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399
399화. 남궁 사조
“남궁 사숙의 지기가 금제를 걸어 놓았다고?”
금포 수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한립에게 칼날 같은 시선을 던졌다.
“내가 확인해 보마!”
금포 수사의 분부에 한립이 속으로는 쓸데없이 참견한다 욕을 하면서도 고분고분 팔을 내주었다.
“허! 확실히 기이하구나. 그래도 위험한 금제는 아니니 악의가 있어 한 행동은 아닐 게다. 그럼 서둘러 올라가 보거라.”
금포 수사가 곰곰이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몸을 날려 남색 빛줄기로 화하더니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람 사숙님의 무형둔법(無形遁法)이 무르익었구나. 비록 결단 초기이지만 결단 후기 수사도 어쩌지 못할지도!”
새하얀 수사가 금포의 결단기 수사의 뒷모습을 쫓으며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한립은 생각나는 게 있었다.
‘무형둔법? ’
혈금시련 전에 나타났던 기름 떼 범벅의 ‘궁 노괴’와 관련이 있는 자인가? 설마 ‘궁 노괴’의 제자나 후인?
한립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새하얀 얼굴의 수사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다시 날아가고 있었다.
영롱산의 정상부에 거주하는 고계 수사들은 몇 안 되었기에 금의 수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최정상에 위치한 동굴 중 하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남궁 사조님의 거처이다! 들어가면 입 조심하고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남궁 사조님께서 금제를 풀어주실 것이다.”
새하얀 수사는 조금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한립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대문을 향해 공손이 외쳤다.
“사조님께 아룁니다. 말씀하신 제자를 데려 왔습니다.”
“알았으니 들어오게 하고. 너는 물러가거라!”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노란빛이 반짝이더니 문이 열렸다. 한립이 주저 없이 걸어 들어갔다.
석문 뒤에는 노란색 반소매 옷을 걸친 수려한 여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 열예닐곱 정도로 보였는데 벌써 축기에 성공했는지 수행이 제법이었다.
“나를 따라 오거라. 사조님께서 대청에서 기다리신다!”
한립이 작게 숨을 고르고는 조용히 그 뒤를 쫓았다. 남궁완의 거처는 그리 크지 않아서 소녀를 따라 문을 몇 개 지나니 바로 대청이 나타났다.
대청은 우아하면서도 섬세하게 꾸며져 있었다. 구석구석 이름 모를 향이 타올랐고 입구에는 작은 화단이 있어 진귀한 기초(奇草)들이 자라는 중이었다.
그리고 대청의 중앙에는 네모난 나무 탁자와 덩굴로 엮어 만든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백의 소녀가 의자에 앉아 은빛 거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의복을 입은 여인은 한립이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곤 어루만지던 은색 검을 목함에 넣고 고개를 들었다.
오랜 세월 그리워하던 바로 그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날렵한 턱과 수려한 콧대 맑은 눈망울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눈에 익은 매혹적인 얼굴에서 한립은 마음 깊은 곳이 따뜻해져왔다.
마치 이 여인과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을 함께 보낸 것처럼!
이 느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립은 무엇을 하러 왔는지도 까맣게 잊고 격정에 사로잡혔다.
남궁완이 연기기 제자가 무엄하게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에 멈칫 하더니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옥아, 너는 일단 물러가거라.”
남궁완이 살짝 턱을 들어 한립을 데리고 들어온 여인에게 일렀다.
“예, 사조님!”
노란 적삼을 걸친 소녀가 고개를 숙이며 답하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한립은 그녀가 입구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의식을 통해 주변에 다른 수사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남궁완을 응시하며 수결을 맺었다.
와드득.
한립의 체구가 갑자기 수촌 가량 커지며 푸른빛이 어른거렸다.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말 당신이었군요! 한립!”
남궁완은 놀란 것 같지는 않았으나 유유히 탄식했다.
“그…… 당신은 내가 올 줄 알았소?”
본래 얼굴로 돌아온 한립이 그녀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바보처럼 이런 말이나 내뱉고 말았다. 말을 하고나서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한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당신은 무슨! 그냥 완이라고 불러요.”
남궁완이 한립의 어리벙벙한 얼굴에 오히려 표정을 풀며 활짝 웃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완!”
