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51
51화. 문봉무
문 씨 자매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죽고 난 다음에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런 연유로 쓰린 속을 부여잡고 눈앞에 있는 미인들을 거절한 것이다.
그러니 문 씨 자매가 자신을 좋아하고 말고는 더욱더 상관이 없었다. 그는 오직 어서 일을 마쳐 몸속의 음독을 없애고, 이곳을 떠나는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으니, 그 이후에 문부가 어찌 될 지는 그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이렇게 딱 잘라 거절을 하자 엄 씨 등 부인들은 안색이 나빠졌지만 문 씨 자매들은 기분이 퍽 좋아진 듯 했다.
심지어 가장 어린 문채환은 한립을 향해 잘했다는 듯한 미소까지 보내왔다. 그리고 문옥주와 문봉무 역시 한립을 바라보는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한숨을 푹 쉰 엄 씨가 다른 부인들과 눈짓을 하더니, 다시 몸을 돌려 한립을 마주보았다.
“한 공자가 싫다니 그 또한 어쩔 수 없지요! 그럼 한 공자가 말한 대로 선택을 하겠어요. 당신이 독패산장의 장주 노사(怒獅) 구양비천만 죽여준다면, 난양보옥을 내주겠습니다.”
“하하! 부인들의 심계가 대단하군요. 듣자 하니 노사 구양비천은 나이가 있음에도 아직 여식이 없으니, 그가 죽으면 독패산장은 사분오열될 가능성이 높겠네요. 다신 경교회의 적수가 되지 못하겠죠”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오검명이란 자를 보낸 곳이 어딘지 아시나요? 오검명은 바로 그 구양 장주가 보낸 자입니다. 게다가 구양비천의 일곱 번째 제자로 총애를 받았다더군요.
독패산장의 장주는 부군과 비슷한 연배로 줄곧 남주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 자입니다. 우선 우리 경교회를 간교한 수로 집어 삼킨 후에 오색문을 쓰러트릴 심산인 게지요.
이미 그자가 몇 해 전 부군의 의제인 마공천과 이(二) 제자 조곤을 충동질 해 경교회의 내분을 일으키려 했었습니다.
다행이 우리 쪽에서 먼저 발견했지만, 그들은 동문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되고, 경교회 역시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머리수를 앞세운 독패산장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겨우 세력 범위를 좁혀 가원성만을 지켜낸 것이고요.”
엄 씨가 담담히 경교회에 비사를 털어놓았다.
“지금 경교회의 세력은 가원성 내에서도 그리 강하지 못한데. 독패산장은 어찌 단숨에 문부를 멸하지 않은 것이죠?”
“구양비천 놈이 감히 이곳을 치지 못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요. 알고 싶다면 우리가 앞서 제안한 조건에 승낙해요. 그럼 바로 공자에게도 일러 줄 테니.”
삼 부인이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그럼 됐고요. 그냥 궁금했던 것뿐이니까.”
“정말! 사내답지 못하네요. 그런 사소한 일도 못해주다니.”
그녀의 제안에 한립이 꿈쩍도 않자 삼 부인이 입을 삐죽이며 한립에게 치근덕거렸다. 이에 엄 씨와 다른 부인들은 삼 부인의 교태를 못 본 척 했으나, 문 씨 자매들은 얼굴을 붉혔다.
“삼 부인 말은 쉽지만, 그 사소한 일에 제 명줄이 걸렸는걸요. 전 사내다운 것은 되었고, 그냥 몸이 사내인 것에 만족하는 부류랍니다.”
그의 솔직한 태도에 부인들도 약간 당혹스러워졌다.
“공자는 어찌 구양비천의 숨을 끊어놓을 계획이죠? 그 자는 종일 산장에 숨어 거의 출타도 하지 않아요. 게다가 무공도 절정에 이르렀고 머리 쓰는 것 또한 만만치 않아 상대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건 사 부인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좋은 말 한 필과 그자의 얼굴이 그려진 화상(畫像)만 주면 됩니다. 그 후에는 제가 알아서 할 일 이지요.”
