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47
47화. 반목
“너…….”
엄 씨도 이제껏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보았지만, 한립의 뻔뻔한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래, 네게 묻겠다. 부군은 네 놈의 손에 목숨을 잃은 것이더냐!”
이 부인이 참지 못하고 아름다운 두 눈에서 불꽃이 튈 듯 한 기세로 소리쳤다. 이미 문사의 기품은 사라지고, 그 안에는 깊은 원한만이 느껴졌다.
“이 제.”
엄 씨가 이마를 찌푸리며 조용히 이 부인을 말렸다.
“제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씨의 질문에 한립이 차갑게 응답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엄 씨를 포함한 부인들이 모두 당황스러움에 일순 조용해졌다. 한립이 단박에 부인을 하거나, 아니면 방자한 태도로 자백을 할지도 모른다고는 예상했으나, 이렇게 애매한 답변을 내놓을 줄은 몰랐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분명 네가 살해한 게야!”
일순간 멍해 졌던 이 부인이 한립이 자신들을 가지고 논다는 생각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대노했다.
“어찌 제가 살해했단 말입니까? 직접 보시기라도 하셨나요?”
한립이 태연히 반문했다. 그 서신은 문 대인이 죽기 전에 쓴 것이니 당연히 자신이 어떻게 누구 손에 당할 것인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부인들에게 어떤 말을 남겼든 문 대인의 예상일뿐이니, 한립도 전혀 거리낄 것 없이 반격을 가한 것이었다.
“그래, 네가 그리 말하니, 그럼 네 입으로 부군이 어찌 목숨을 잃으셨는지 설명을 해 보거라. 정말 너와 무관하다면 우리도 널 벌할 일은 없겠지.”
줄곧 한 마디도 내뱉지 않던 오 부인 왕 씨가 돌연 입을 열었다.
* * *
한립은 그 말을 듣고는 입을 벌려 하품을 하는 시늉을 했다.
“날 벌한다? 말이야 쉽지만. 정말 내가 문부를 두려워 할 거라 여기십니까. 만일 문 대인이 얼마간이나마 내 사부로 여기지 않았었다면, 그가 내게 적지 않은 의술을 전수해주지 않았다면? 흥! 겨우 문부라. 그 정도는 한 손만 써도 강아지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한립의 말이 마치 냉기처럼 방 안을 맴돌았고, 그에게서 음산한 기운이 풍겼다. 이미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왕 문부를 속일 수 없다면, 몸속의 음독을 제거하기 위해 더 직접적인 방법을 이용해야 했다. 일단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 난양보옥(暖陽寶玉)을 엄 씨 등에게 내놓게 만드는 것이었다.
한립의 협박에 처음에는 놀라는 듯 했던 부인들의 얼굴에 냉소가 피어났고, 그 중 특히 삼 부인 류씨는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눈앞의 부인들이 자신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이 분명해지자, 한립의 얼굴에서도 점차 온기가 사라졌다.
곧이어 한립이 내민 손가락에서 돌연 찻잔 크기의 화구가 만들어지자, 방 안의 온도가 급상승해 부인들은 뜨거운 열기를 느끼게 되었다.
“수도자!”
그가 차가운 시선으로 이 화구의 위력을 선보일 과녁을 찾는 와중에, 뜻밖에도 이 씨 부인의 입에서 ‘수도자’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떠올랐다.
다른 이들도 모두 대경실색해서는 심지어 얼음장 같은 오 부인마저 동요했다. 그들이 수도자라는 존재를 안 다는 사실에 한립 역시 크게 놀라, 안색이 어두워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말 수도자란 말인가?”
삼 부인 류씨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반신반의하며 물어왔다. 그런 모습에 그제야 한립이 아무 말 없이 손끝을 튕겨 화구를 류 씨 옆의 탁자로 쏘아 보냈다.
‘화르륵’
탁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화구를 맞고는 재로 변해 버렸다. 이 일격으로 류 씨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탁자 옆에서 물러났다. 한립은 ‘수도자’라는 말을 처음 꺼낸 이 씨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 부인, 어찌 수도자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설마 다른 수도자를 만난 적이 있나요?”
