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611
611화. 역령통로(逆靈通路)
한립은 굳은 얼굴로 품에서 옥병을 꺼내 마시고 법력을 회복했다. 다른 방법을 이용해 강력한 일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그 순간 노란빛이 뛰어들어 순식간에 노란 부적으로 변하더니 장벽에 붙었다.
그리고 노란빛이 장벽을 타고 퍼지더니 금빛에 싸인 무언가가 유성우처럼 날아들었다. 금빛 화염에 싸인 야수였다.
공간 장벽이 드디어 조각나며 밖에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쁜 마음에 한립이 가장 먼저 푸른 빛줄기로 변해 구멍을 통과했고 인간형 꼭두각시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눈앞이 밝아지며 익숙한 대청에 들어선 그를 따라 몇 개의 빛줄기들이 분분히 떨어져 내렸다.
만년시웅, 임은병을 제외하고 조금 전까지 제단 옆에 있던 향지례도 있었다. 그들이 빠져 나온 곳은 진마탑의 7층에 있던 대청이었다!
한립이 놀랐다는 눈빛을 보내자 향지례가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려했다. 그 순간 금빛 빛기둥이 장벽 속에서 분출되며 은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향지례가 눈치를 보며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입을 닫았다. 그리고 장벽의 구멍은 신속하게 사라져 없어져 버렸다.
모두가 서로를 경계하느라 대청 안에 침묵이 흘렀다.
“이곳에서 멍하니 서있다가는 마기를 흡수한 마물에게 전부 죽을 것이다.”
령롱이 냉랭히 다른 수사들을 훑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롱몽 선배님이십니까?”
머뭇거리던 향지례가 불확실하다는 듯 물었다. 그를 환묘천상에 가둔 것은 롱몽과 고마의 분혼이 합쳐진 새로운 영혼이었기에 령롱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이름을 알다니, 곤오삼노가 네게 무슨 말을 남긴 것이로구나. 네가 말한 롱몽은 내 일부에 불과하다.”
향지례가 복잡한 이야기에 눈을 깜빡이며 이해를 못하자 령롱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달싹거렸다. 그녀에게서 전음으로 몇 마디를 들은 향지례가 화들짝 놀라 눈빛이 달라지더니 의식으로 령롱을 살폈다.
마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앞의 은발 여인을 향해 노인이 공손히 인사를 했다.
“령롱 왕비님, 봉인을 벗어나신 것을 경축 드립니다! 왕비님의 일은 당시 곤오삼노께서 당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때 일은 어쩔 수 없으셨다고, 롱몽 선자의 원신이 뜻밖에 고마의 혼백과 융합되어 같이 봉인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흥, 그건 내가 영계에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할 문제다! 지금은 일단 마기를 통제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진마기에 3일 이상 잠기면 아무리 내 육체라도 철저히 마화가 될 것이야. 고마가 본래의 위력을 회복하고 충만한 마기를 얻고 이곳을 떠난다면 마인(魔人) 대군을 길러내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인계는 상고대전 때와 같은 전란에 휩싸일 것이야.”
령롱이 차분히 말했다.
“왕비님께서 무엇을 우려하시는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진마기도 두렵지만 고마 자체도 수행을 회복하면 인계에 그와 대적할 자가 없겠지요. 게다가 9층은 이미 마기로 가득 차 지금은 상대를 격살할 방법도 없습니다. 게다가 제가 태일문에서 받아온 파계부도 이제 두 장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향지례가 두 팔을 감싸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럼 마기를 다시 봉인할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듣고 있던 임은병이 돌연 물었다.
“그게 그리 쉬운 줄 아느냐. 일단 봉인 진법이 훼손 되었으니 이런 상황을 위해 준비한 예비용 진법을 움직여야 하는데, 이곳을 빠져나오기 전 고마가 화룡새를 부수는 것을 보았다. 이제 마기를 억누를 방법이…….”
향지례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다들 걱정과 고민에 대청 안이 다시 고요해졌다.
“상고 수사들께서 예비용 진법을 준비했다면, 이치상 그것을 통제할 법기를 화룡새만 남기셨을 리 없을 텐데요.”
