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52
52화. 태남산, 태남곡
한참 후 드리어 석철우의 입이 떨어졌다.
“아!”
갑자기 소리를 치더니 석철우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여 신선이 말했던 것이 기억이 났는데, 신선대회 전에 어디를 다녀온다 하더군요. 무슨 태남곡(太南谷)이란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다른 신선과 만난다는 듯 했습니다요!”
“태남곡?”
한립이 몇 번 더 중얼거려 보았지만, 그런 지명은 들은 기억이 없었다. 이번엔 그가 손이구를 돌아보았다. 이 지역에 있는 곳이라면, 토박이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가원성에 그런 곳은 없습니다. 그런 이름의 산곡이 있었다면 제가 기억 못할 리 없지요.”
손이구가 난색을 표하며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잘못 기억한 것은 아니냐?”
“절대 아닙니다요. 그 여 신선이 이르기를 반나절만 더 가면, 태남곡이란 곳에서 그녀의 벗과 만날 수 있을 거라 한 것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한립의 말투에 날이 서자, 석철우가 서둘러 맹세를 하듯 확언했다.
‘반나절! 보통 사람이라면 가원성 부근이겠지만, 날개 달린 탈 것을 타고 이동하는 두 사람이라면 그 거리는 훨씬 멀어지겠지. 그래도 남주 지역을 벗어날 정도는 아닐 것이야.’
“남주 전 지역에 태남곡 혹은 태남이란 지명을 쓰는 곳을 알고 있느냐.”
“태남사(太南寺)!”
“태남산(太南山)!
다시 온화한 기색으로 돌아온 한립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태남이라 불리는 곳이 두 곳이나 된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립이 중얼거렸다.
“공자! 아닙니다. 모두 같은 지역입니다.”
“태남사란 절이 태남산 위에 있는 것입니다요.”
손이구가 쏜살같이 한립의 말을 정정하자 석철우도 질 수 없다는 듯 말을 보탰다.
“아! 그랬구만. 바로 그곳이겠어.”
“하지만 공자님. 한 번도 그 지역에 태남곡이란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 했습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요?”
손이구가 의혹을 제기했지만 한립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니, 이곳이 틀림없어.”
‘너희가 수도자가 아니니 모를 밖에. 아마 그곳은 어느 수도자의 거처 일거야.’
한립이 흥분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서 그 태남산이란 곳은 어디에 있지?”
“공자님, 태남산은 남주의 최남단에 위치해서 광귀성(廣貴城) 서쪽으로 사십 리는 더 가야 나오는 곳입니다.”
“손이구! 돌아가서 석철우에게 부방주 자리를 주거라. 네 마음이 편치 못함을 아나, 이왕 약속을 하였으니 지켜야겠지.”
그의 의문을 공손한 자세로 풀어주는 손이구에게 한립이 분부했다.
“그럴 리가요. 공자님께서 분부하신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절대 다른 마음은 없습니다!”
그의 말에 뜨끔한 손이구가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다.
“놀랄 것 없다, 네가 그동안 해온 바를 모두 지켜보았으니. 이 병에 든 것이 네 몸의 독을 완전히 없애 줄 해독약이다. 더 이상 그것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것 역시 내 약속한 일이니 말이야. 난 사람을 차별하지도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도 없다는 것을 알아두거라.”
품에서 약병을 꺼내 그것을 손이구에게 건넸다. 해독제를 받아 든 손이구는 기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사실 그 동안 몸에 지닌 부심환(腐心丸)이란 독만 생각하면, 입맛이 떨어지고 잠을 설치기가 일수였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감사합니다! 소인 정말 온몸이 부서져라 공자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약병을 받아 드니 손이구 입에서 감사의 인사가 줄줄 흘러나왔다.
이제 가원성을 한 동안 떠나있어야 하니, 이후에 손이구가 자신을 배신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없애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별 쓸모가 없었지만, 한립은 사평방을 최후의 보루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서 혹시 모를 재난을 대비한다지 않은가.