“저 역시 그렇게 되길 바라는 바입니다.”
한립의 거리낌 없는 말투에 엄 씨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전에 말입니다. 부인들도 내게 보장을 해줘야겠지요. 내가 일을 마치고 나서 당신들이 안면몰수 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어찌 보장을 하죠?”
한립의 말에 엄 씨가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미 예상한 듯 그리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단약을 부인들이 한 알씩 먹어줘야겠어요. 어떤 약인지는 그냥 말하지 않죠. 어차피 구양비천을 죽이는 그날, 난양보옥과 해약을 교환하면 모두 해결될 테니까요.”
탁자 위에 한립이 꺼내 놓은 약병이 올라오자 엄 씨가 두 말할 틈도 없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병을 기울이자 청녹색 환약이 굴러 나왔는데, 전혀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그대로 그것을 삼켜버렸다.
‘겁이 없는데다 결단력이 있는 것이 경교회를 지금껏 이끌어 온 이라 할 만 하군.’
한립은 속으로나마 그녀에게 탄복하며 시선을 다른 부인들에게로 옮겼다.
“다른 사람들은 복용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요? 내 목숨을 쥔 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요.”
이미 환약을 삼킨 엄 씨가 다른 부인들이 약을 복용하려는 것을 막아섰다. 한립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 부인이 정이 깊어 그리 말하니, 그럼 그리 하지요. 저도 그리 야박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말을 마친 즉시 한립이 다시 약병을 가져갔다.
“그럼 볼 일이 끝났으니 전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문부를 찾아 필요한 것만 받으면 바로 일에 착수해야 하니까요.”
“그럼 공자만 믿겠습니다!”
엄 씨가 한립을 배웅하자 한립이 잔잔한 웃음을 띠고는 방을 나섰다. 그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뒤에서 급하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형, 잠깐만요 둘째 언니가 할 말이 있대요!”
문채환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자 한립이 마지못해 돌아섰다. 문채환 뒤편으로 문봉무와 문옥주가 걸어 내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문채환은 몇 걸음 앞에 멈춰서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주변을 뱅뱅 돌기 시작했다.
“한 사형, 날 속이느라 재미있었겠어요! 설마 당신도 가짜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요! 별거 아닌 거나 주며, 사람을 꾀고 말이야.”
그녀의 말에 한립이 눈을 부릅떴다. 자기가 억지로 뜯어가 놓고는 사람을 이리 모함하다니.
“삼 매, 예의를 지켜. 한 공자에게 버릇없이 굴지 말고.”
한립이 처음으로 문봉무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나른해졌다. 정말 사람을 편하게 하는 고운 음성이었다.
“뭐가! 어머니를 대신해서 말하는 거 아니야. 누가 우리 어머니 앞에서 으스대래?”
문채환이 씩씩거리는 것을 보며 역시 자신의 예상대로 그저 시비를 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바로 고개를 돌려 문봉무에게 시선을 옮겼다.
“둘째 아가씨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봉무가 공자를 찾은 이유는 삼(三) 매가 지닌 영향환(縈香丸)을 정말 공자가 주신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입니다. 공자께선 부친께 의술을 전수받으신 건가요?”
한립의 말에 얼굴을 붉힌 문봉무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녀에게 호감이 있던 한립은 그녀가 상냥히 물어오자, 그녀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아가씨께서 궁금하시다면 알려드려야지요. 채환 소저의 영향환은 제가 준 것이 맞습니다. 또한 문 사부님께 의술과 약방문을 전수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영향환의 제조법도 그때 알게 된 것이지요. 혹여 봉무 소저도 의술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문부의 후원에서 약초를 기르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이곳에 문 대인의 의술을 이어 받은 이가 있다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봉무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오니, 당연히 눈앞의 여인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립이 말을 꺼내자 그녀의 눈에서 희색이 감돌았다.