한립이 크게 기뻐하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드디어 안정을 되찾은 것이다.
남궁완이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면 이렇게 나올 리 없었다. 일순 한립이 여인의 고운 얼굴을 보며 감상에 젖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요. 새로 얻은 시첩보다 보기 좋은가요?”
남궁완이 얼굴을 붉히면서도 슬쩍 고개를 들며 물었다.
“시첩에 관해서도 아오?”
상대의 투정하는 어투에 한립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흥! 낙운종의 새로운 장로가 200년 만에 원영기에 든 수사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남궁완이 고개를 숙이며 반질반질한 동굴 바닥을 보는데 장난기가 묻어났다.
“며칠 전 만난 당 수사에게 들은 게요?”
“바보는 아니네요! 당 사질이 보낸 특수한 전음부를 받아 보았어요. 오랜 세월 실종되었던 당신이 원영기 수사가 되어서 나타났다니 정말 믿기지 않네요.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 낙운종 장로가 되고, 최근에 교역회에 다녀온 것까지 전부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의 시첩이 아직도 전천성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요!”
남궁완이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힐끗 한립을 바라보는데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분명 낙운종의 또 다른 장로와 함께 복귀하라 일렀는데. 보아하니 일이 생긴 듯하오. 시첩을 들인 것은…….”
한립이 코끝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해명하려 했다.
“그건 됐어요. 시첩을 들였다고 원망하지는 않을게요. 나는 다른 사람과 곧 혼인하잖아요?”
남궁완이 바로 한립의 말을 끊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떻게 된 일이오? 정말 그 자와 혼인할 생각이오?”
“대답 전에 물어볼게 있어요. 지금 왜 날 찾아 온 거죠? 혼인을 막기 위해선가요 아니면 오늘 이후 각자 갈 길을 가자는 건가요.”
남궁완이 붉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빛냈다.
“당연히 함께 떠나기 위해서요. 난 당신이 나 한립의 여인이 돼 주길 바라오! 누구에게서든 빼앗아 오겠지만 그 전에 먼저 동의는 구해야 되니까.”
주저 없이 내뱉는 대답이 결연했다.
“칫, 내가 언제 당신에게 시집간대요?”
얼굴이 붉어져 부끄러워하는 남궁완의 모습에서 한립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모습에 한립은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그가 아무리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아도 그녀의 뜻은 충분히 전해졌던 것이다. 잠시 후, 남궁완이 수줍은 기색을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거 알아요? 당시 혈금시련에서 몸을 내주고 내가 처음 한 생각은, 겨우 연기기 수사였던 당신을 조각내 죽여야겠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주작환을 이용해 순결을 잃게 한 복수를 할 셈이었죠! 어쨌든 100년 간 지켜온 순결을 잃었으니 너무 화가 났거든요.”
“그때 당신 손에 황천길로 갈 뻔 했소.”
한립이 코를 문지르며 난감해했다.
“당연하죠! 그때 내가 뭐에 홀렸는지 마음이 약해져서 당신을 살려주지 않았다면……. 결단기 수사를 범한 당신이 무사했겠어요?”
이이야기를 하면서 남궁완은 정말 그를 탓하고 있었다. 한립이 변명할 말이 없어 입만 벙긋거리자 그녀는 원망하는 기색을 풀고 다시 붉은 입을 달싹였다.
“당신과 헤어지고 엄월종으로 돌아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공법을 수련하든 좌선을 하든 도저히 당신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의 기억이 너무 또렷해져서 더욱 번민했죠. 그때 당신은 이미 내 심마가 된 거예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평생 수련을 해도 더는 나아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죠.
마음속 번뇌를 없애는 길은 딱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당신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당신을 없애는 것이었죠. 이 세상에 없는 존재에게 연연해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때는 당신과 내 신분이 현저히 차이가 나서 혼인은 거의 불가능했죠.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이를 악물고 당신을 제거하기로 결심했어요! 물론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마도 육종이 쳐들어왔지만요. 주둔지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축기에 성공했더군요. 그걸 확인하니 결심도 흔들렸어요. 당신이 이렇게 계속 정진한다면 어쩌면 부부의 연을 맺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때 나를 죽일 생각이었군. 난 얼굴을 가린 당신을 보고도 반가워 어쩔 줄 몰랐었는데. 곧 당신의 냉랭한 모습에 흥분을 가라앉히곤 며칠간 낙담해 했었지.”
