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523
523화. 대진의 황족(皇族)
“넷째 관주님의 명이라면 제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립이 걸어가며 그곳에 모인 수사들을 둘러보았다.
“당신이 재료를 정련한다고요? 수행이 너무 낮은 것 아닙니까. 군주께서 정련하기를 원하시는 재료는 아주 귀한 혈사은(血絲銀)인데 만일 일을 그르치면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남색 비단 장포를 입은 사내 하나가 한립의 수행이 연기기 3, 4성 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며 그를 무시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녹수 군주라고 불린 궁장 차림의 소녀도 그저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의아한 기색이 가득했다.
“혈사은은 확실히 희귀한 재료이지요. 저도 반드시 성공할 거라 자신할 수 없는데 다른 고명한 분에게 청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립은 전혀 분노하지 않고 도리어 미소 지었다. 그의 태도에 몇몇 수사들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이에 잘 생긴 사내 하나가 불만스레 물었다.
“이곳에 굉장히 유능한 연기사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분은 군주를 위해 제련에 나서주실 수 없는 것입니까?”
“위 사백님은 귀한 보물을 제련하시느라 며칠 째 폐관에 들어가셨습니다. 아마 군주를 위해 재료를 정련하시기는 어려우실 겁니다.”
연기전 제자 하나가 설명했다.
“재료를 정련하는 것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데 위 사백님께 나와 주십사 청해주시면 안 됩니까? 왕부 에서도 위 대사님의 위명을 들어왔습니다. 직접 한번 뵙고 싶습니다.”
녹색 궁장 소녀가 고요하게 청하자 연기전 사내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자기도 모르게 한립은 눈썹을 꿈틀했다.
예의 바르게 말을 했지만 교활한 구석이 있었다. 세 제자가 여인의 말에 넘어가 그 중 하나는 놀랍게도 위 노인에게 알리겠다고 답했다.
한립은 탄식했다. 노인이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방해하지 말라고 이르고 두 조수들과 함께 지하 밀실로 내려간 것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겨우 재료를 정련하는 일로 찾아 갔다가는 낭패를 당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과연 지하대전으로 내려갔던 제자는 잠시 후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달려왔다.
“군주, 위 사백님께서 시간을 내시는 것이 어렵다고 하십니다. 아무래도 한 사제가 해야 할 듯합니다.”
그가 여러 수사들의 시선에 억지로나마 미소 지었다.
“황천관의 연기전이 유명한데 세 분이 군주를 위해 정련해주시면 안 되나요?”
젊은 수사들 중 젊은 여인이 말했다. 나이가 약간 있었고 자색도 평범한 편이었으나 입가의 미인점이 매력적이었다.
“명주 소저에게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다른 재료라면 저희 셋이 나섰을 겁니다. 하지만 혈사은 같은 진귀한 재료를 정련하는 방법은 사숙님께서 한 사제에게만 전수해 주셔서 말입니다. 게다가 저희는 주로 평범한 법기를 다루는데 익숙합니다.”
세 수사가 민망한 듯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옥 부인을 따라 온 터라 이곳에서 오래 머물 수 없는데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으니 혈사은의 정제는 아무래도 사형께 수고를 부탁해야겠습니다.”
녹수 군주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한립을 향해 웃었다.
“군주께서 위험을 무릅쓰시겠다면 저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사형께서는 최선을 다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성공 여부는 크게 상관없습니다. 모두 제 운이 거기까지인 것이겠지요.”
소녀가 이렇게 까지 말하자 한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우르르 몰려온 다른 수사들을 보며 약간 미간을 좁혔다.
“재료를 정련하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지켜보실 수는 없습니다. 집중하기 어려워 성공 가능성도 크게 떨어질 테고요.”
“저만 곁에서 지켜보면 됩니다. 다른 분들은 세 사형들이 연기전 구경을 시켜주시겠지요.”
궁장 여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그녀와 같이 온 이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딱히 반대하는 말이 없자 한립은 두 말 할 것 없이 소녀를 데리고 지화대전으로 향했다.
지하대전은 법기를 제련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곳이었기에 백여 장 정도로 넓지 않았지만 상중하의 3개의 층으로 나뉘었다.