“공자께 감출 것도 없지요. 저는 어릴 적부터 부친의 의술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친의 의서를 찾아 공부해 왔으나, 워낙 어릴 적 문부를 떠나신 탓에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말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던 문봉무가 망설이는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공자께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부친이 의술에 대해 깨달은 바를 혹시 적어주실 수 있으시다면, 제가 의술을 익히는데 큰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이런 부탁을 하며 문봉무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는데, 자신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그러지요. 내일 문부에 오는 김에 문 사부님이 남기신 유고와 약방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것들은 본래 문부의 것이니 저도 사 부인에게 돌려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아가씨가 이리 청하시니, 아가씨께 드리는 것도 크게 다를 바 없겠지요.”
“공자께서 청을 들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한립이 곧바로 승낙하자, 문봉무의 얼굴에 감격한 기색이 떠올랐다.
“언니, 고맙긴 뭐가 고마워? 못 들었어, 원래 그건 우리 것이라 하잖아. 돌려주는 게 당연한 거지.”
‘허! 만약 네 둘째 언니처럼 상냥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사정하지 않았다면 내가 내 손에 들어온 물건을 공짜로 문부에 돌려주었겠느냐? ’
이들을 지켜보던 문채환이 끼어들자, 그녀를 힐끗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삼 매 말조심해. 한 공자께서 부친의 유품을 돌려주신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문봉무가 서둘러 채환을 다그치고는 더 이상 버릇없이 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빼어난 자태로 예를 올리고는 채환과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시종일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문옥주 역시 한립을 샅샅이 훑어보고는 그들을 따라 나섰다. 그의 입장에서야 그 눈길만으로는 문옥주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 한립은 어깨를 으쓱하며 생각을 접고 문부를 떠났다.
* * *
객잔으로 돌아오자 사평방의 신임 방주인 손이구가 방문 앞에서 한립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곡혼도 그들과 함께였다.
그를 본 한립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먼저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손이구 등이 그를 따라 방에 들어 왔다. 이어서 손이구와 다른 한 명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한립은 자리에 앉아 손이구 옆에 있는 이의 얼굴을 살폈다. 인상이 정말 험상궂은 자였다.
“얼굴을 보니 사평방 방주 자리에 앉은 게로군.”
“앉았지요! 모두 공자님 덕분입니다.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어찌 소인 같은 자에게 오늘 같은 날이 있었겠습니까!”
“알고 있다니 다행이고. 내 사평방의 일은 관여하지 않을 것이나, 방파의 총력을 기울여 분부한 일들을 깔끔히 처리해야 할 것이야. 다시 방주를 바꾸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니.”
손이구가 입이 찢어져라 웃는 것을 보며 한립이 차갑게 말했다. 그제야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손이구가 정신이 번쩍 드는지 냉정을 되찾았다.
“소인 공자님의 일이라면 전력을 다해 해내겠습니다. 목숨을 걸고라도 꼭 완수할 것입니다!”
한립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다른 인물에게로 돌렸다.
“네가 신선의 대화를 들었다고?”
“그러합죠. 소인 석철우가 확실히 두 귀로 들었습니다요.”
한립이 흥미롭다는 듯 물어오자, 그는 흉악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공손히 답했다. 그런 모습에 한립은 만족스러웠는데, 총명한 자만이 일 처리를 잘 해내는 법이었다.
“그날 신선 남녀를 본 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빼놓지 말고 이야기해 보거라. 내 마음에 들면 네게 사평방 부방주 자리를 약속하지.”
석철우는 그 말에 크게 기뻐하며, 그 날 있었던 일을 세세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손이구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바와는 조금 달랐지만 대략적인 흐름은 비슷했다.
“그 남녀 신선들이 일시나 지명을 언급하지는 않았더냐.”
그의 모든 서술이 끝나자 한립이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 * *
“날짜나 지명이요?”
석철우가 당황해 하는 것을 보니,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한립이 이리 진지하게 물어오는 것을 보면 바로 이것에 답을 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 틀림없었기에, 그는 다시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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