침묵하던 한립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한립의 말에 향지례가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맞는 말이다. 예비 진법 뿐 아니라 상고 수사들은 곤오산 금제를 통제할 법기를 하나 더 준비해 두었지. 하지만 화룡새와 달리 다른 법기는 상고 시대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곤오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유일하게 위치를 알고 있는 곤오삼노의 또 다른 후인은 이제 사라지고 없지.”
“또 다른 후인이라니! 흥, 그 세 녀석들이 아주 신중하게도 준비를 해놓았구나.”
듣고 있던 령롱이 콧방귀를 뀌며 곤오삼노의 저의에 대해 생각했다. 임은병과 만년시웅도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그런데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다른 법기는 어떤 보물인지요? 설마 화룡새와 똑같이 도장 형태의 보물입니까?”
“아니, 천정비(天晶碑)라고 불리는 비석이다. 그것만 있다면 예비용 진법을 소환할 수 있을 텐데.”
향지례가 대수롭지 않게 답해주었다.
‘천정비!’
한립은 속으로 뜨끔했다. 곤오산을 오르며 발견했던 물건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위에 적혀 있던 고대 문자들이 천정비였나? ’
한립이 잠시 생각에 빠져있을 때 령롱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한립은 가슴이 철렁했다.
“정 방법이 없으면 일단 이곳을 떠나야겠지. 저 마물이 이곳을 빠져나오려면 며칠은 있어야 할 테니 그동안 남강의 모든 수사들을 결집할 것이다. 강력한 진법을 펼쳐 잠시 곤오산을 다시 봉인하면 될 게야. 그러고 나서 다른 문파들에게도 소식을 전해야겠지. 마물이 아무리 마기를 흡수하고 강대해졌어도 수천수만의 수사들이 모이면 상대하기 어려울 게야. 그리고 진마기는 인근 만리를 금지구역으로 정하고 천천히 해결하면 될 게다.”
“향 수사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대로 진행하시지요! 저도 만요곡으로 돌아가 곡주께 이 일을 알리겠습니다. 이런 일은 인간 수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니 저희 요족도 힘을 보태야지요.”
만년시웅이 길게 한숨을 쉬며 제 나름의 성의를 표했다.
“오! 귀 곡이 나서준다면야 큰 힘이 되겠군. 특히 만요곡 차 수사는 명성이 자자하신데 인연이 닿지 않아 이 노인네는 뵙지 못했으니 말이야! 아마 줄곧 폐관 수련 중이시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향지례가 그의 말을 반겼다. 만년시웅은 그저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은 하지 않고 돌연 고개를 돌려 령롱에게 공손히 물었다.
“령롱 왕비님! 저희 곡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왕비님께 일전에 인연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분께서는…….”
여기서 말이 끊기며 만년시웅이 입술을 달싹였다. 본래 아무런 감정이 깃들지 않았던 령롱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어쩐지 네가 진마탑에 봉인되어 있음을 내가 어찌 알았는지 이상했는데 이제야 그 내막을 알겠구나.”
령롱은 뜻밖에도 옛일을 떠올리며 회한에 젖는 듯 했다.
“왕비님께서 저희 곡주님의 신분을 아셨으니 저와 같이 만요곡으로 돌아가 머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요곡에 각양각색의 요수들이 모여 있으니 왕비님께서 적합한 육체를 찾으시기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난 만요곡으로 갈 생각이 없다. 곤오산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잠시 후에 다시 저 공간으로 돌아갈 것이다.”
“곤오산을 빠져나가지 않으시고 다시 저리로 돌아가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나 혼자는 아니지. 저 자는 벽사신뢰를 지녀 쓸모가 있으니 나와 함께 돌아갈 것이다.”
령롱이 한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말을 듣고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무언가 말하려다 말았다.
“농담이시지요? 그렇게 모험을 감수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향지례가 한립을 잠시 보더니 참지 못하고 은발 여인을 말렸다.
“나는 너희와 상황이 다르다. 영계에서 진짜 육체를 지니고 인계로 강림하였지. 화신 후기로 수행을 끌어올린다고 해도 다시 승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영계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내 육체를 되찾아 역령통로로 돌아가야 한다. 이번에는 은월랑족 고유의 비술을 준비하였으니 저 마물에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다시 몸을 되찾아올 확률이 절반은 된다.”
“그럴 수가……. 왕비님, 신중히 생각하시지요.”
만년시웅은 아주 난감한 얼굴이었고 향지례 역시 옆에서 서둘러 은발 여인을 말렸다. 은발 여인이 고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너희가 내게서 역령통로의 위치를 듣고자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내가 돌아가 죽어 버릴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겠지!”