“난…….”
이 씨가 한립이 수도자란 사실에 너무 놀라, 두려움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제에게 물을 것 없소. 수도자에 대해서라면 내가 말하죠!”
“아, 그럼 말해 보십쇼.”
한 쪽에서 엄 씨가 나서서 이 씨의 앞을 가로 막자, 한립이 코를 긁적이며 느긋이 말했다.
“숨길 일도 아니지요. 가원성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수도자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성 외곽에서 직접 수도자간의 싸움을 목도한 적도 있고요. 듣기로는 비바람을 부리고 불을 뿜고 벼락을 내리쳐서 각각이 살아있는 신선과 같다더군요.”
‘그랬구나!’
말을 마치며 한립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엄 씨의 설명에 한립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가원성은 노을산과 같은 후미진 지방이 아니란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선 수도자들이 자신을 나타나는 것도,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어제만 해도 직접 남의인을 마주치지 않았던가!
“그럼 문 대인도 수도자의 존재를 알았겠군?”
“그렇죠. 부군도 직접 수도자를 본 사람들 중에 한 분이었으니까요.”
한립이 돌연 문 대인이 떠올라 물었더니, 엄 씨도 숨길 일이 아니라는 듯 답했다.
‘어쩐지 문 대인이 수도자에 대해 집착한다 했더니, 진정한 수도자를 이미 본 적이 있었던 거구나. 안타깝게도 영근(靈根)이 없어 그토록 노력한 끝에 나만 덕을 본 꼴이야.’
한립이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돌연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엄 씨가 자신이 묻는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는데 자신이 수도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군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립이 차분히 엄 씨의 얼굴을 살피자, 그녀의 차분한 표정 아래, 한 줄기 초조함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지금 시간을 끌고 있었던 건가? ’
급히 의식을 집중해 아래층까지 샅샅이 살펴도 누군가 침입하려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눈을 이곳저곳으로 돌리며 한립이 돌연 의자에서 일어나 사방을 살폈다. 이상한 점이 전혀 없어 보였고 방 안에 있는 물건도 간결했다. 탁자며 의자 모두 평범했고 모든 것이 어제와 그대로였는데, 다만 하얀 촛불 하나가 추가 되었다.
‘양초? ’
한립의 시선이 양초에 꽂혔다. 처음엔 문 대인을 기리기 위해 불을 붙여 놓은 것이라 여겨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죽은 이를 기린다기에는 향도 피워놓지 않은 것이 꺼림칙했다. 이런 생각에 한립이 코를 킁킁거리자 은은하게 단향목 향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희미해서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 할 정도였다.
엄 씨 등이 한립의 시선이 양초로 향하자 부자연스러운 기색을 보이더니, 한립이 코를 킁킁거리자 아예 안색이 변했다. 이에 한립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는데, 정말 유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찌 웃는 것이냐? 양초에 이상이 있는 것을 알아챘다 해도 이미 늦었다. 미약인 천인취(千人醉)는 보통 사람이 맡으면 사지의 힘이 풀릴 뿐이지만, 무인이 당하면 진기가 흩어져 한동안 무공을 쓸 수 없게 되지. 네 놈이 수도자라 해도 무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뭐, 별거 아니고. 내가 너무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엄 씨가 이제야 노기를 드러내며 향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한립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칠현문에 있을 때 말이야. 항상 강호의 괴이한 무공들에 대해서 들어왔지. 그 중에서도 독약이나 미향 같은 것들은 정말 인상 깊었어. 이런 것들은 미리 대비를 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저 평범한 사람도 방심한 틈을 타 고수를 죽일 수 있게 만들어주지. 그래서 난 온갖 궁리 끝에 이런 것들을 대비할 방법을 찾아냈지.”
한립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하자 엄 씨 등이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다만 그게 무슨 방법인지는……. 하하”
자신의 입만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는 부인들을 보며, 한립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에게 말해 줄 리가 있겠어? 난 원수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악습관 같은 것은 없으니 말이야.”