상층은 재료를 쌓아놓는 곳이었고 중층에서 지화(地火)를 이용해 재료나 저계 법기를 제련했다.
그리고 하층, 그러니까 지하 2, 30장 아래의 공간에서 전문적으로 지화의 연못을 사용해 고계 법기 이상의 보물을 제련하고는 했다.
한립이 보통 재료를 정련할 때 이용하는 밀실은 중층에 있었다. 그가 녹수 군주를 데리고 밀실로 들어가 몇몇 잡다한 재료를 정리했다.
“이곳에서 정련하는 것인가요?”
소녀는 호기심을 드러내며 밀실 곳곳을 살폈다. 특히 중앙에 놓은 큰 솥과 호리병 모양의 법기들에 눈을 빛내는 모습이 법기를 제련하는 곳을 처음 보는 기색이었다.
“군주께서는 법기를 제련해 본 적이 없으신가요?”
“어릴 적부터 이모님을 따라 공법을 수련하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왕부가 영맥이 있는 곳에 있었나 봅니다.”
한립이 솥에 남아 있는 재료들의 잔해를 치우며 물었다.
“사형은 제 신분을 모르시는 군요? 제가 정말 대진의 어느 왕 가의 여식인 줄 아셨습니까?”
소녀가 멈칫하며 붉은 입술로 웃어댔다.
“군주의 신분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잘 되었네요. 그럼 괜히 진짜 군주처럼 거드름 피울 필요도 없겠어요. 저는 대진 황상의 얼굴도 본 적이 없답니다. 그저 황실과 약간의 인연이 있을 뿐이죠. 사부님과 산 속에서 수련을 하느라 왕부라는 곳에도 가본 일이 없고요.”
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갑자기 태도를 바꿔 우아한 규수에서 재기발랄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황족이 아니라고? ’
한립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놀라셨어요? 그래도 군주라는 칭호는 가짜가 아니랍니다. 이모님이 황실의 체면을 잃으면 안 된다며 이런 차림으로 꾸며 주셨는데 너무 많은 수사들이 귀찮게 달라붙어 떠들어 대는 통에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요.
이제 한 사형과 둘만 남았으니 한숨을 좀 돌릴 수 있겠습니다. 설마 눈치 있는 분이 뒤에서 제 이야기를 하고 다니시지는 않으시겠죠?”
소녀가 밀실 의자에 풀썩 앉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모두 군주의 뜻대로 하시지요. 저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으로 할 테니. 하지만 가문 어른께서 평범한 분은 아니실 듯합니다.”
한립은 조금 어이가 없어 마른기침을 하며 말했다.
“대진의 사대 산수라고 들어보셨어요? 제 조부되시는 분이 그 중 한 분이십니다.”
소녀는 숨기는 기색 없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리 제가 견문이 좁아도 사대 수사는 들어보았습니다. 군주가 그 분들 중 한 분의 후인이셨군요. 황실의 핏줄보다 오히려 전도가 유망합니다.”
조몽용에게서 대진의 사대 수사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원영 후기의 수도자도 있었고 원영 중기의 수도자도 있었는데 각각 대단한 실력을 지녀 동급의 수도자들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 했었다.
“그런가요? 하긴 다들 조부님의 이름을 들으면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니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그녀의 솔직한 대답에 한립은 코끝을 문질렀다. 조금 골치 아파진 그가 소녀를 놔두고 수결을 맺으며 솥으로 법결을 날렸다.
동시에 솥이 울리며 붉은 화염이 활활 타오르자 소녀가 신기한 눈초리로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다.
“재료를 꺼내주시지요.”
한립이 커다한 솥을 완전히 발동하고는 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요! 미리 말해두는데 아까 말한 거는 무효예요. 다른 사람들 앞이라 예의상 한 말이고 진짜 재료를 날려먹으면 꼭 보상해주셔야 해요!”
소녀가 예쁜 눈을 깜빡이며 말하고는 저물대를 스쳐 주먹만 한 물건을 던져주었다. 은빛이 반짝이는 돌은 자세히 보면 혈관처럼 무수히 많은 핏빛이 가늘게 새겨져 있었다.