한립이 알기로 맹목적인 충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아무 이유 없이 배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상대에게 충심을 얻어내려면 반드시 당근과 채찍을 함께 쓰는 것이 가장 유용한 방법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니 이번에 한립이 상대에게 해독제를 줌으로써 한편으로는 손이구가 충성스런 모습을 더욱 오래 유지하게 만들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석철구에게 본보기를 보여 상벌이 확실하다는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이상의 생각을 마친 한립이 손이구가 뛸 듯이 기뻐 할, 또 다른 소식을 전했다.
“앞으로 한동안은 곡혼을 네 곁에 두어 보호해 주마. 그러나 절대 이것을 기회로 경거망동해서는 안 될 것이야. 곡혼이 강하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기인들이 있음을 명심해야 해. 욕심을 부리다 화를 입을 수 있어!”
“예! 소인 명심하겠습니다. 절대 곡혼 대인을 마음대로 부리지 않을 테니, 공자께선 걱정 마십쇼.”
한립이 신중히 경고를 하자 손이구가 곡식을 쪼아 먹는 새라도 된 냥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모두 물러 가거라. 멀리 좀 다녀올 것이니, 한 동안은 다시 찾을 것 없다.”
한립이 손을 휘저어 두 사람을 내보냈다. 손이구와 석철우가 분부대로 공손히 방을 떠나자, 이제 한립만이 방에 남아 고민에 빠졌다.
‘태남곡에 있는 수도자는 어떤 사람일까? 괜히 찾아갔다가 위험한 일이라도 겪는 것은 아니겠지? ’
해와 달은 뜨고 지는 것을 멈출 줄을 모르니 시간이 쏜살 같이 흘러 두 달이 지났다. 그리고 가원성 안에서 한립은 종적을 감추었고, 이후 오랜 시간 동안 행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 * *
광귀성(廣貴城)은 남주의 최남단에 위치해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성으로 가원성의 5분에 1에 불과했다. 그러나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호수가 있어 경치가 수려했다. 게다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과일들이 많이 나, 돈푼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풍류를 즐기러 오면서 제법 널리 알려졌다.
태남산은 그런 광귀성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남주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이었다. 그리고 그 산의 정상에 사원이 지어져 있었는데 바로 태남사였다. 이곳은 점괘가 잘 맞기로 유명해 고관대작들도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매년 이곳을 찾아 향을 태우고 소원을 빌었다.
이때 태남산 산기슭에 한 인영이 가부좌를 틀고 무성한 거목 아래 앉아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붉은 빛을 발하는 무언가를 쥐고는 그의 단전 가까이로 가져갔다가 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흡”
별안간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낮게 신음하니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물체도 붉은 광채를 잃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푸른빛을 띤 옥이었다. 옥은 맑고 투명하기 이를 데 없었고, 은은하게 빛까지 발하니 누가 보아도 비범한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복부 가까이에 두었던 청옥을 천천히 들어 올려 하늘을 올려다보자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바로 가원성에서 종적을 감춘 한립이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손에 든 물건을 보며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한립은 난약보옥(暖陽寶玉)을 손에 넣은 후, 하루도 쉬지 않고 몸에 스며든 독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독을 제거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는데, 그는 뼈 마디마디가 시린 듯한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는 그 생각만 하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독의 뿌리를 뽑은 것이다.
그래도 난양보옥이 대단한 보물은 맞는지 놀랍게도 자신의 영기를 받아들여 독을 제거하는데 효과가 좋았다. 한립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빈 나무함에 난양보옥을 조심스럽게 집어넣어 챙겼다.
이후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뻣뻣해진 팔다리를 움직이며, 두 달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그 날, 모든 계획을 마친 그는 바로 문부로 가 독패산장과 구양비천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내어준 명마를 달려 독패산장에 도착했다.