조금 놀란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남궁완이 피식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후, 영수산의 배신으로 월국 칠파가 대패했고 각 문파들은 핵심제자들을 데리고 월국에서 철수했어요. 가장 어린 결단기 수사였던 나도 철수 인원에 합류할 수 있었고요. 그때 교분이 있던 황풍곡 수사에게서 령호 사조의 철수 계획에 대해 언뜻 듣게 되었죠.
정말 귀신에라도 홀렸는지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어요. 당신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갔을 때는 이미 한발 늦어 버렸지만요. 이미 전투는 끝났고 미끼가 되었던 제자들은 대부분 살육을 당했더군요. 당신의 생사를 알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엄월종으로 돌아가 종문을 지키는 제자들을 도와 마도인들과 대전을 벌이게 되었어요.
그 결과 어떤 결단기 수사에게 중상을 입고 달아나다 여러 완배들에게까지 쫓기게 되었죠. 그 뒤의 일은 당신도 잘 알거예요. 이 세상에 남궁병이란 인물은 없어요. 내가 꾸며낸 거죠. 내 본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지만 결단기 수사인 내가 당신을 구하러 왔다고, 당신과 혼인하고 싶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당시 당신의 수행까지 빼앗은 마당에 더욱 그럴 면목이 없었죠. 그래서 당신에게 함께 엄월종으로 돌아가자고 물었었죠. 그런데 당신이 재물이 탐났던지 아니면 사내라서 자존심이 상했던 건지 굳이 영석을 선택하고 나와 가지 않겠다고 했으니 내가 어쩌겠어요.”
남궁완이 여기까지 말하고는 한립을 향해 눈을 부릅떴지만 여인이 속으로는 그를 대견하게 여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한립은 남궁병이 남궁완이었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아마 정말 그녀를 따라갔다면 혼인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한립이 수행을 위해 아무 여자든 상관없이 혼인을 하려 한다고 생각해 심마도 사라졌겠지.
“나중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엄월종으로 돌아와 북량국에서 자리 잡기를 기다렸고, 그 사이 당신을 찾으러 월국에 한번 다녀왔지만 암울한 소식만 들었죠. 귀령문에서 추살령이 내렸다는 이야기뿐 구체적인 전말을 알 수 없었으니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마도인들에게 발각되어 구국맹으로 돌아왔고요.
그 후론 계속 당신의 소식을 듣지 못해 십중팔구 죽었을 거라 여겼어요. 그러다 당신에 대한 미련도 수련을 방해하던 심마도 차츰 옅어졌죠. 그렇게 원영을 응결하는데 성공해 엄월종 장로가 된 거예요.”
남궁완은 아주 평온했다.
한립은 그녀가 유유히 늘어놓는 이야기에 얼굴색이 수차례 바뀌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남궁완을 보는 그의 시선이 한층 더 뜨거워졌다.
“그런데 위리진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위리진! 몇 년 전에 우연히 만난 화의문 장로인데 끔찍했죠. 전형적인 위선자로 고상한 척하지만 사실 파렴치한에 저질이에요. 말로는 ‘여제자’ 라는 여인들이 벌써 7명이 넘는다더군요. 듣기로 몰래 음기로 양기를 보하는 주술을 익혔다니, 내게 구혼한 의도도 뻔해요! 그래서 처음에 내게 혼사를 제의했을 때 바로 거절했어요.”
“거절했는데 어찌 이렇게 된 거요?”
한립의 의아한 얼굴에 남궁완이 바로 답을 주지 않고 불쑥 물었다.
“천남 3대 원영 수사에 대해 들어 보았나요?”
“들어 보았소. 정마와 구국맹이 각각 한 명씩 보유하고 있는 원영 후기 수사들인데 화신기가 코앞이라고들 하지. 그들이 아니었다면 거대 세력들 간의 균형이 지금까지 유지되지는 못했을 거요. 다만 구국맹은 원영 중기에 이른 부부가 있어 두 사람이 협공을 하면 간신이 원영 후기 수사에 맞먹는다 하고. 위리진이 그들 중 누군가와 연관이 있소?”
한립은 불길한 예감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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