그 말에 만년시웅은 멋쩍어 했지만 향지례는 오해라는 둥 헛소리를 하며 끝까지 모른 척 했다.
“됐다. 너희가 무슨 생각이든 상관없다. 당시 역령통로를 통해 인계로 내려온 인간이나 요족의 수는 많았지만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인물은 거의 없었지. 역천통로는 영계에서도 일반 수사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그러나 이른바 역령통로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정확한 위치랄 것도 없지.”
은발 여인이 유유히 늘어놓는 말에 향지례과 만년시웅은 멍해졌다. 한립은 눈을 빛내며 귀 기울여 듣는 척 하면서 몰래 저물대 속의 천정비를 살펴보고 있었다.
곁에 있던 임은병 역시 역천통로라는 수도계의 비사에 빠져들어 그를 주시하지 않았다.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향지례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급히 물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역령통로는 영계에서 천지의 힘을 빌려 임시로 만들어 낸 통로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족과 요족들이 통로를 통해 인계로 내려온 후에는 사라졌지.”
“아닙니다. 상고대전 이후 분명 누군가 역령통로를 통해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역령통로가 없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요?”
만년시웅은 믿기지 않다는 듯 초조하게 물었다.
“고마계가 인계를 침략했을 때, 인계 수사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는지 잊은 것이더냐?”
“전계향(傳界香)!”
향지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래, 그것이다. 그들이 돌아갈 때도 전계향을 태워 영계에 다시 통로를 열어 달라 알린 것이지. 너희는 전계향이 있지도 않겠지만 그것을 구해 태운다고 영계에서 너희를 위해 역령통로를 열어줄 듯 싶으냐? 통로를 낼 때마다 소모되는 최상급 영석의 수량은 인간족과 요족이 온 힘을 모아 끌어 모아도 구하기 힘들 것이다.”
령롱은 만년시웅의 마지막 희망까지 부숴버렸다.
“그럼 왕비께서는 육체를 되찾으신 후 어찌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향지례가 중요한 질문을 했다.
“천규 요왕의 왕비이자 은월랑족의 공주인 내가 다른 수사들과 같을 수 없지 않겠느냐. 내 육체와 의식에 역성반 표식이 새겨져 있다. 내 의식이 육체에 깃들어 있을 때만 표식을 발동할 수 있는데 장로들이 나를 위해 만들어둔 전용 진법을 이용해 역성반의 힘으로 소형 역령통로가 열리게 된다.
이 통로는 나 혼자만 들어갈 수 있고 다른 자가 들어가면 표식이 부합하지 않아 잘게 부서질 것이다. 그때 원살 성조의 분신에게 육체를 빼앗기지만 않았어도 바로 영계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을!”
령롱이 안타깝다는 듯 말을 맺었다.
“역성반 표식이요? 그럼 왕비님의 역성반은 보물의 실체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어쩐지 소문난 영계의 보물에서 나오는 위력이 생각만 못하다 했습니다.”
만년시웅은 령롱이 들고 있는 원반을 보고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향지례 역시 실실 웃던 얼굴이 굳어 안색이 좋지 않았다.
수백 년 간 품고 있던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졌으니 누가 웃고 싶겠는가.
“그럼 화신 후기에 이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까? 왕비님도 아시겠지만 인계의 영기가 이렇게 변한 마당에 수행을 해서 화신 후기에 이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만년시웅이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희망을 담아 사정했다.
“사실은 역령통로를 여는 것 외에도 영계로 올라갈 방법이 딱 하나 더 있다. 다만 이 방법은 이론적으로 가능할 뿐 성공한 이는 극히 드물지. 십중팔구는 실패해 목숨을 잃는다는 말인데, 그래도 들어 보겠느냐?”
“당연히 듣고 싶습니다.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인계에서 무기력하게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것 보다는 나을 것 아닙니까!”
향지례가 정신이 번쩍 들어 즉시 답했고 만년시웅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주는 것은 가능하지만 조건이 있다. 내 육체를 되찾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너희가 빌려줘야 한다.”
“예?”
향지례와 만년시웅이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나 령롱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의 마룡인의 모조품인 칼날과 향 수사의 파계부 두 장을 받도록 하지!”
# 612