돌을 받으며 한립은 속으로 투덜댔다. 이렇게 귀한 보물은 연기기 제자가 아니라 축기기 수사라도 보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립은 아무 말 않고 한 손을 들어 재료를 솥으로 던진 다음 몇몇 보조 재료를 더한 후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부적을 한 장 꺼내 몸에 내려치니 남색 보호막이 펼쳐졌고 입으로는 계속 주술을 외웠다. 그 결과 호리병 모양의 법기들에서 영기가 반짝이며 새빨간 불기둥을 방출해 솥으로 모여들었다.
동시에 밀실의 온도가 후끈 올라갔다.
* * *
한립이 혈사은을 정련하느라 바쁜 동안 산봉우리의 어느 한적한 누각 안에서는 냉랭한 얼굴의 늙은 여 도사와 아름다운 얼굴의 여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구나. 우리 황족이 400년 넘게 계획하고 일고여덟 분의 제왕이 각고의 노력 끝에 여기 까지 올 수 있었지. 이번에 두 보물을 얻지 못해 일이 실패한다면 황실 전체에 막대한 화가 미칠 것이다. 우리 엽(葉) 가(家)에서 그간 몰래 세력을 키워왔다지만 진정으로 불가 등 다른 세력과 전면적으로 부딪히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야. 유가도 입으로만 황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떠들어 대지 실제로는 이익을 쫓아 움직이지 않느냐. 요즘 우리 엽 가가 너무 위험한 불장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는구나.”
이에 여 도사가 신중하게 말했다.
“고모님의 뜻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지금이야말로 우리 엽 가가 철저히 다른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절호의 기회입니다. 일곱째 숙조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잊으시지는 않으셨지요. 황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이들이 원영기 수사들을 보내 공격하고는 엉뚱한 이유나 둘러대며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말이 좋아 수도계의 제일가는 세가이지 다른 세력들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희생양일 뿐입니다. 전해지는 문헌대로 통천령보를 얻을 수 있고 그간 엽 가가 키워온 세력을 더하면 다른 세력들도 저희 가문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겠지요.”
“수도계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통천령보의 위력이 불가사의할 정도라고는 하지만 겨우 보물 두 개를 얻는다고 세상이 바뀐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는 믿을 수 없다. 오히려 다른 세력들의 경계심을 높이고 보물이 화를 불러올 수도 있음이야. 게다가 각각의 세력에는 급이 다른 존재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누구나 나서기만 하면 우리 엽 가 정도는 전멸을 당할 것이야.”
여 도사의 눈에 차가운 빛이 돌았다.
“화신기 수사는 본래 수도계에서 무적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백님들이 통천령보를 얻으신다고 해도 그런 노괴들 앞에서는 간신히 목숨을 구제할 정도겠지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저희 엽 가는 백여 년 전부터 그런 노괴들의 약점을 몰래 조사해왔습니다. 그들은 예상대로 원영기 수사들보다 천여 년을 더 살지만 대진에서 지난 이천 년 동안 화신기에 이른 수사들은 몇 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몇은 무사히 영계에 승천했을 것이고 인계에는 기껏해야 두세 명 정도가 머물고 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인계에 머물기 위해 대가를 톡톡히 치렀기에 쉽게 싸움에 나서지도 않고 수행을 원영 후기 수준으로 유지한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그들도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무적은 아닙니다. 또한 그들이 겨우 한 세력의 흥망에 관여하기 위해 나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걸 어찌 알아낸 거지? 설마 전부 네가 추측한 것이라는 말은 말거라. 오랜 세월 많은 수사들이 화신기 수사들의 비밀과 소식을 알아내려 노력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거늘. 겨우 백여 년 만에 이런 정보를 알아내다니. 내가 늙었다고 정신까지 흐릿한 줄 아느냐?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이냐?”
여인의 말에 여 도사는 좋아하기는커녕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
“제가 고모님에게 속일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소식은 정말 저희 엽 가에서 알아낸 것이 맞습니다. 다만 최근에 새로운 장로 분이 가문에 들어와 알게 된 사실이 상당수지만 제 예상과 일치했습니다.”
여인이 고모의 노한 모습에 서둘러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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