한립이 웃음기를 쫙 뺀 얼굴로 싸늘히 읊조렸다.
* * *
엄 씨가 가장 먼저 화를 누르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말했다.
“당신이 정말 수도자이고 이런 미향 따위에 당하지 않는다 해도, 몸에 있는 음독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엄 씨가 결국은 마지막 수단을 꺼내 들었다.
‘문 대인이 역시 칼자루를 부인들에게 넘겨주었구나.’
“그래, 난 음독에 중독되어 있지. 하지만 독성이 발작하기 전에 내가 너희 전부를 깨끗이 죽여 없앨 수 있다는 것도 아는가.”
비록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그 안의 담긴 의미는 분명히 전달되었다. 엄 씨가 침묵을 지키자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보아하니 생사가 걸린 일임에도, 문부에서 사 부인 엄 씨를 제외하면 이런 큰일을 감당할 이가 없는 듯했다.
“서로가 상대의 약점을 쥐고 있고, 또 양패구상(兩敗俱傷)을 하는 것을 원치 않으니, 이제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로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나도 이렇게 어린 나이에, 비명횡사 할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까!”
목숨이 걸린 일이라 한립도 엄 씨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다시 엄 씨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럼 이야기를 나누기 전, 소첩들에게 부군이 겪은 사고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한평생을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왔는데, 어찌 세상을 떠났는지 그 이유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정말 부군이 당신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해도, 저희가 어찌 당신을 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부군을 잃은 과부들에 불과하지요.”
엄 씨의 표정은 연기가 분명했지만, 엄 씨와 부인들이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사실이기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문 대인이 죽은 과정을 설명하는 것도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사실 문 대인의 죽음과 자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첫 째로는 임자동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는 모두 자업자득이 아니던가?
“그러지요. 문 대인이 죽은 이유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주겠소. 만일 이야기를 다 듣고도 내게 원한을 품는지 한 번 두고 봅시다.”
“감사합니다, 공자!”
한립이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응답을 하자 엄 씨가 고마움을 표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난 문 대인에게 속아 4년이나 장춘공을 수련하고서야…….”
전혀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한립은 자신이 속았던 일, 문 대인이 독을 써서 장춘공의 수련을 강요했던 일 등을 천천히 풀어 놓았다. 문 대인이 자신의 육체를 빼앗으려고 원신으로 변한 시점에서부터, 임자동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의 모든 음모 또한 낱낱이 밝혔다.
마지막으로 음독에 중독 당한 것을 알고 난양보옥을 찾아 해독을 하러 어쩔 수 없이 남주에 온 것을 끝으로 이야기를 마쳤다. 한립이 이 모든 것을 다 털어 놓은 것은, 문 대인이 죽은 사건에 대해 자신만이 진정한 피해자이며, 문부에서 자신을 이리 취급할 이유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부인들은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에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만일 한립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정말 부군의 죽음에 상대의 책임을 묻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한립이 설명한 문 대인의 모든 수단과 심계 등이 그들이 기억하는 부군의 성정과 완전히 맞아 떨어졌고, 밀서에 담긴 정황과도 어긋남이 전혀 없었다. 아마 그가 말한 대부분이 진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았다.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부군의 죽음을 당신 탓이라 할 수는 없겠군요. 그 임자동이란 자의 흉악한 계략이 없었다면, 어찌 부군이 목숨을 잃었겠어요.”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정리하는 엄 씨가 곁눈질로 한립을 살폈다.
‘정말 편협하기 짝이 없군. 문 대인이 저지른 추악한 짓까지 모두 임자동한테 떠넘기다니. 마치 문 대인은 아무 잘못도 없는 것처럼 말이야.’
엄 씨를 바라보는 한립의 눈빛에서는 그의 마음이 십분 드러났다. 그러나 엄 씨는 얼굴을 붉히거나 동요하지 않고, 그런 한립의 시선을 모른 체 해버렸다. 그는 이어서 다른 부인들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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