며칠간 정탐과 잠입을 한 덕분에 한립은 구양비천이 홀로 달구경을 나와 거니는 기회를 포착했고, 다른 법보들은 꺼낼 것도 없이 검부(劍符)를 이용해 그자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 모든 과정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그가 죽인 대상이 구양비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 시신을 살펴보기까지 했다. 한립은 그의 몸에 있는 흉터와 점이 모두 일치하자, 그제야 마음을 놓고 구양비천의 머리를 가지고 가원성으로 돌아왔다.
문부로 돌아와 엄 씨에게 구양비천의 수급(首級)을 건넬 때야 비로소 구양 장주가 강호에서 이름 높은 외공인 패왕갑(覇王甲)을 익혀, 온몸이 도검을 이겨 낼 수 있는 몸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엄 씨 역시 중상을 입히기 힘든 구양비천의 목을 잘라오자 매우 놀랬다.
엄 씨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한립도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상대는 자신이 보낸 검부를 암기의 일종으로 생각해, 자신의 외공을 믿고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반격 한 번 하지 못하고, 한립의 손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 후의 일은 더욱 간단했다. 엄 씨가 구양비천의 머리임을 확인하고는 보옥과 해약을 바꾸어갔다. 보옥을 얻은 한립은 엄 씨의 간곡한 만류에도 문부를 떠나 태남산(太南山)으로 온 것이다. 한립은 오는 내내 해독에 열중하면서도 어찌 태남곡의 수도자와 교류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상대가 악한 자일지, 정도를 가는 자일지 알 수 없었기에, 무작정 찾아가는 것은 꺼려졌다. 만일 그곳에 기거하는 수도자들이 사마외도(邪魔外道)를 추구하는 악한들이라면, 제 발로 찾아가 날 죽여 달라고 사정하는 꼴만 될 뿐이었다. 그래서 태남산에 도착한 한립은 우선 그 인근의 촌민들에게 태남산에 관련된 기이한 소문이나 괴담 같은 것을 탐문했다.
촌민들에게 들으니, 과연 태남산의 북쪽에 소문으로 전해지는 신비스런 산비탈이 있었다. 그곳은 항상 짙은 안개가 용처럼 굽이쳐서 거기에 발을 들이면 한치 앞도 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태남산과 같은 높은 산에 안개가 걸쳐있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나, 그렇게 농밀한 안개가 사시사철 그곳에만 자욱하게 퍼져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곳에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곤 했는데, 안개 속으로 들어간 이들이 바로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들어갔던 바로 그 장소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었다. 많은 촌민들이 그곳의 비밀을 알아내려 하자, 언제부턴가 그곳에 들어간 이들은 2~3일씩 헤매고 나서야 피골이 상접한 채 안개 속을 빠져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촌민들은 다시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고, 그 괴이한 산비탈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져 갔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한립은 확신했다.
그 괴이한 산비탈이 바로 자신이 찾던 곳이었다. 비록 그곳이 태남곡은 아니더라도 수도자의 거처임은 분명했다. 더욱 마음이 놓인 것은 촌민들의 서술에 따르면, 그곳의 주인은 심성이 악랄하거나 잔인하지 못하단 것이었다. 보자마자 한립을 죽이려 들지 않는다면, 그와 왕래할 여지가 분명히 있었다.
그럼에도 한립은 바로 그곳을 찾지 않고 자신의 몸에 남은 후환을 깔끔히 정리 했다. 최적의 상태로 수도자와 대면해야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도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 * *
그는 바로 숲을 벗어나 가까운 촌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립이 촌락의 입구에 당도하자, 열대여섯 살은 되어 보이는 소년이 기쁜 표정으로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립은 외부인이 경계할 것을 대비해 천안술을 펼쳐 소년을 살폈다.
백의를 걸친 소년은 희미한 영광(靈光)에 휩싸여 있었고, 밝기로 보아 자신보다 약간 부족한 수준의 수도자임이 분명했다.
#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