천 장로께서 독을 몰아내느라 원기가 크게 상하시어 운기행공을 하고 계시니 부인께서 홀로 들어가 보심이 어떠십니까?”
한립이 이 씨 부인을 향해서 정중히 물었다.
이 엄청난 희소식 앞에 이 씨 부인이 무슨 다른 생각이 있겠는가. 그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침실로 들어갔다.
#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